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복한인터뷰

은유의 연결 - 산재피해 유가족 태규누나 김도현

태일이 엄마, 종철이 아빠, 한열이 엄마, 유민 아빠, 용균이 엄마….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들은 자식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났다. 대개는 엄마 아니면 아빠였던 유가족 계보에 누나가 등장했다. “저는 청년 건설노동자 고 김태규 누나, 김도현입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2019년 4월10일 공사 현장에서 동생을 잃은 이후부터다. 세상은 동생의 죽음을 “비일비재한 추락사”로 몰아갔다. ‘욜로족’으로 살던 그는 투사가 됐다. 일하다가 죽는 일이 흔해서도 안 되거니와, 세상에 하나뿐인 ‘태규’가 죽었기 때문이다.

태규랑 용균이는 1994년생 동갑이다. ‘태규 누나’의 시간은 ‘용균이 엄마’의 시간과 자주 겹쳤다. 그는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의 일원이 됐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앞두고도 같이 싸웠다. 용균이 엄마가 있는 곳에는 태규 누나도 있었다. 유가족들은 “노동자의 죽음을 벌금 몇푼으로 바꾸는” 기막힌 현실의 증언자로서 손팻말을 들고 인터뷰를 했다. 특히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에스엔에스(SNS)로 유가족의 입장을 민첩하게 전하며 꺼져가는 법 제정에 불씨를 살려 불을 지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본회의 통과 이틀 전인 1월6일, 국회 앞 농성장에서 김도현(31)씨를 만났다.

용균·동준 엄마 옆에 태규 누나

―단식 10일차인데 몸은 어떠세요?

“좀 힘이 쭉 빠지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정부안을 보고 잠을 못 잤어요. 누더기 법안을 만드니까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이렇게 단식하는 거 처음이신가요?

“전에 다이어트 한다고는 해봤죠. 사실 저는 처음에 안 한다고 했어요. 이런 무식한 방법 말고 세련된 건 없냐고.(웃음) 그리고 용균 어머님, 한빛 아버님 단식하시니까 지치지 않게 서포트하려고요. 나까지 기운 빠지면 안 되니까. 근데 동준 어머님이 동조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해서 그럼 저도 한다고 했죠.”

―의리인가요?(웃음)

“의리? 사랑이라고 해둘게요. 애정!(웃음)”

―슬프게도 이미 가족을 잃은 분들이 나서서, 일하다가 죽지 않는 법을 만들자고 싸우고 있어요.

“다시는 저희 같은 유가족 보고 싶지 않아요. 태규, 동준이, 용균이 누구 하나의 죽음도 다 개인 탓은 없어요. 열심히 일한 죄밖에…. 근데 죽은 거예요. 한 해에 산재로 죽는 사람만 2400명이고 다치는 사람은 10만명이에요. 그걸 다 지금 외면하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는 노동자를 부품처럼 여기는 이런 사회구조와 이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맞닥뜨린 거고요. 자그마한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을 잃어서 싸울 수 있는 거네요.

“이 법을 어떻게 해서든 통과시키면 일단 우리 아이들이 있는 곳에 ‘다시는’ 가족들끼리 가서 인사를 하자고 했어요. 우리가 이런 법을 만들었다고.”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은 2019년에 발족됐다. 다시는 누구도 산재로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모임이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 엄마 김미숙씨, <티브이엔>(tvN) 조연출 고 이한빛 아빠 이용관씨, 씨제이(CJ) 진천공장 현장실습생 고 김동준 엄마 강석경씨 등 열 가족 남짓이 활동한다. “자식을 잃고 하루하루 버티어낸 부모님들이 동생을 잃은 저에게 힘을 주셨다”고 그는 말했다.

