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 눈보라

[올드걸의시집]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내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사람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황지우 시집  < 게눈 속의 연꽃 >, 문학과지성사

 

 

 

아침 출근 길, 눈이 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지나가면서 '눈보라'가 생각났다.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황지우 오빠께서 낭독하는 시를 듣자니 - 교장선생님 말씀 같긴 하지만 -

시의 다른 구절이 들어온다.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무등산으로 자기 유배를 간 시인이 바라보았을 눈송이들. 하염없는 슬픔과 회한 덩어리였을 그것들.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다시 걸어오라는 말을 듣다니. 역시 시인은 이 세상이 절망이라고 말하지만

절망에 파묻히지는 않는다. 절망을 말한다는 것은 절망과의 최소한의 거리가 확보되었다는 뜻이니까.

절망의 끝까지 가서 모든 길이 끊긴데서 만나는 자유가 있을 것이다. 눈보라 같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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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 황지우

[올드걸의시집]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면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마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그날 기분은 아침부터 흐림이었다. 이유는 그냥이다. 존재를 둘러싼 제반 조건이 그러하도록 총체적으로 응결된 상태, 그냥. 식탁에 쭈그리고 앉아서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줄 한줄 받아쓰기 하는 아이처럼 신경을 모은 채, 내가 부르고 내가 받아 적으며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지루함에서 나를 끄집어내듯 전화벨이 울렸다. 그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세미나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그 사이 아르바이트도 그만 두고 온전히 단편 하나를 써보려 한다고 했다. 조지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자처했던 것처럼 온갖 육체노동을 섭렵하는 그다. 그에게 노동르포 글쓰기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자문을 구했었다. 노동체험이 글로 번역되는 어려움이나 쾌감 같은 요소들. 그 물음이 자극이 되었고 덕분에 글을 써볼 마음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에게는 작업계획 공표였지만 나에게는 단기이별 통보였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사람이 들고 나는 일에는 아직도 감정관리가 서툴다. 알았다, 좋겠다, 잘해라 얼버무리고는 전화기를 얼른 닫았다. 입술을 앙 다물면서 존재의 중심을 잡았다. 그 흔들림은 단지 늘 친숙하던 친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는 공허감이 아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절박함이 바위처럼 눈앞에 드러났다. 어떤 욕망이 내면을 휘저었다. 정확히 대칭으로 그와 존재를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있는지 모를 만큼 부러움의 파도와 서러움의 파도가 번갈아 나를 덮쳐왔다. 그가 그렇게 했다. 혼자 한 달 간 모든 관계로부터 놓여나 오롯이 글만 쓸 수 있는 상황을, 그의 전화를 받기 전에는 나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음을, 꿈조차 되지 못했음을 인지했고, 동시에 나의 존재조건을 자각했다. 왜 내 생은 그런 솔루션 자체가 불가능했을까. 30일의 자유와 고독이 봉쇄된 삶을 내가 살고 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처럼 눈물이 삐죽 솟았다. 오밤중도 아니고 오전에 눈물이 나니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변을 밤으로 만들었다. 어둠으로 도피해야 했다. 욕망에 비틀거리는 내 꼴을 보기 싫었다. 병원침대에 누운 것처럼 온몸이 긴장되었다. 김승욱의 <야행>의 여자를,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가령, 그 여자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포로를 상상한다. 그는 철조망의 한 곳이 허술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것을 발견하자 그는 자기가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탈출 욕망이 철조망의 빈틈을 보면서 발생한다는 것. 나의 경우라면 유유히 담을 넘어가는 그의 긴 다리를 보면서 나의 담장의 드높음을 인식하고는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는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그런데 넘어보기도 전에 넘어지다 다친 것처럼 주저 앉아 울고 있다. 주체에 도사린 타자는 늘 이토록  낯설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나이기에. 다시 또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을 보니 그녀다. 망설이다가 받았다. 그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얄궂고 서럽고 삐지는 복합감정을 띄엄띄엄 조각내어 터놓았다. 거의 일러바치는 분위기였다. '나도 한달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글 쓰고 싶어...'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어찌하지 못하고 괜히 그를 탓했다. 내가 이러는 심정을 그는 모를 거라 했다. 남자는 여자를 모른다는 의미로 확장했다. 아는 게 더 이상하다.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이거늘 그가 무슨 수로 알까. 자본에 의탁하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일상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능력자이다. 어떤 목표에 눈 돌리지 않으면서 존재에 칩거하는 그는, 죄인이 아니다.

