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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인터뷰

은유의 연결-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용접공, 이라고 쓰지 않고 영어로 ‘웰더’(welder)라고 야학 입학원서에 썼다. 그건 매일 잔업에 시달리고 얼굴에 불꽃 상처가 만발한 삶의 실상을 가려주는 도금 같은 말이었다. 생이 누추해도 폼은 나야 했던 스물하나. 어서 돈을 벌어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위해 간 야학인데 <전태일 평전>을 만났다. 조선소 현장직 5천명 중 유일한 비혼 여성이었던 ‘진숙이’에게 대놓고 음담패설을 일삼던 아저씨들이 어느 날부터 수군거렸다. “야야, 저기 근로기준법 간다.”

김진숙은 1986년 2월18일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옳은 일을 한다는 기분과 진급하는 느낌으로 시작한 노조활동은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을 돌렸다가 얼굴에 보자기 덮어쓰인 채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하필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였다. 여기는 ‘니 겉은 빨갱이를 잡아 조지는 데’라는 협박에 놀란 그는 뭔가 착오가 생긴 거 같다며 항변했다. “저는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1직 사번 23733 김진숙입니다!”

그길로 해고돼 35년이다. 스물여섯부터 해고자로 살았다. 대공분실 세번, 징역 두번, 수배생활 5년, 부산에 있는 경찰서를 돌고 나니 청춘이 갔다. 한진중공업 조합원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네번의 장례를 치렀고, 그간 쓴 추모사를 엮어 <소금꽃 나무>(2007)를 펴냈다. 2011년엔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생활했다.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정리해고가 철회됐다. ‘체공인’(滯空人) 김진숙의 존재가 커질수록 ‘땜장이’ 김진숙의 복직은 멀어졌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포기한 적 없는 꿈이었다. 재작년부터 유방암 투병 중이다. 해고자로 죽을 순 없다고 생각하며 해고자로 올해 7월 환갑을 맞았다.

“제 목표는 정년이 아니라 복직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지난 6월23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복직투쟁을 선언했다. 출근 선전전 57일째 되는 날(8월18일) 문규현 신부, 신발공장 해고 노동자, 정의당, 이주민과함께, 금속노조 등 여러 동지들이 아침 6시 반부터 속속 도착해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정문으로 흘러들어가는 동료들에게 목례를 건넸다. 저 공장에는 이제 그를 진숙이라 부르고 그가 아저씨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팻말을 든 백발의 해고 노동자는 저 홀로 서럽다. 손팻말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김진숙, 파란 작업복 차림의 진숙이가 웃고 있다. 하늘 배경에 새긴 글자는 구호가 아니라 기도다. ‘끝내 내 돌아갈 곳, 그리운 조선소.’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하 ‘김 지도’) 인터뷰는 8월17일 부산 범일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35년간 복직투쟁 멈춘 적 없다”

―올해 말 정년을 6개월 앞두고 복직투쟁을 시작했어요. 지금 시점에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35년 전부터 늘 같은 생각을 했어요. 1986년부터 복직을 계속 주장했죠. 바로 출근투쟁을 했어요. 그때는 관리자들, 어용노조 간부들한테 맨날 맞았어요. 1년 넘게 싸우다가 87년 7월에 노동자대투쟁이 터졌는데 이듬해 임단협에서 임금인상이 우선이고 해고자 복직이 세번째 쟁점이었어요. 파업이 일어났고, 해고자 3명이랑 현장에서 5명이 동조 단식을 했더니 회사가 다음날 공장을 폐쇄하더라고요.”

―법적인 절차를 밟았어요?

“그냥 문을 닫아버렸어요. 직원들이 다 영도에 살 때니까 부인들이 아기들을 업고 와서 우릴 붙잡고 그렇게 우는 거예요. 우리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가. 봐주라. 진숙아 니는 내년에 복직해도 될 거 아니가.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같이 울고. 단식 중에 박창수가 폐결핵에 걸리고. 단식을 일주일 만에 풀었죠.”

