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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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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절대로 하지 마 ‘자유로운 영혼 뒤에는 울부짖는 처자식이 있다.’ 넥타이 맨 사람보다 기타 든 사람에게 쉬이 매료되던 내게 선배가 해줬던 충고다. 연애 상대자의 미덕이 결혼하면 악덕이 될 수도 있다는 그 생활 격언에 따라 기타 치는 직장인과 결혼했고, 아이를 둘 낳았다. 가족제도 울타리에 들어앉은 나는 애 낳고 사는 일상이 갑갑할 때마다 영화나 문학(같은 삶)으로 도피했다. 소설 류의 몰락 서사는 늘 매혹적이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는 인생이라니. 사진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사랑은 또 어떤가. 여자는 아이를 원하지만 남자는 출산에 반대한다. 스물세살 연상 남편이 ‘핏줄’을 거부하고 아내의 일을 독려하는 이국 문화는 낯설고 부러웠다. 여성이 책을 낼 수 없었던 19세기,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애 ..
북촌방향 - 등 뒤의 화살표 안 쓰고 안 만나고 살았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납작 엎드려 지냈다. 이 세상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고 나면, 사십대의 황지우가 그랬듯이 ‘하루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싶을 땐 그래야 한다. 마음에 쏙 드는 나의 개인기. 직감에 민감하다는 것.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홑겹 인생인지라 느낌 대로 사는 게 몸에 배인 편이다. 강의 하러, 세미나 하러, 회의 하러 일주일에 세 번 연구실만 댕겼다. 시내를 지날 때는 유혹에 흔들렸다. 시청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핸드폰을 꾹 쥐고는 유준상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충무로 방향. 얼굴 안 보고 일을 처리하려고 ‘용건만 간단히’ 메일을 보냈다가 께름칙해서 전화를 넣었다. 충무로에 들..
옥희의 영화 - "홍상수 영화에 약 탔나봐" 사랑은 교통사고인가에 관한 물음 '난 사랑은 교통사고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피할 수 있다는 거?’ ‘응’ ‘음... 그래.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설명해줘’ ‘주체는 자기 의지와 윤리적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거잖아. 먼저 결정돼 있는 게 아니고.’ ‘그래도 싫은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좋은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어떤 남자에 굉장히 빠졌었거든. 그 때 외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야.’ ‘왜? 섹스하고 싶어서?’ ‘응. 근데 뻔히 보였어.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어.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겠구나’ ‘복잡한 사람 사랑하면 지옥이지’ ‘엄청 참았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거 같아. 사랑하지 않은..
하하하 - 그리 대단한 사랑은 없다 나를 키운 8할은 오빠들이다. 지나고 보니 열아홉 이후에는 늑대소굴에서 살았다. 그들을 남자로 보았을 리 만무하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 성적인 것에 무지했다. 순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줄도 모른 채였다. 당시 내게 남자란 이성理性. 다른 성별이 아니라 합리적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말도 통하고 배우는 것도 많고 즐거웠다. 좋은 사람의 좋은 기운에 끌렸고 그들도 나를 국민여동생처럼 예뻐했다. 가장 따랐던 선배A. 나의 사수였다. ‘대학에 가도 이런 공부만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몇 개월 토요일에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녹두에서 나온 감색 책 ‘세철’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책을 읽고 묻고 답하고 정리했다. 영화 보면 과외선생님이랑 정분이 나기도 하던데 ..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식 인간이해의 '금자탑' 웃으면 지는 건데 극장에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평일 조조였다. 텅 빈 극장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벽을 치고 다시 나의 옆구리를 찌르니 웃음에 포박당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에 지나가는 장면은 홍상수영화답다. 주인공이 영화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지 않다. 생활여행자의 길 떠남의 풍경인데, 거기에 배치된 인물들 간의 얽힘과 오가는 대사가 재밌다. 딱히 김수현식의 능란한 촌철살인이라기보다 능청맞고 투박하고 격앙되고 오버스러운데 그것들이 시의적절하고 적나라하고 섬세하고 의미심장하다. 같은 이유로, 예전에는 그의 영화가 재밌지만 불편하고 불쾌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끄럽고 불편해서 재밌다. 홍상수 영화, 웃으면 지는 건데. 내가 변한 걸까, 홍상수가 변한 걸까. 주인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