 

한바탕 소낙비처럼 지나간 욕망의 난동, 우울의 파동. 슬픔의 상스러움을 초래한 나는, 칠판 지우듯 감정을 지우고 또 살았다. 살면 살아진다. 살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내면의 풍파가 가라앉고 그도 돌아왔다. 늘 그랬듯이 흐린 미소만 지었다. 소설 잘 썼는지 묻고, 잘 안 써졌다고 답하고. 형식적인 말만 오갔다. 며칠 후 전화로 얘기했다. 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작업에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취직한 것도 아니고. 현재도 없고 앞날도 없는 자기가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투의 넋두리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백만장자로 보이는 그가 자기는 거지라고 말하는 형국이었다.

 

다 가진 삶의 기준이 결혼, 직장, 아이인가. 그 나름도 실속 있는 삶이지만 단 하나 삶의 모델을 좇아 60억 인구가 한 방향으로 뛰어야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또 직장 다니면서 가정 꾸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갑갑한 삶을 사는지, 그나마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리번거리지도 못하고 삶의 에너지를 다 써야한다는 팍팍한 현실을 상기시켰다. 일찍부터 타협하고 사는 노회한 젊음은 매력없으니, 진짜 소설을 쓰려거든 지금처럼 불안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도 알고 있을 원론적인 얘기를 건네고, 나도 알고 있는 원론적인 말들을 들었다. 수다는 공회전이 본질이다. 전화를 스르르 닫고는 남사스러워서 하지 못한 말은 문자로 띄웠다. 실은 그날 전화한 날, 나 눈물바람 했다고. 자기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삶이 누구에겐 부러워죽겠는 삶이기도 하다고. 쓸쓸한 고백, 아니 수줍은 자백. 황지우 말대로 삶을 한번 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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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위도 위에서 / 황지우

[올드걸의시집]

지금 신문사에 있거나

지금도 대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잘 들어라,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잘 먹음과 잘 삶이 다 혐의점이다

그렇다고 자학적으로 죄송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발 좀 그래라)

그 속죄를 위해

<악으로>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도

나는, 간신히, 한다

간신히하는 이 말도

지금 대학에 있거나

지금도 신문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못 한다 안 한다

그래도 폴란드 사태는 신문에 난다.

바르샤바, 그다니스크, 크라코프, 포즈난

난 그 위도를 모른다 우리가

그래도 한 줄에 같이 있다는 생각,

그 한줄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마루벽의 수은주가 자꾸

추운 지방으로 더 내려간다.

자꾸 그곳으로 가라고 나에게 지시하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뭔가 바스락거리는 것인데

나도 바스락거리고 싶은데

내 손이 내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한다, 시늉만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하느님, 정말 불쌍합니다)

 

-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정시에 출근하는 직장생활이 이렇게 에너지가 쓰이는 일인지 몰랐던 게 부끄럽다. 미안하기도 하다. 대상은 없지만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아침6시에 일어나서 밥차리고 애들 등교시키면서 나도 출근 준비해서 나간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꽃수레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조금 돌아서 버스정류장에 간다. 마침 쌀쌀한 바람이 부는 지라 둘이 손을 꼭 잡고 걷는데 10분이 채 안 되는 그 시간이 주머니난로처럼 따뜻함으로 꽉 찬다. 버스가 5분 안에 오면 돈이라도 주운 기분이 되고 13분만에 온 날은 하루치 기운이 다 빠진다. 출근시간 잘 지키려고 종종걸음으로 사무실 도착. 무선주전자에 물부터 끓인다. 커피를 하도 진하게 내려 마시니 주간님이 말한다. '오늘도 변함없이 사약 한 사발을 내려주시네요.'

 