그와 입사 동기인 박창수가 1990년 노조위원장이 됐다. 명실상부한 첫 민조노조가 들어섰다. “이젠 복직이 되는구나” 기대가 컸으나 박창수는 1991년 구속 수감 중 의문사했다. 견딜 수 없었던 날들이다. 노조의 힘이 강했던 시기인데도 복직 이슈는 계속 뒤로 밀렸다. 사쪽은 교묘하거나 노골적으로 그의 복직을 논의할 자리를 회피했다.

2003년에도 김진숙은 김주익, 곽재규 두 사람을 “잃었다”. 노조 지회장과 조합원이 숨지자 사쪽은 노조의 요구를 100% 수용했다. 정리해고 철회, 임금인상, 1986년 이후 누적된 해고자 9명의 전원 복직을 발표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지난 18일 아침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복직을 위한 출근 선전전을 하고 있다. 부산/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사람이 참 이기적이더라고. 둘이나 죽었는데도 내가 복직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니깐요. 나 들어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겉으로 표는 못 내도 심장이 막 뛰어. 근데 지부장이 하는 소리가, 김진숙은 안 된다고. ‘왜요?’ 이랬더니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한다고. 나보고 묻더라고. ‘어쨌으면 좋겠어요?’(침묵) 주익씨가 그렇게 됐을 때만 해도 조합원들이 밥을 먹었거든요. 그런데 재규 형까지 그렇게 되니까 아무도 밥을 안 먹어요. 구석에서 울고 있고. 언제 또 조합원들을 잃을지 모르는 분위기에서 내 복직 하나만 남았는데 끝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못 하는 거야.(눈물)” 단 한 사람, 김진숙만 빼고, 라는 단서는 이후에도 질긴 농담처럼 따라붙었다. 사쪽은 돈을 미끼로 던졌다. 1986년엔 3천만원을 제시했고 2008년엔 ‘생계비 월 200만원’의 조건을 내세웠다. 일부 조합원들은 그랬다. “돈 주는 데 뭐 할라꼬 굳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할라 하노. 내 같으면 그냥 200만원 먹고 떨어진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나는 돈도 필요 없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은 게 내 꿈이라고. 그 말을 이해시키는 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2011년에 자기들이 해고돼보니까 왜 굳이 내가 그렇게 복직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말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고향 강화도를 열여덟에 떠났다. 집에서 “제일 먼 곳으로 가고 싶어서” 부산으로 왔다.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열차요금이 2600원. 밤 11시15분에 부산역에 도착해 함흥여인숙에 묵었다. 이후 한복가게, 보세옷공장, 가방공장,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전전했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김해 시내버스 122번 안내양을 했다. 새벽 4시15분에 나와서 막차의 내부 청소까지 하고 나면 새벽 한두시였다.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는 뻣뻣하게 굳고 동전독이 올라 손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관리자들에게 수금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벌거벗긴 채 검신을 당했다. 월급은 12만원. 치욕의 시간을 통과하며 ‘인간의 일’을 구하던 스물한살, 조선소에 닿았다.

―처음에 어떻게 용접 배울 생각을 하셨어요?

“안내양이니까 라디오를 듣잖아요. 어버이날인데 조선소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수리선에서 녹을 털어내는 일을 하는 분들이 나왔어요. 라디오 진행하는 임국희씨가 그렇게 찬사를 늘어놓더라고. 돈 벌어서 애들 공부시킨다고 훌륭하다고요. 내가 저 일을 하면 자랑스럽겠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자격증 따고 조선소에 들어가서 아주 그때는 진짜 내 인생의 모든 걸 다 이룬 것 같았는데. 폼 나잖아요, 용접공.”

