욕망과 자유. 이 두 가지 단어를 풀어내면 인생사 만사형통일 것 같다. 나의 욕망의 도주선을 타고가며 자유를 누리는 삶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그런데 욕망을 생산해내기도 쉽지 않거니와 자유로 가는 길도 멀게만 느껴진다. 철학자들도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질과 자유라는 인식의 경지를 화두로 깨달음을 얻고자 평생 몸부림을 친 것으로 보인다. 자유와 욕망. 가장 진부한 이것들을 가장 급진적으로 해석해낸 사람들이 바로 당대를 주름잡은 철학자가 아닐까.
프로이트는 욕망과 자유의 양립불가능성을 주장했다. ‘무의식’과 ‘그것(Es)’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욕망에 대해서 얼마나 수동적이고 자유롭지 못한지 증명한다. 개체를 보존하고 성관계를 통해 생식하며 결국 죽음을 향하는 유기체의 본능으로 그것의 욕망을 이해했다. 인간의 욕망은 이 생명의 필연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므로, 욕망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남자는 원래 그래’ ‘수컷은 동물적이므로 그 사람에겐 죄가 없어’라는 얘기는 익숙하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 인간의 유한성을 상정해놓고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용인하는 근거로 삼는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을 억제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허무주의가 근대 인간주의의 색조를 형성한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누구누구의 욕망'으로 인격화했고, 자유로운 리비도를 '엄마-아빠-나'라는 욕망의 삼각형 속에 가두어버렸으며, 꿈과 환상으로 재현될 뿐인 극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기획은 들뢰즈 가타리는 자본주의의 핵심을 응축한다고 보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가 욕망에 부여한 인격성과 가족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즉 욕망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점을 뛰어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기계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말한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계들이 접속하는 장이 ‘배치’다. 들/가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한다. 기계들이 욕망하며 인간 역시 기계의 일부로서 욕망의 기계적 생산에 참여한다는 얘기다. 들/가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을 초월한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계적 욕망 속에서 자유롭다. 욕망하는 기계로서 자유롭다. 이 무슨 소리인가?
“욕망하는 기계들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바로 이 힘에 의해 그것들은 많은 구조들을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하는 기계가 된다... 기계는 두 가지 성격 혹은 힘을 갖고 있다. 하나는 연속체의 힘, 즉 기계의 문이라는 성격인데 이 문에서 어떤 부품이 다른 부품과 연결된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급변이다. 이 두 힘은 하나를 이룬다. 기계는 그 자체 흐름-절단이기 때문이다.”(566)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혀-기계는 맛보는 혀가 됐다가 사랑하는 혀가 됐다가 거짓말하는 혀가 된다. 개체의 동일성은 흐름의 절단면일 뿐이다.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욕망하는 기계로 변신, 즉 탈영토화 탈코드화가 가능하다. 다르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봤을 때 나는 의지와 결단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로 활발히 작동하는 만큼 자유를 누린다.
자유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흔히 자유라고 하면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나 의지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간섭받지 않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자유는 자아의 선택이 아니다.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가 술을 마시는 건 자유가 아니라 예속이다. 그의 자유는 술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알코올 중독자의 경우에서 보듯 기계처럼 반복되어 딱딱하게 응고된 삶 속에서의 행동이란 대체로 오랜 타성이나 습속의 표현일 뿐이다. 자유는 선택이 아니라 능력이다. 스피노자는 신체의 능력이야말로 무한하며 정신은 신체의 무한성을 표현할 뿐이라고 말했다. 들/가는 스피노자에 따라 신체(기계)의 역능인 욕망 안에서 자유(무한성, 복수성, 탈영토성)를 발견한 것이다. 니체도 신체는 거대한 이성이라고 했다. 선, 도덕, 진리보다 건강한 육체적 본능을 강조했다. 자유로운 것은 정신일까 신체일까? 우리는 정신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체 안에서 자유롭다.
고전주의는 ‘이성’의 시대였다. 기계는 사유의 연장으로 파악된다. 휴머니즘은 인간이성의 척도 위에 수립되었다. 근대는 ‘생명’의 시대다. 기계는 신체의 연장으로 이해됐다. 휴머니즘은 인간신체의 척도 위에 수립됐다. 근대적 휴머니즘은 역학(물리학, 열악학, 인과율)적 세계 안에는 어떤 자유도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힘의 세계, 작용하는 힘과 작용 받는 힘의 세계, 원인과 결과의 세계 안에서는 어떤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오직 역학적 필연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온 ‘도덕’(이념, 대의, 의지)에 의해서만 자유는 열린다고 봤다면, 들/가는 오직 역학의 세계, 역능의 세계 안에서만 자유가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힘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억압적인 아버지에 반항, 어떤 대상에 대한 원한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은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응적인 삶이다. 자유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능동적 힘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