그동안 1박2일 전남순천부터 구례, 남원을 돌며 판소리 여행취재를 다녀왔고, 지난 목금에는 안동고택에 다녀왔다. 틈틈이 인터뷰를 3건 했다. 일주일 안에 경상도로 전라도로 차에 타서 부릉부릉 댕겨왔더니 꼭 통돌이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느낌이다. 정신 어지럽다. 나는 생전가야 차에서 잠드는 법이 없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깨면 휴게소이곤 했다. 취재는 그렇게 했는데 원고는 한 편도 못 써서 지금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다음주부터 써야한다. 나야 워낙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는데 취재주기를 직접 조절할 수 없어서 당황스럽다. 내 방 책상이 아닌 사무실에서 원고를 쓴다는 것은 또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지난주에는 병원을 두 군데나 갔다. 애 낳을 때 빼고 병원에 거의 안가는 걸 고려하면 나한테는 상당히 위협적인 상황이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 집에 오면 무조건 잔다. 아이처럼 10시도 안 돼서 눕는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가 당기고 있노라면 꼭 기계같다. 다음날 쓰기 위해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처럼 나도 빨간불이 들어온 몸에 힘을 모은다. 초록불이 되기 위해 잔다. 지금 바람이나 목적은 하나다. 성공적인 존재변이. 일이 밀려오는 속도에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글쓰기수업을 병행하느라 힘든 것일 뿐 일 자체가 부담스러운 양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든다. 주간님은 이상적인 에디터의 상을 갖고 있고 내가 원더우먼처럼 그것들을 척척 해주길 바라는 거 같다. 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맞는 에디터의 상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 서로 다른 감각의 결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관건이다.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글을 쓰지 않고 싶었는데, 꼭 그러고 싶었는데 나는 지금 기업의 VIP매거진을 만들고 있다. 기업임원들과 전문직 남성들이 보는 책이다. 대체로 권위적이고 마초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에 내가 싫어하는 집단인데 딱 걸렸다. 예전같았으면 실망하고 따졌을 크고작은 가부장적 혐의점에 눈 감는다. 바스락바스락 거리지도 않고 납작 엎드려 일하는 내 꼴이 불쌍하기도 하다. 군소리 말고 편집일을 배워서 다른 좋은 책 만들어야지, 지금은 그렇게 궁색한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한 체계를 인식하면서도 결국 그것에 안착하는 자가 되어버릴까봐 겁난다. 어제 잠시 연구실에 들렀는데 그가 그랬다. 어떻게든 살아남으세요. 살아남는다는 말이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다. 예전에 택시타면 있었던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새삼 삶의 슬로건으로 와닿는 요즘이다.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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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극장옆소극장]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아멘>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적인 것이 신()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꺼버리곤 했다. 미장센은 지독히도 아름다운데 상상초월 날 것의 장면에 눈 맞추기 힘들었다. 영화가 고행이자 고문이므로, 나는 눈 돌렸다. 그런 내가 변한 건가. 제아무리 영화가 끔찍해도 삶의 냉혹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삶의 엄정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김기덕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대로, 창녀가 여대생이 되는 허구적 설정으로 스토리를 치장하지 않는 점이 훨씬 윤리적인 것 같다.

이것은 시를 읽으면서 느낀 변화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삶의 절망을 또렷이 직시한다. 관념적인 언어로 덧칠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삶에 가득한 모순과 역설을 끝까지 끙끙 앓으면서 가져가는 것. 그 노력. 그 사랑. 그 눈물겨움. 그것에 뜨겁게 위안 받는다. 언제부턴가 그런다.

다시 김기덕. <아멘>을 보고 나니 존경스럽다. 인생수업을 마치고 다른 층위로 등업한 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렇게 깊게 군더더기를 제거해버리고 삶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의 짐작이지만 칸느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을 것만 같다.) 나이 들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예술가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배신이 아닐까. '배신을 통한 성장' 아직 못 봤는데 <아리랑>에는 김기덕의 품을 떠나서 자본의 품으로 가버린 장훈감독에 대한 실명비판이 나온단다. 살기등등하다는 후문.

몇 년 전, 김기덕이 유명해졌을 때 본 인터뷰가 기억난다. 초년고생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파리로 떠났다. 거리의 화가로 돈 벌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미술계가 학력카르텔이 공고해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겠다싶어서 방향전환했단다. 시나리오를 썼다. 어떤 공모에서 입상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쓴 다음 작품이 <악어>다. 그 시나리오는 누구를 도저히 주기가 아까워 본인 스스로 감독까지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비주류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구축했고 세계 3대영화제 상을 받은 유일한 감독인데, 배신사건 이후 폐인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현재 김기덕의 모습은 봉두난발 흰머리 흩날리는 야인 혹은 도인의 아우라가 물씬했다.

어디 제자의 배신뿐이겠는가. 영화필모그라피와 함께 상처도 첩첩 쌓였을 것이다. 고통을 통한 앎의 증대가 일어났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진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가치와 다른 언어를 발명해서 나의 세계관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전전긍긍과 암중모색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인간적 성숙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황지우도 그랬다. 87년 승리 이후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에 좌절한 그는 무등산으로 숨어버린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초조한 삶을 견디며 시를 쓴다. 그렇게 나온 <게눈 속의 연꽃>을 지난 주 시세미나에서 읽었는데, 김기덕의 <아멘>에서 황지우의 선적인 것이 겹친다.