지옥을 피해 간 조선소는 더 큰 규모의 지옥이었다. 한해에도 수십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 두부협착,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갔다. 살아 있는 이들은 사망 원인이 ‘본인 부주의’라는 서류에 지장을 찍어주어야 했다. 문상이 잔업만큼 잦았다. 무엇보다 1만명 넘게 일하는 공장에 제대로 된 화장실도 식당도 없었다. 새까만 꽁보리밥에 쥐똥이 나오는 도시락을 공업용수에 말아 후루룩 삼켰다.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는(최승자 시 ‘미망 혹은 비망 1’) 삶, 죽으려고 지리산까지 올라갔는데 일출이 너무 황홀해 1년만 더 살자고 내려왔다가 노동조합을 알게 됐다.

―대의원 출마할 때 어려움은 없었어요?

“과장이 불러서 물어요. ‘니 뭐 할라고 나왔노?’ 나는 개뿔도 모를 때니까 야학에서 배운 말을 한 거지. ‘우리 회사에 민주노조를 쟁취하기 위해서 출마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회사가 발카닥 뒤집힌 거예요. 뭐, 쟁취?”

―5개월 만에 해고됐어요. 짧은 기간인데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어용노조 간부들이 횡령한 돈을 받아서 조합원에게 돌려주었어요. 30년 다닌 아저씨도 노조에서 돈을 처음 받아본다고 하고. 쉰살이 넘은 아저씨가 손을 흔들어주고, 간이화장실에는 ‘진숙이를 국회로!’라는 낙서가 적히고. 목이 메었어요. 저를 나이 어린 여자애로 바라보던 아저씨들한테 동료로서 인정받는 느낌. 내가 비로소 인간으로서 자기 몫을 하게 되는 것 같고, 사는 것처럼 사는 느낌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86년도 7월14일에 해고통보를 받는데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암 발병에도 “나를 일으켜 세울 건 복직뿐”

2009년 11월 이명박 정부는 김진숙의 복직을 권고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그의 노조 민주화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부당해고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정부의 복직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희망은 절망으로 또 한번 뒤집혔다. 김진숙은 1인시위로 출근투쟁에 나섰다. 정문 앞을 지키다 보니 통근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의 규모가 나날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회사가 일용직을, 다음엔 하청노동자를 자르더니 정규직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그는 2003년 김주익과 곽재규가 목숨을 던지면서 지켰던 조합원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자신의 복직투쟁이 정리해고 반대투쟁으로 바뀌던 순간이다. 2010년 1월 단식에 들어갔다. 백혈구 수치가 30까지 떨어져서 24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1년 뒤 35m 높이 85호 크레인으로 홀연히 올라갔다. “땅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쪽지를 남겼다. 2011년 1월6일, 역사적인 309일의 고공농성이 시작됐다.

‘100일, 200일. 그건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내려가면 제대로 못 살 거라는 거. 그게 더 중요해요. 제게는. 두 사람 한꺼번에 묻고 8년을 허깨비처럼 살았으니까요.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따뜻한 거, 시원한 거, 다 미안했으니까요. 밤새 잠 못 들다 새벽이면 미친 듯이 산으로 뛰어가곤 했으니까요.’(7월28일, 204일차 트위트)

하늘에 고립된 김진숙은 트위터 140자로 세상과 소통했다. 시인이자 선동가이자 재담꾼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트위트는 리트위트로 노을처럼 번져갔다. 노동자, 학생,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이 희망버스를 타고 영도조선소 농성장을 찾았다. 최루탄과 물대포에 맞서 “내가 김진숙이다”를 외쳤다. 5차 희망버스까지 1만명 이상 다녀갔다. 한진 사태는 외신에까지 보도됐다. 여론의 압력에 밀린 사측이 정리해고를 철회했다. 그가 309일 만에 땅을 밟았을 때 노회찬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남겼다. “김진숙에게 주어져야 할 것은 체포영장이 아니라 노벨평화상입니다.”

―크레인 농성은 여러모로 대단했어요. 근데 고공농성으로 김 지도가 복직된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왜 안 된 거죠?

“처음부터 정리해고 철회만을 요구 조건으로 내세웠어요.”

―아니 왜요? 여세를 몰아서 같이 해결해도 됐을 텐데요.