고인이 된 동생은 그에게 각별했다. 태규는 월급날이면 누나를 불러내 막창에 소주 한잔을 샀다. 같이 영화도 보러 다녔다. 4년 전 아빠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후엔 누나를 더 챙겼다. 178㎝에 80㎏으로 건장하고 듬직했다. 태권도 유단자에 축구 선수였는데 중학생 때 다리를 다쳐 운동을 그만두고 특성화고에 들어갔다. 군대를 다녀오고 휴대전화 부품 만드는 하청업체에 다녔다. 1년 계약직이 끝나고 구직을 준비하던 중 ‘용돈벌이’로 일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태규는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애’라고 할머니는 말씀하곤 하셨다. 그랬던 동생이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일하러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김도현씨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 규명은 동생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젠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동생 추락사 밝히려 뛰어다닌 시간들

―현장에 제일 먼저 가셨죠?

“네. 사고 현장은 그대로 보존하는 게 원칙인데, 승강기가 1층에 내려와 있더라고요. 사측에서 처음엔 태규의 부주의로 휴대전화 보다가 떨어졌다고 했어요. 근데 20m 높이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흠 하나 없이 멀쩡해요?”

―사고의 원인이 자기 책임이라는 건가요?

“다 태규 잘못으로 몰아가는 데 견딜 수 없었어요. 통상 일을 빨리빨리 하려고 승강기 문을 항상 열어놓고 다녀서 그 틈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 텐데, 실수로 떨어졌다는 거예요. 저희가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었어요. 저랑 엄마랑 태규 친구랑 제 친구랑 넷이서 20일 동안 모텔에서 합숙 생활을 했어요. 현장, 경찰서, 소방서, 고용노동부 일일이 다 찾아다녔어요.”

―어떤 것들이 밝혀졌어요?

“원래 사람이 타면 안 되는 미승인 승강기에 사람을 태웠고, 승강기에 안전바도 없고 공사 현장에 흔한 추락방지망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았어요. 동생은 아침에 신고 나간 운동화 그대로 신고 일했더라고요. 안전화도 안전장비도 없고. 회사는 일용직이어서 안전화를 주지 않았다고 해요.”

―사측에선 자기들 잘못이 없다는 것인가요?

“원청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졌으니 엘리베이터 업체에 연락하라’고 해요. 하청업체 현장 이사는 자기도 군대 간 아들이 있어서 태규를 아들같이 생각했다며 ‘급히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했다’더니, 시시티브이(CCTV)를 보니까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태규가 죽어간 현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정말 분노가 단 한순간도 사그라지지 않았어요.(한숨) 저희가 처음에 수원에서 기자회견 했을 때 사측에서 엄청 막으려고 했대요. 제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한번 했더니 그때부터 매일 문자를 보내요.”

―뭐라고요?

“뵙고 싶다고. 얼마나 황망하시겠냐고. 태규 보내고 나서 21일째부터 문자를 하루에 한개씩 보내요.”

―그렇게 20일간 증거를 모으고 시위도 하니까 경찰도 움직인 건가요?

“처음엔 경찰에서 술 먹고 실족사한 걸로 방향을 잡고 수사를 하고 있었어요.”

―술 이야기는 뭐예요?

“저도 이게 뭔 소린가 했는데, 동준 어머니랑 용균 어머니 만나고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나라는 산재 사고를 항상 본인 잘못으로 몰고 간다는 거예요.”

―평소에 우울했다, 대인 관계가 안 좋았다, 술을 마셨다, 고인 탓으로요?

“네. 너무 억울해서 동생 시신을 부검까지 했는데 알코올은 검출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번에 한익스프레스 화재 사고 났을 때도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분들도 용역노동자였는데 담배도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 담배꽁초 버려서 불났다고 덮어씌우려고 했잖아요.”

유가족의 노력 끝에 고 김태규 사건은 재수사에 들어갔고, 1심은 시공사 현장 소장과 차장에게 안전관리 소홀 책임을 물어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도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젠 위험한 공사 현장 그냥 못 지나쳐

김도현씨는 백화점 수입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서비스직 노동자였다. 민주노총 서비스노조 조합원이긴 했지만 “그땐 노조가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노조에 대한 인식은 어떠셨어요?

