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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수레의 무지에 대한 애정 세례는 새삼스럽지 않다. 아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돌보던 길냥이가 낳은 새끼들 4남매 중 혼자만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있던 아기고양이를 손수 데려온 4년 전부터 시작됐다. 흰색, 갈색, 검은색이 조화롭게 자리잡은 ‘삼색이’ 무지를 보며 연신 감탄한다. “무지는 무늬가 너무 예뻐!” 무지도 수레 곁을 충신처럼 지킨다. 수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슬며시 아이의 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수레가 공중에서 휘젓는 낚싯대를 따라 신나게 한판 놀다가, 숙제를 하는 수레 옆에서 잠이 들곤 한다. “무지는 나의 베스트프렌드”라고 으쓱하며 말하던 수레는, 열네 살 땐 커서 무지랑 결혼할 거라는 선언으로 날 놀래켰다. 그런 세속적 말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보다 너른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갔다. 졸음의 바닥에서 주워 올린 말. 선적이고 시적인 말. 그러고 보니 시도 있다. 문정희 시인의「응」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그때 너 시인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시인 같다는 건 시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둔 말이니까. 시인과 시인 같은 사람의 경계를 아이에게 주입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고양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아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 시인이다. 살면서 우리는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듯 시인지도 모르고 시도 짓는다. 잠결의 아이처럼. 

수레는 고2가 되니까 문학을 배워서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어느 밤엔 내 옆에서 자려고 눕더니 묻는다. 
“엄마,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 알아?”
“응. 알지. 우리 집에 시집도 있을 걸.” 
“근데 왜?” 
“문학시간에 배웠는데 그 시가 좋아……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수레는 제법 결연한 어투로 시구를 두 행 읊더니만 이내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 번 산다. 열일곱 무렵부터 나도 시가 괜히 좋았다. 시집 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노트에 정성스레 베껴 쓰곤 했다.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같은 단어가 만든 감정의 둘레에서, 나는 마치 꽃그늘 아래 앉은 것처럼 더없이 안전하다 느꼈다. 아이는 왜 그 시의 그 부분이 좋았을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나는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나도 한 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지만, 똑똑한 게 사는 데 좋은지 나쁜지 어느 순간부터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나이가 들고 오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수레에겐 고양이 무지가 책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대하는 법을 일러주는 지침서이자, 도도한 상대와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심리에세이, 한 번도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는 마술 같은 그림책. 매번 설렘으로 첫 장을 여는 책.

 

#무크지'언유주얼' #10매소설 #무지와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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