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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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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시 리뷰 - 왜 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설거지를 하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매주 학인들의 글을 읽고 또 읽다보면 속상하다 웃기다가 곡진하다 잔잔하다 그럽니다. 이토록 온갖 감정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이야기가 쌓이면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 그런 부제를 달아봅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사람책입니다. 밀양 할매처럼 “소인으로 태어나서 이만하면 됐다” 말할 수 있는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고, 저에게 운수 좋게도 ‘미리보기’ 기회가 주어진 거 같습니다. 소울리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팔의 고통보다 모처럼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 이 부분이 반전이네요. 아버지가 무뚝뚝하셨는지, 다른 둘째들처럼 관심 받고 싶었는지, 그런 정보가 더 궁금합니다. 화상 사건이 단지 반팔을 입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글쓰기의 최전선 10기 -2차시 리뷰 가비 그간 겪은 이별의 사례를 나열했네요. 병렬식 구조라서 이야기가 개요식으로 짧게 전개되어 아쉽습니다. 이 중 가장 아팠던 이별 한 두 가지를 깊이 있게 써보는 게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떠나보냄’이란 표현이 낯설게하기 효과는 있는데 근거가 필요해요. 이별의 진부한 표현 대신 ‘떠나보냄’이란 단어를 썼으면 가비 고유의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말이 힘을 받습니다. 친척도 ‘관계자들’ 이란 사무적인 표현을 썼는데 필자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바로 뒤의 뜻과 맞지 않고 이물스럽습니다.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날의 기억은 선명한 묘사가 생생하고요. 할아버지의 죽음을 “더는 할아버지 가슴팍에 기대어 입으로 들어오던 각가지 맛난 것들이며, 귀로 들어와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주던 ‘유년 시절’(-> ..
마지막 후기- 글쓰기와 건강과 축제 우니님한테 여러 번 놀랐어요. 수업 중반이 넘어가도록 단 한번 도 과제를 안 해오면서도 어떤 죄의식도 없어서 신기했고, (대개는 빈말이라도 ‘과제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나 ‘왜 못했다’는 변명 등을 하거든요) 막판에는 마치 줄곧 과제를 해온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9, 10차시 글을 써내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점에 놀랐네요. 길들여지지 않았고 구김살 없는 성정이 부럽습니다. 글도 잘 썼어요. 일베; 친구들과 논쟁하는 부분 설득력 있고요. 선동적 어투가 글의 내용과 들어맞았어요. 감정과 이성의 분리적 사고에 대한 논파, 권력자의 입장에 자신을 대신하는 모순적 태도 등에 대한 대응논리는 평소 공부하고 논쟁하면서 가다듬어 진답니다. 논쟁에서 대해서 글을 써보는 건 사유의 균형을 잡는 데 있어서 참 좋은 방법이에..
1차시 리뷰_ 일상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다 천연나방 –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애당초 모호한 남의 기억을 갖고 일하는 직업적 경험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그런지 문장이 조심스러워요. ~같다. ~문제다. 중복이 많고 예컨대, 기실은, 어쩌면, 그러니까 등 부사 사용이 빈번합니다. 자신 없는 말투, 지나친 부사사용은 모두 메시지 수용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많을 경우 글을 다 읽고 나도 선명하게 남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책을 쓰신다하니, 더욱 주의하셔요. -‘무슨 일이 있었다(.)’와 ‘어떻게 기억 한다’는 전혀 별개의 말 같다.(->말이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인 사실에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주관적 진실’에 가깝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 사실이고 후자는 주관적..
글쓰기의 최전선9기- 김수영에게 배우는 자유와 사랑의 글쓰기 시인 김수영에게 배우는 ‘자유와 사랑의 글쓰기’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1960년대 4·19 혁명을 기점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시인입니다. 그에게 ‘시詩’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의 시대에 맞서 ‘존재의 온전함’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편이었습니다. 난파된 세상에서 침몰하지 않기 위해 시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인이란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이행하는 사람”이며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라고요. 김수영에게 시작이란 자유의 이행이자 동시에 사랑의 작업인 것입니다. 김수영은 좋은 글쓰기의 스승입니다. 그는 기존의 자연친화적 서정시와는 전연 다른 산문적이고 지적이며 도회풍의 시를 쓴 모더니스트입니다..
<그을린 예술>- 휴식과 재생산의 밤을 사유와 쓰기의 밤으로 ‘휴식과 재생산의 밤을 사유와 쓰기의 밤으로 지켜내야’ 하는데 그러기가 얼마나 힘이든지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간 직장에서 계속 컴퓨터로 뭔가를 쓰는 작업하다보니 집에 오면 컴퓨터 앞에 앉게 되질 않더라고요. 눈도 허리도 아프고. 몸을 가로로 눕히고만 싶은 거죠. ‘부디 직장인도 수업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라는 말에 동조하여 토요일 6시에 수업을 마련해놓고 저는 성찰의 계기를 안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척박한 노동현실에서 일상의 불길로 그을린 예술 수행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더’를 무한히 욕망하고 추구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자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도 글쓰기수업이란 새로운 영토에 자신의 몸을 들여놓았을 테고요. 그것이 점차 좌절되는 것을 집단적으로..
경철수고 -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 왜 이렇게 어려운 걸 교재로 택하느냐는 ‘원성’을 듣는 책들이 있습니다. 맑스, 벤야민, 니체의 책, 지난 기수에는 에드워드 사이드. 그리고 장르로는 ‘시집’ 등등. 그런데 쉬운 책이 꼭 좋은 책은 아니거든요. 나의 인지적 정서적 관습적 토대에 아무 이물감 없이 스미는 책은 혼자서 읽어도 무방하잖아요. 공적독서의 장에서는 좀 낯선 책이 좋습니다. 어려운 책이 곧 나쁜 책은 아니며, 불편한 책일 따름이죠. 화를 돋우는 의미에서요. ^^ 기존의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는 새로운 것과 접속할 때 인식의 지평이 흔들리고 그러면서 새로운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삶이 답답할 때는 뭔가 새로운 논리 근거, 인식의 틀이 필요한 거고요.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사물이든 ‘화나게 하는 존재’를 가끔은 의도적으로 ..
<사유이미지> 삶의 파괴적 성격 (2차시 과제 밀린 리뷰부터) (밤밤) 마음의 말, 감정 진술로 된 글의 한계 행여 수치심이 쏟아져 나올까, 오해될까 두려워 꽁꽁 닫아두었던 마음이 얼룩이로 인해 보듬고 나아지는 과정을 글로 썼습니다. 언제 왜 어떤 사건과 관계를 계기로 그런 마음 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서사가 생략되어서 아쉽습니다. 글이 겉돌면 독자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거든요. 글쓰기 첫 과제를 제출하면서 숨 고르기 과정이라 생각해요. 막연하지만 얼룩이가 밤밤님이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는 느낌은 강하게 다가오니 절반의 성공이랄까요. 고양이의 힘이 어떻게 밤밤님 삶에 작용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세요. 약간 생에 달관한 듯도 싶고 떨림을 간직한 듯도 싶은 매력적인 어조의 글, 듣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