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문명론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무려 세 가지나. 금기의 내면화. 사회적 생산관계에 따른 욕망. 국가와 전쟁의 차이말살 동일화 기능까지. 수시로 자신을 피고인석에 앉혀놓고 심판하는 일을 즐기는 행위는 선천적 질병이다. 모두 같아질 것을 원하는 동질화의 사회를 '국가에 대항하는 성숙한 원시사회'로 되돌릴 방법은 무엇인가. 끝모를 부유함으로 최대의 가난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을 누가 이렇게 바보로 만들었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집단(합)심리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개인심리학일까? 그렇게 보인다. 프로이트는 집단의 다수성이 갖는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집단심리는 개인심리의 양적 확장에 불과하고, 사회적 본능은 개인본능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집단을 집합으로’ 이해하는 구조주의-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집단심리학이다. 그에게 정서나 표상은 언제나 콤플렉스, 즉 집합적이다. [꿈의 해석]에서 확인한대로 모든 표상은 집단적이다. 단일한 감정, 단일한 표상은 없다.
근대의 집단심리학은 19세기 유기체 생물학에서 파생됐다. 개인과 집단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 같은 ‘르봉’류의 군중심리는 개인심리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집단심리가 아니다. 군중심리는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특성을 지닌 또 다른 개인심리에 불과하다. 질적 다수성이 없다. 군중 속의 부분으로서 개인은 자기만의 질적 특성을 상실한 채 다른 부분과 동일한 성질을 공유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짚어보자. 첫째, 개체적 차이를 말소시키면서 유기체적 동질성을 이루게 하는 힘은 리비도이다. 유기적 집단은 리비도적 신체의 한 양태이다. 둘째, 개인들의 산술적 합과 유기적 집합의 속성의 차이는 잉여, 초과 원소를 매개로 발생한다. 개체적 차이를 유기체의 동질성으로 변화시키니 위해서는 유기적 집합의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예외적 원소에 동일화 되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그리스도, 군대집단의 사령관, 정치결사체의 지도자. 당연히 모든 사회적 집단의 원천은 가족집단이기에 이들 예외적 원소들의 공통명칭은 ‘아버지’이다.
프로이트는 “(근대, 서구, 자본주의문명이 아니라)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시즘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라이히와 마르쿠제는 ‘모든’을 ‘어떤’으로 바꿨고 억압적이지 않은 문명의 가능성과 그 조건을 탐색했다. [문명속의 불만]은 인간집단을 형성하기 위해 왜 욕망의 억압이 요청되는지, 그로 인해 어떤 불만이 발생하는지 설명한다. 억압의 요청은 두 가지다. 필요에 의한 요청, 욕망에 의한 요청.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 생산관계가 결핍을 생산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적 생존방식을 노동과 분배규칙에서 찾았다. 문명은 노동기술의 발달에 따라 자연의 폭력과 희소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문명은 피착취집단의 욕구를 억제하는 법과 제도 때문에 자유로부터 멀어져간다. 프로이트에게 이 모순은 해결 불가능한 아포리아다.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결핍은 19세기 근대 에피스테메에서 태어난 쌍생아이다. 완전히 길들일 수 없는 자연, 인간은 그것을 운명(아난케)이라 부른다. 자연의 결핍은 인간의 노동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선험적으로 해소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노동생산성과 기술의 발달이 쾌락을 증대시킨다는 주장은 프로이트 당대의 문명비판론자들에 의해 비판받아왔다. 새로운 치료법을 수없이 개발해내는 우리의 문명이 그다지도 많은 질병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라. 이것은 욕구의 사회적 객관성을 말해준다. 사회적 생산관계가 결핍(욕구)를 생산하는 것이다. 다른 배치 속에서 결핍이 만들어진다.
자본주의가 있는 곳에 빈곤이 있다 프로이트를 포함한 근대 문명론자들은 문명과 야만을 대비시켰다. 하지만 원시인들의 생활은 결코 빈곤하지 않았다. 그들은 삶을 조직하는 방식, 욕구의 체계가 다르다. 자연의 희소성, 삶의 빈곤함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다.