시집의 첫 시가 <>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로 끝난다. 닻이 덫이 되는 삶의 잔인함이 섬뜩하다. <눈보라>에서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이런 구절도 있다. 영화 <아멘>에서도 짐승 같은 바람소리가 줄곧 난다. 무엇보다 황지우의 시적 절정은 <산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
그러므로
,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황지우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니까 김기덕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만 같은 시구다. 삶이 배신당하는 장소에서 자기성찰이 싹트고 수작이 태어난다. 황지우가 그렇고 김기덕이 그렇다. '크나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크나큰 경멸로 사랑하라(니체) 했거늘, 예술가의 고통이 대중에게는 기쁨이 되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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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 황지우

[올드걸의시집]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쳐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파묻는다

나의 증거 인멸을 위해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

 

-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눈에 밟힌다. 그 아이. 내가 살면서 본 뉴스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되었다. 우연히도 요 며칠 나의 화두는 엄마였다. 아는 선배가 엄마를 주제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해서, 화가 났던 참이다. 사진을 보고 말했다. “저 중에는 비혼이거나 자식 없는 중년 여성도 있을 거 같은데...” 사람들은 나이든 여자를 다 엄마로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어른 남자들이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애잔하고 죄송스러운 엄마를 호명하는 게 싫다. 남자 작가의 책머리에 어머니에게 바친다를 볼 때도 기분이 별로다. 측은지심으로서의 엄마. 그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엄마에게 늘 그 자리에 있어달라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느껴진다. 또한 엄마가 그렇게 헌신적이기만 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엄마의 자식사랑이 지독한 광기로 변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식을 나 몰라라 방치하고 학대하는 엄마도 있다. 별별 엄마의 행태를 은폐하는 헌신하는 모성으로의 일반화. 그런 신파는 위험하다. 엄마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그러므로 엄마를 찬미하기 전에 어떤 엄마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해야한다고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그러다가 그 아이 기사를 접했다. 엄마를 살해하고 8개월간 방치한 고3 아이로 나온다. 억장이 무너졌다. 아이가 느꼈을 공포감, 외로움이 산사태처럼 덮쳐왔다. 8개월이면 아이 혼자 지내기는 길다. 밥은 어떻게 먹었을까, 옷은 혼자 빨아 입었을까, 밤이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다 통째로 8개월이 떠밀려왔다. 엄마를 살해하기 전날 12시간 동안 골프채로 맞았다고 하니 내 뼈가 다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7세부터 폭력을 일삼던 엄마란다. 홍두깨로 때리고 물건을 던져 머리에 피가 철철 나기도 했다고 아빠가 증언한다.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초316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공부했다는 대목에서 경악했다. 3이면 우리 딸아이 나이다. 이제 열 살. 너무 작다. 그 엄마한테 맞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아이가 자라 고3이 되었고 봉합해두었던 상처가 터져버렸다. 아이는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 칼날을 돌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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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 황지우 '살고싶다 별안간'

[올드걸의시집]

 


큰비 물러간 다음, 논으로 나가 본다

창평 담양 일대의 범람이여

논은 목숨이다

농부님은 이 숨 넘친 水平에서

자신의 노동을 뺀

생산비 이하의 풀포기들을 일으켜,

그래도 어쩌야 쓰것냐

살어라 살어라

하신다

멀리 제비들이 그에게 경례

한다

아픈 내 몸이 안 아프다

왜 그러지

물 위로 간신히 밀고 나온 연둣빛을 보니

살고 싶다

별안간

  

- 황지우 시선,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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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황지우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

[올드걸의시집]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시집 < 게 눈 속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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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나무 / 황지우 -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올드걸의시집]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황지우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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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소식 / 황지우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올드걸의시집]

 

 삶이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事故 
 그러니, 저지르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택시 주차장으로 가면 
 국민학교 교사처럼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핸드 마이크로,
 종말이 가까웠으니 우리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쳐대지 않던가
 사람들은 거지를 피해가듯
 구원을 피해가고
 그는 아마도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혼자서 절박해져가지고
 저렇게 왈왈대면
 저렇게,
 거지가 되지 