“투쟁의 순수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훼손되니까. 크레인 농성을 두고 사측이 그런 선전을 했어요. 해고자 앞세워서 자기 복직하려고 한다. 김진숙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올라갔다, 별소리가 많았어요. 복직 요구 명단에 저는 처음부터 안 포함시켰어요.”

―벌써 10년이 됐는데, 김 지도는 크레인 싸움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나는 크레인에 있으면서 오감이 열리는 경험, 내 능력치의 최대한을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제가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크레인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영웅화하는 게 진짜 너무너무 싫었거든요. (크레인의 김진숙은) 나보다는 확대된 이미지? 과장됐어요. 그리고 크레인 아래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싸웠어요. 우리 조합원들, 다른 단체들, 그리고 봉쇄된 공장에 홀로 남아 가장 고생한 황이라 동지, 그분들은 다 가려졌잖아요. 나 같은 사람들은 이름이라도 나고 훌륭하게 보이잖아요. 별로 안 훌륭하고 나도 할 짓은 다 하고 사는데도. 지금도 어디 가면 309일 크레인과 희망버스로 소개받는 것도 좀 부담스럽고요.”

―어떤 소개가 좋으세요?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 나의 삶을 규정할 수 있는 건 해고자의 삶이었으니까.”

몸에 새겨진 309일의 흔적은 깊었다. 크레인에서 10분을 이어서 자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길게 잠들지 못한다. 깰 때는 ‘어렴풋이’가 아니라 ‘확’ 깬다. 밤에는 불을 켜지 않고 겨울에는 양말을 신지 않았다. 그가 두명의 동지를 가슴에 묻은 뒤 크레인에 오를 때까지 8년 동안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왜 춥게 살아야 돼요? 또 왜 불은 안 켜고….

“크레인에 있을 때 까맸으니까(사쪽이 전기공급을 끊었다). 따뜻한 것에 익숙해 있으면 안 되니까 춥게 있어야 되고. 언제 또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

―뭘 준비하는 거예요?

“복직투쟁을 위해서죠. 또 한진이 부당하게 나오면 내가 다시 고공농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요. 남들은 지진 때 생존배낭을 싼다고 하잖아요. 저는 고공농성 짐을 늘 싸고 있는 상태인 거예요. 두꺼운 양말, 두꺼운 옷들을 싸놓아요. 늘 쫓기듯 긴장하고 극한을 대비하는 삶을 끝내는 게 저한테는 복직입니다.”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용접노동자 입사 4년째 되던 1984년의 모습. 안전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추락사고가 잦을 때였다. 김진숙 제공

 

사쪽·산업은행·채권관리단 합의해야 복직

“가장 무서운 형벌은 반복을 반복하는 것”(조용미 시 ‘흑백’). 해고 이후 희망을 가졌다 빼앗겼다를 반복하는 동안 그의 몸은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그는 2018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4차에 걸친 항암치료를 마쳤다.

―투병하시느라 복직투쟁이 더 늦어진 거죠? 이제 괜찮으신 건지.

“항암은 기간이 길었던 게 몸무게가 44㎏ 이상이어야 항암제를 맞을 수 있는데 제가 44㎏이 안 돼서 항암을 못 하고, 또 면역이 너무 떨어져서 항암제를 못 맞고. 그러니까 항암을 하려고 억지로 먹는 거야. 항암을 하면 다 토하고. 고기를 끊은 지 30년이 됐는데 고기 먹어야 머리가 빨리 난다고 하고. 암환자들이 우울증이 올 수밖에 없어요. 이러고 살아야 되나 하루에도 몇번씩 생각했어요. 그럴수록 복직이 더 절박해지더라고. 나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게 복직밖에 없었어요.”

이번 그의 마지막 복직투쟁은 ‘선언’ 전인 5월부터 이미 진행됐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서 ‘김진숙 조합원이 복직투쟁을 시작합니다, 조합원들의 협조를 바랍니다’라고 소식지를 내자마자 사쪽에서 노조로 연락이 왔다. 사쪽은 한진중공업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희망에 들떠 있었죠. 근데 몇주 만에 ‘노’(No)라고 통보가 왔어요. 회사 경영진, 산업은행, 채권관리단 이렇게 3자가 오케이를 해야 하는데 다 ‘노’라고 했대요. 이유도 설명을 안 해요. 왜 안 되냐고 해도 모른다고. 국책은행이니까 산은의 결정이라는 건 정부의 결정이라는 거죠.”

