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복한인터뷰

인터뷰 후기 - 말하는 사람에서 들어주는 사람으로

“이런 책 읽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나, 조선소 노동자>로 글쓰기 수업을 하는 날 학인들에게 건넨 첫마디다. 이 책은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사고로 6명이 죽고 25명이 크게 다친 사건을 기록한 르포다. 아무래도 끔찍하다. 저 멀리 거제도에서 배 만들다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서울 합정동에서 평일 낮 2시에 모여앉아 글쓰기를 배울 정도의 시간, 돈, 문화 자원은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학인들의 말은 놀라웠다.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일년 동안 투병했었다, 일은 그만뒀고 보상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얼마 전까지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기에 공감이 많이 됐다, 울 아버지도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는데 ‘산재’라는 말을 몰랐거니와 아버지 스스로 ‘내가 못배운 사람이라서’ 이런 사고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등등 사무치는 증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간혹 훌쩍였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 누군가 먼저 자기 고통을 말하기 시작하면 고통받는 존재들이 속속 연결된다는 것을 또한번 실감했다. 그랬다. 우리나라가 괜히 산재1위(23년째) 국가가 아니다. 일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그 고통을 가까이서 겪어내는 가족들도 많을 것인데, 그동안 산재의 아픔이 제대로 언어화 되지 못했던 거다.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김도현은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2019년 5월 ‘진실의 힘’ 인권상 시상식 자리에서 처음 봤다. 동생 태규가 용돈벌이 삼아 건설현장에 일용직으로 나갔다가 3일 만에 추락사고로 숨졌다고 말했다. 아니 울부짖었다. 울음에 말이 묻혀서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고야 알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서사에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어 숨진 김군 사건이나 화력발전소 기계에 몸이 낀 채 목숨을 잃고 6시간 만에 발견된 김용균 사건처럼 ‘크나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데, 그런 나의 반응에 나는 한번 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김도현을 더 인터뷰하고 싶었다. 공사현장 추락사가 일년에 290여 건이다. 도심 어딜가나 365일 건물이 부서지고 올라가는 공사판 토건공화국 아닌가. 건설현장이 많은 만큼 산재도 많다. 그러나 죽음의 스펙터클이 제공되지 않으면 이야기도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추락사 유가족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김도현은 생업을 포기했다. 엄마와 친구와 모텔에서 숙박하면서 고용노동부, 경찰서, 현장을 돌며 동생의 죽음에 관련된 자료를 하나하나 모았다. 증거를 제시해 재수사를 진행시켰다. 그럼에도 2심 판사가 “이건 비일비재한 추락사다”라며 합의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인터뷰 때 듣고 나는 속으로 부끄러웠다.

김도현은 이제 들어주는 사람이다. 뉴스조차 되지 못하는 숱한 이름없는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눈떴다. 동생의 죽음 이전엔 산재가 뭔지도 모르고 국회의원들 얼굴도 모르고 살았는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하나씩 검색해보고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투쟁을 하면서 국회에 매일 출근하는 그에게 가까이서 국회의원을 접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물었다.

“앞뒤가 너무 다른 이중성? 그리고 결국에 이 정치는 정말 더럽다는 걸 느꼈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할 때도 죽음을 어떻게 편 가르기를 해요? 50인 미만, 100인 미만, 왜 이런 조건을 넣어서 죽음에도 차별을 만드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앞에서는 잘한다 하지만 뒤에서는 뒷통수 까고 기업 편을 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움직여야 이 나라가 바뀔 수 있으니까 너무 개탄스러웠어요.”

다른 유가족이 그렇듯이, 그도 정치하는 사람들을 반면교사 삼아 정치적 주체로 거듭났다. 이 사회가 어디가 어떻게 고장났는지 정확하게 간파했다. 지독히도 안 바뀌는 현실이지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소신도 뚜렷했다.

“왜 이렇게 약자들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는 것인지... 사람 생명에 조금이라도 경각심 가졌으면 좋겠어요,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외칠 거에요. 이야기마당 같은 데 가보면 학생들의 인식도 바뀌어가는 게 느껴지니까 이런 걸 계속 해야겠구나 생각해요. 한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으로 인해 또 여럿이 생각이 변하잖아요.”

<나, 조선소 노동자>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자기가 산재사고를 당하리라고 생각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부터도 그렇다. (낼 출장을 가는데 열차사고가 나진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린 누가 산재 사고의 억울함을 말할 때 들어주는 사람의 자리에 있을 가능성은 높다.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신체’가 많아지는 세상. 적어도 어떤 죽음에 대해 ‘비일비재한 죽음’이라고 말하는 일이 부끄러운 사회를 만드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 같다. 김도현은 ‘비일비재한 죽음’이란 단어를 없애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