<문명은 억압을 욕망한다>
죽음충동-> 금기내면화 -> 문명의 형성 프로이트는 문명의 핵심을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의 규칙을 정하는 능력’에 있다고 봤다. 자연의 희소성은 필연적으로 극복 불가능하다. 남는 과제는 완전한 본능충족을 억제하는 능력이다.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을 제한한다. 법적 제도적 폭력적 강제가 리비도의 자유로운 흐름(방출)을 방해한다. 증상, 꿈, 말실수 따위는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타협형성물이다. 나아가 쾌락원칙의 실현을 방해하는 보다 근본적인 충동이 있다. 환자가 치료에 저항하거나 고통스러운 외상의 순간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며 즐기거나 메저키즘처럼 자아의 고통 속에서 쾌락을 찾거나 반대로 타자의 고통을 즐기는 사례가 그렇다. 또 생명의 본질에는 무기물의 상태, 즉 죽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본능도 있다.
“인류에게 숙명적인 문제는 문명 발달이 인간의 공격본능과 자기파괴본능에 의한 공동생활의 방해를 억누르는데 성공할 것이냐, 성공한다면 어느 정도나 성공할 것이냐 하는 문제인 듯싶다.”
문명 속에서 불만족을 도입하는 것은 성적본능 쾌락원칙 에로스적 본능이 아니라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이다. 그리고 죽음충동은 문명의 부산물이 아니라 문명 자체의 형성자이다. “문명의 박탈을 초래한 금지를 통해 인간을 태고의 동물적 상태에서 분리하기 시작했다. " 성적인 의미의 좌절(근친상간) 경제적 의미의 박탈(분배의 규칙) 등 문명은 좌절과 금기를 외부적 강제로부터 내면적 강제로 옮겨놓으면서 출현했다.
이 내면적 금지의 작인이 바로 초자아이다. 초자아의 사회적 형상이 신, 전제군주, 아버지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형제사회가 출현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을 막기 위해 형제문명사회는 폭력을 초월적 일자, 즉 왕, 법, 신, 초자아에게 일원화했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폭력충동의 금지를 나눠가지는 방식을 택했다. 초자아의 금지명령, 즉 내면화된 금지명령이 유기체 내부(이드)의 공격충동으로 발해진다. 유죄판결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퍼진다. 이처럼 초자아의 금지의 명령과 향락의 명령의 이중구속에 시달릴 때 신경증에 걸린다. 문명이 초자아를 통해 금지를 내면화해 선천적 신경증을 안고 태어난다.
국가와 전쟁, 동일성의 욕망으로 작동 프로이트의 문명론은 원시사회와 문명사회를 구분하는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국가 없는 사회’와 ‘국가 있는 사회’의 구분이 그것이다. 국가는 사회적 몸체로부터 ‘분리’되어 예속의 욕망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원시사회는 ‘아직’ 국가가 없는 미숙한 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대항하는 이미 성숙한 사회이다.
족장제도와 ‘분리된 권력’은 다르다. 족장은 무보수 공무원처럼 일한다. 그의 임무는 외교, 군사적 역할에 집중된다. 사회체의 계급적 분화를 막는 것, 미분화된 단일체로 유지하는 것이 임무다. 잉여재화는 외교목적으로 선문하기 위해서만 점유된다. 그들의 위세는 ‘선물 줄 수 있는 능력’ 아니 의무 위에서만 지탱된다. 그들이 점유한 잉여재화는 사회에 대한 ‘빚’이다. 국가는 물질적 형태의 빚(세금), 심리적 형태의 빚(죄의식) 등 사회에 빚지움으로써 출현한다. 원시사회의 채무자는 지도자, 국가사회의 채무자는 인민이다.
원시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 타인종에 대한 공격을 보자. 민족말살과 인종말살이 있다. 민족말살은 다른인종을 자신의 동일성으로 흡수하는 것이고 인종말살은 제거하는 것이다. 서구문명사회 국가는 ‘동일성’의 욕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민족말살은 그들의 고유한 본질이다. 원시사회 역시 자민족 중심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타자의 ‘차이’를 해소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하나로 해소하는 ‘국가’라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의 목적은 자신과 타자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단일성’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시사회는 전쟁이 보편화된 상태다. 전쟁은 원시사회의 작동양식이다. 원시영토사회는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기 위해 비분화되어 있어야 한다. 전쟁이 많을수록 ‘통합화’는 적어지고, 권력분리의 위험도 적어진다. 문명국가사회의 전쟁은 타자와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한, 통합과 교환을 위한 특수행위이다. 그러나 원시사회에서 전쟁은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