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해금산

(3)
은유 읽다 - 남해금산 서울 강남역, 정오의 해를 받아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들이 산처럼 우뚝하다. 마천루의 도시라도 온 양 감탄사를 연발하던 딸아이는 급기야 스마트폰을 꺼내 찰칵찰칵. “엄마, 여기가 강남이야?” 내 대답을 듣기도 전, 아이는 가장 기세 좋은 건물을 가리키며 어디냐고 묻는다. 저 일대가 삼성타운이라고 했다. 아이가 흠칫한다. 우리 집은 수년 전부터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자기는 저런 ‘화려한 건물’에서 일하고 싶다며 나를 힐끗 본다. 입사도 어렵지만 갈 곳이 못 된다고 난 일축했다. 아이가 재차 묻는다. “내가 삼성 안 가면 백수로 산다고 해도 반대할 거야?” 그때서야 빌딩 아래 비닐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반올림’ 농성장. 몇 번 지지 방문을 갔을 ..
또 비가오면 / 이성복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아침에 눈 뜨면 내가 오늘은 또 왜 깨어났나 싶다. 밥만 축내기 위해서 사는 거 같고. 이대로 가면 좋겠는데...” 어머님 대사다. 지난해부터 부쩍 심약해지셨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연세가 칠십 중반이시다. 그 나이는 누구에게도 예정에 없던 나이일..
<원스> 시간을 견디는 사랑이 있을까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제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란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 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분'으로 바뀌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