“동료들이 다 회사가 아니고 노조 보고 일한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 서비스노조 카페에 불편사항 같은 걸 글로 올리면 노조 위원장님이 사측이랑 교섭을 해주시는 거죠. 예를 들어서 유니화를 편한 걸로 바꿔준다든지, 앉아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든지. 그런 걸 보면서 노조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은 했죠.”

―그래도 이렇게 국회 앞에서 싸우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겠어요.

“네. 사실 저는 굉장히 이기적인 애예요. 놀 거 다 놀고 여행 다닐 것도 다 다니고, 태규 보내기 전까지니까 20대를 9년 동안 즐기며 살았어요.”

그는 스물아홉에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 창업을 준비했다. 임차계약서를 쓰기로 한 날,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사고 직후 자책했다. ‘내가 조금만 카페를 일찍 개업했다면 거기서 태규를 일하게 했다면 공사 현장에 안 가도 됐을 텐데….’ 그런데 사고 원인과 책임을 밝혀내면서 알게 됐다. 그랬더라면, 태규는 무사했겠지만 그 자리에 간 다른 태규가 참변을 당했으리란 사실을. 2018년 추락사한 건설노동자가 290여명에 달했다. 원청은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과 건설 비용 감축을 요구한다. 노동자의 안전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현재 법체계는 원청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누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었다. 길가의 건물마다에서 ‘태규의 죽음’을 보게 된 ‘태규 누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안전하지 않은 현장을 보면 신고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한번은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안 쓴 사람을 보고 ‘안전모 쓰세요’ 그랬어요.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러냐고 하면, 제가 공사 현장에서 동생을 잃었다고 말해요. 현장에서 안전모나 안전띠 없이 일하거나 추락방지망이 없으면 엄마랑 저랑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요. 여기 빨리 오라고. 이번에 고용노동부에서 엄마 앞으로 마스크 열장이 왔어요. 신고한 기록이 있어서 보내준 것 같아요. 엄마가 택배 상자에 테이프 다시 붙여서 그대로 돌려보냈대요.(웃음)”

―사고 나고 1년9개월이 지났어요. 아직 재판 중인데 그동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없으세요?

“사고 현장에 가니까 원청 업체 이사가 저한테 그래요. 네 동생이 죽어서 여기 공사 지연돼서 돈 더 들게 만든다, 여긴 사유지니까 들어오고 싶으면 경찰 대동해서 들어와라. 그 얘기를 듣는데 여기 5층에서 뛰어내리면 이 사람들이 알아줄까 싶고 그때 진짜 힘들었어요.”

―유가족이 직접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것도 고통인데….

“가면 갈수록 진상 규명은 고사하고 책임자 처벌이 안 이뤄지고 무혐의, 불기소가 나오니까 진짜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때 유서도 썼어요. 아, 이래서 한 해에 2400명이 죽어도 ‘다시는’이 열 가족이 안 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그렇다고 보세요?

“모든 형사사건은 최종 책임자를 처벌하는 게 원칙인데, 산업재해는 그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개인이 싸우기가 너무 어려운 구조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합의하라는 소리만 해요. 나는 내 동생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고, 아직까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요. 2심 때도 판사가 ‘이건 비일비재한 추락사다’ 이런 소리를 해대면서 합의할 기간만 주고 이래요.”

김도현씨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책위도 없이 모녀가 외롭게 싸우는 걸 지켜본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그들에게 용균이 엄마 김미숙씨를 소개해주었다. 그때가 2019년 어버이날이다. 얼마 뒤인 5월28일 ‘구의역 김군’ 3주기 추모식에 가서는 ‘동준이 엄마’ 강석경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유가족이 할 일 많은 나라에서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됐고 금세 가까워졌다. 그의 엄마와 김미숙씨, 강석경씨는 동갑이다. 김도현씨는 다른 유가족들을 어머니, 아버지로 부른다. 국회 농성 중에 생일을 맞은 강석경씨에게 그는 손글씨로 쓴 축하카드와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부모님 세대와 같이 활동하시잖아요. 세대 차이는 못 느끼시나요?