 - 황지우 시집 < 게 눈 속의 연꽃>



글을 쓰기 싫을 때는 더 책에 매달린다. 글 쓰기를 회피하는 가장 손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읽기의 쾌락'에 빠져들기다. 얼마나 좋은가.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릿속 여기저기 전구가 들어오고 이걸 예전부터 알았더라면 더 잘 살았을 것 같고 지금이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며 앞으로 글 쓸 때는 조금 더 유려한 언어로 수월하게 써지지 않겠나 묘한 흥분마저 감돌다가 정점을 찍으면 그냥 이대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당하고 싶어진다. 영락없다. '쓰기'를 저지르지 않는 동안 '읽기'에 당한다. 읽기의 나른한 향락의 꾀임은 정말이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처럼 나도 광화문 네거리 나가서 떠들고 싶다. '책 읽고 삶이 나았어요. 책을 믿고 구원받으세요."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는 책을 읽으며 배고픔을 잊고, 추위를 잊고 병을 잊었다고 하던데. 난 배고픔은 안 잊어진다. 책 읽다보면 커피가 그립고 커피 마시면 빵이 그립고 빵을 먹으면서 다시 책을 찾는다. 그렇게만 살면 좋겠다. 알람처럼 하루 세번 어김없이 '배고프다'며 밥 달라는 아이들로부터 해방된 일상. 책과 커피머신과 오디오만 있는 고요한 나만의 공간에 삼일만 갇혀있고 싶다. 아침이 밝으면 머리 맑을 때 니체의 책을 읽고, 오후에는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을 예쁜 공책에 다 베끼고, 깜깜한 저녁이 되면 아름다운 시를 골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낭랑하게 읽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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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 황지우

[올드걸의시집]

매주 월요일 점심때면 아버지가 오신다. 빈 반찬통이 들은 가방과 아이들 과자를 한보따리 들고 오신다. 그러면 나는 일주일치 밑반찬을 만들어서 빈통에 담아 드린다. 반찬이랄 것이 뭐 별거 있을까. 멸치나 북어를 볶은 마른반찬 한 가지, 삼색나물 중 두어가지, 오뎅이나 두부조림, 불고기나 오징어볶음 같은 단백질류 등등이다. 일요일에 준비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준비하는데, 그 시간이 한없이 우울하다. 왜 우울한가. 아버지가 반찬가게에서 사 드시면 더 다양하고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을 텐데. 아니면 일하는 아주머니를 일주일에 두번만 불러도 더 따뜻한 반찬을 드실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나도 부담을 덜 수 있을 텐데. 하는 얄팍한 생각들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서다. 매번 돌아오는 끼니의 영원회귀. 차이없는 반복의 압박감이 싫다. 아버지는 입맛도 엄청 까다로워서 엄마가 살아계실 때 매일 힘들어 했고 나에게 푸념을 평생 늘어놓았는데 반찬을 준비하다보면 엄마의 한숨이 자꾸 들리는 것 같다. 그러면 아빠가 밉다. 아빠의 이기적 유전자가 싫다.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아빠도 힘드시겠지만 아이들 둘 키우고 살림하고 밥벌이하는 아빠딸도 좀 힘들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기도 하다. 이번주는 아파서 못해드리겠어요. 이렇게 전화  한통 넣어버리고도 싶다. 내 튼튼한 위장과 팔다리를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머릿속의 반란일뿐. 엄마 돌아가시고 2년 반동안 단 한주도 거르지 않았다. 나도 징그럽고 아빠도 징그럽다. 하지만 아빠에게 필요한 건 '반찬'이 아니라 딸과의 '왕래'일 것이다. 나도 그래야 도리라고 생각한다. 초기에는 아빠에게 갖다드렸지만, 아빠가 가지러 오시는게 달라졌고..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부러 점심 때 오시라고해서 점심밥을 차려드린다. 한끼라도 따뜻한 진지 드시게 하리라는 애초의 기획의도는 간데없고 의지와 행동이 따로 논다. 어제도 아빠가 11시 30분에 오셨다. 지난주에 아빠는 친구들과 2박3일로 단풍놀이를 다녀오셨다. 재밌으셨는지 묻고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점심만 차려드리고 나는 부엌에서 반찬을 마저 만들었다. 아버지가 진지를 드실 때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눠드리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질 않는다. 보면 밉고 안 보면 측은하다. 마늘을 다지면서 곁눈질로 흘금흘금 혼자서 점심을 드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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