―문재인 정부에서도 복직이 어렵네요.

“그러게요. 왜 이렇게 정권마다 다 저를 싫어할까요. 경총은 왜 저를 싫어할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부산에서 활동하셨죠?

“문재인 대통령은 98년쯤부터 저랑 같이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을 했고요.”

―아, 같은 지도위원이셨군요. 소위 ‘이명박근혜’ 정부랑 문재인 정부의 노동 정책에 대해 현장에선 어떤 차이를 느끼세요?

“저는 크레인만 놓고 보면 이명박 정권 때는 희망버스들이 오고 트위터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지지를 많이 해주었는데 제가 만약 지금 크레인에 올라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쳐요. 살아서 못 내려올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민주노총 꼴통이 되는 거고. 김주익씨 때도 그걸 겪어봤으니까요.”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은 2003년 10월17일 회사의 부당해고에 항거해 85호 크레인에서 129일을 버텼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달 30일에 조합원 곽재규도 세상을 등졌다. 그해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발언했다.

“그 말은 참 아파요, 지금도. (침묵) 노동자들의 삶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대통령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말은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후로 노동자들의 고립은 점점 심해지고. 어쨌든 그 시절에 같이 투쟁했던 분들이 지금 국회의원이 되시고, 청와대 수석들이 되시고, 옆에서 같이 활동하셨던 분은 대통령이 되시고, 노동자들은 그냥 다 비정규직이 됐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부산에 계셨는데 인연이 있으세요?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 파업인 엘엔지(LNG) 선상 파업으로 김주익이 구속됐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였죠. 저의 공동 변호인에 들어가시기도 했고요. 해고자들이랑 노조 간부 몇 사람이랑 노 변호사님이랑 노동법 공부하는 모임도 했어요. 하루는 모임 하고 분식집에서 저녁 먹고 나오는데 노 변호사가 박창수를 보시고 ‘저 사람 다음에 위원장 시키라’고, ‘사람이 됐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집까지 찾아가서 위원장 해달라고 그랬는데 1991년에 그렇게 가서…. 그게 지금도 너무 미안해요.”

―두분 다 대통령 되고는 못 만난 거죠?

“그렇죠.”

―마음이 복잡할 것 같아요.

“처음에 노무현 대통령이 됐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가 컸지요. 기대가 없을 수가 없잖아요. 근데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 이후로 정리해고 비정규직들이 늘고, 노동자들의 삶이 점점 더 벼랑으로 몰리는 걸 보면서 더 절망하죠. 저분이 왜 그럴까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언제부턴가 대중이 민주노총 방식의 노동운동에 대해 반감을 갖는 분위기예요. 왜 그렇다고 보세요?

“언론의 왜곡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고, 민주노총이 잘못한 것도 있지요. 시류를 못 읽고 기존에 해왔던 방식들을 고집하고. 저도 민주노총이 답답할 때가 많아요. 특히 희망버스 이후에는 집회가 싫은 거야. 너무 똑같은 대회사, 투쟁사, 연대사, 문화공연, 행진 코스 똑같고. 이런 게 식상하죠.”

―1980년대 운동에서 거의 안 바뀌었어요.

“맨날 투쟁조끼 입고 집회하고. 애들이 있거나 비흡연자가 있거나 담배 막 피우고. 삶에 대해서 긴장하지 않는 것들이 답답해요. 회식하면 삼겹살 먹고. 기후위기를 생각하는데도 그게 삶에서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 부분들이 참 답답해요. 근데 민주노총이 비정규직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데, 사실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30% 이상이 비정규직이에요. 대형 공장 노조원들이 비정규직에 대해 배타적인 건 있지만, 비정규직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혹은 정규직화하기 위해서 싸우는 건 또 정규직 노조밖에는 없거든요.”