“전혀요.(웃음) 너무 편해요. 도움도 많이 받고요.”

―어떤 도움이요?

“저희보다 먼저 절차를 다 밟아 오신 분들이니까 이때 되면 이건 힘들 거야, 이거 넘어가면 더 힘들다, 동준 어머님이 잘 말씀해주세요. 한빛 아버님은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위해 싸우는 의지,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시죠. 용균 어머님도 우리 자식은 잃었지만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씀하세요. 존경하는 분들이죠.”

―심리적인 거 외에 산재 관련해서는요?

“태규 사건을 알리는 데에도 도움을 주셨죠. 인권활동가 명숙 동지가 이재정 의원실 통해서 보도자료도 배포해주셨어요.”

―도움도 받고, 위로도 받고, 배우고, 좋은 관계네요.

“이젠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갈 수가 없어요. 왜냐면 가면 항상 저한테 괜찮냐고 물어보거든요.”

―뭐라고 하세요?

“저번에 친한 친구라서 결혼식을 갔는데 저보고 괜찮냐고 물어요. 나 안 괜찮다고 하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싸해지니까 난처해요. 저는 지금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이제 2년 됐으니까 태규 보내주면 안 되냐고 하는 거예요. ‘내가 태규를 안 보낸 게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태규를 위해서도 하는 일이고, 날 위해서도 하는 일’이라고 말하죠.”

―그 활동의 중요한 결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되겠네요.

“아까 용균 어머님한테 이야기하고 왔거든요. 힘내시라고. 저희가 진짜 큰일을 하고 있는 거다. 저희가 이 법이 필요하다고 진짜 많이 외치고 다녔거든요.”

김도현씨가 지난 6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농성 중 팻말을 들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온전한 법 되도록 계속 싸울 겁니다”

―글 쓰는 거나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거나 전에는 안 해보던 일인데 어떠세요?

“처음에 앞에 나갈 땐 청심환 먹고 했어요.(웃음) 며칠 전에 제 페북을 보고 <오마이뉴스>에서 기사가 났더라고요. 그때부터 하루에 서너개씩 올리고 있어요. 피케팅도 저희가 그냥 무작정 본관에 가서 하는 거예요. 누가 시키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사도 나고. 저 사실 글 쓰는 거 무서워하고 말재주도 없는데, 그래도 계속 누군가는 보겠지 하는 조그만 생각에 계속 올리고 수정하고 하는 거죠. 한 사람이라도 생각이 바뀌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김도현 선생님은 어떻게 바뀌었어요?

“저요? 투사가 된 것 같아요.(웃음)”

―거의 활동가 같으세요. ‘누구 동지’라고 부르시고.

“처음에는 ‘북한도 아니고 웬 동지?’(웃음) 그랬는데, 지금은 저도 이제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말이 나오고 편해요. 진짜 내 동지구나. 투쟁하는 동지들. 어떤 직책을 다 떠나서 평등한 관계예요.”

김도현씨의 변화는 서서히 주변으로 번져갔다. 그의 할아버지는 <티브이조선>과 <조선일보>를 끊고 다른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 손녀와 용균이 엄마가 나오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균 엄마, 한빛 아빠 너무 고생했고, 우리 도현이 사랑한다’면서 우셨다.”

인터뷰 이틀 뒤인 1월8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됐다.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벌금 하한선 삭제, 과로 자살과 일터 괴롭힘 제외 등 여러 문제점을 남겼다. 김도현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죽음마저 차별하는 법’이 되어버려 개탄스럽지만, 이제 출발이라고 생각한다며 “온전히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법이 되도록 ‘다시는’ 가족들과 함께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 며칠 후, 단식 후 보식 기간 중임에도 부산으로 달려갔다. 경동건설 추락사 고 정순규님의 유가족과 함께 시위에 나서기 위해. 또 며칠 후 용균이 엄마 김미숙 동지의 생일에는 황태미역국을 끓여서 집으로 찾아갔다. 아들 없는 생일의 적적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기 위해.

녹취 홍혜원

 

인터뷰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800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