김진숙 지도위원이 2011년 6월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구내식당에서 따뜻한 밥 먹고 싶다”

김진숙은 1981년 7월1일 입사해 1986년 7월14일 해고됐다. 5년을 용접공으로 일했다. 우수사원으로 표창장을 받았고, 사장의 요트를 수리하는 기술직 5명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해도 일을 참 꼼꼼하게 잘했다”고 했다.

―김 지도는 현장에 가면 다시 용접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용접이 힘들어요. 아주 육체노동이에요. 탱크 안에 겨우 들어가서 용접해야 하고 불똥을 막 맞아야 되고 제 지금 건강 상태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도 있지만, 전 그냥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은 거예요. 그 시절에 저랑 같이 해고됐는데 어디 싸울 회사도 없어진 부산의 신발공장, 풍산금속 노동자들을 잊지 않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고요. 제 복직은 시대의 복직이에요.”

―복직해서 공장에 가면 뭐가 하고 싶으세요?

“제가 상상하는 현장과 실제 현장은 많이 다를 거예요. 그땐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었고. 얼마 전 5월에 회사와 교섭할 때도 기대에 부풀어서 현장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야, 화장실 깨끗하냐?’ 그랬더니 ‘아무래도 좀 뭐, 남자들끼리 있으니까 그렇게 깨끗하진 않습니더’ 이러더라고. 그래서 청소 좀 깨끗하게 해놓으라고 했죠.(웃음) 화장실도 가보고 싶고. 저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못 먹어봤거든요. 그렇게 투쟁을 열심히 해서 식당이 만들어졌는데…. 식당에서 따뜻한 국, 따뜻한 쌀밥도 먹어보고 싶고. 박창수가 일했던 배관공장도 가보고 주익씨 일했던 조립과도 가보고 재규 형이 일했던 데, 강서가 일했던 데도 가보고 싶어요.”

―공장 안에 못 들어간 지 오래됐죠?

“박창수 장례 때 들어가고 주익씨와 재규 형 합동장례식 때, 강서 장례 때만 들어가봤어요. 그냥 별것도 아닌데 들어가보고 싶은 거지.(눈물)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이북에 가고 싶었듯이.”

―그동안 너무 힘들었으니까 이젠 좀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이렇게 또 투쟁을, 요즘 말로 ‘김진숙이 김진숙 했다’인데, 무엇이 김 지도를 끝까지 싸우게 하는지 궁금해요.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을 것 같아요.”

―회사에서 주는 200만원 받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거는 또 마음이 괴롭잖아. 얼마나 죄책감이 들겠어요.”

―노동운동가로 사는 게 왜 좋으세요?

“제일 큰 게 떳떳함이죠. 어디에도 누구한테도 굴하지 않고 산다는 것.”

김진숙은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가 급훈이 되었던 나라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나는 용접공입니다’ 차마 말하지 못했다. “철들고 나서부터” 이 사회가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수치심을 떳떳함으로 바꾸기 위해 싸웠다. 몸, 시간, 사랑 온전히 바쳤다. “웃으며 끝까지 함께 투쟁”하다 보니 35년차 해고자가 되었고,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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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첫 질문, 그는 왜 정년을 반년 앞두고까지 복직투쟁을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시 물음이 되어 돌아왔다. 정년이 될 때까지 한명의 노동자를 복직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버둥거려도 한뼘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정문은 누가 열 수 있는 것인가. 동의하지 않아도 해고자의 밤은 온다. 2011년 5월28일(농성 143일차) 85호 크레인에서 “노을 지는 하늘 보며 까닭 없이 울던 일곱살 때”를 떠올리고 붉은 하늘 사진을 올리던 사람, 김진숙은 오늘 어떤 까닭 모를 열망과 허무의 저녁을 맞을까.

 

녹취 홍혜원 

▶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펴냈다. 2005년부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성폭력 피해 여성,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은유의 연결’은 4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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