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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은유칼럼]

“딸이 있어 참 다행이야(57쪽).” 

엄마의 장례식장에 온 이모는 나를 구석에 있는 벤치로 데려가서 앉혀놓고 손을 부여잡고 연신 말했다. 딸이 있어서,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너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아버지랑 오빠 남겨두고 가면서 엄마가 어떻게 눈을 감았겠니, 네가 엄마 대신 잘해라. 너만 믿는다. 그날 문상객들은 급작스러운 망자의 죽음에 경황이 없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부고를 들었을 뿐인 나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내가 딸이란 사실을 떠안아야 했다. 

한 해 두 해 지나자 의구심이 일었다. 왜 나지? 누가 시켰지? “혀뿌리까지 치밀었던 말들(278쪽)”이 어느 날 넘쳤다. 힘들어서 못하겠으니 반찬가게에서 사먹거나 가사도우미를 구하라고 남자들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바로 가사도우미가 왔고 난 반찬 셔틀을 중단했다. 그건 수갑이 풀리듯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무얼 하지 않아도 세상엔 별일이 안 일어난다는 것이다. 

폭탄 돌리기처럼 허둥지둥 여자 역할을 내게 떠넘긴 사촌이모는 “자신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 규범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보통 엄마였다. “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우리 엄마도 자주 말했다. 속 하나 안 썩이고 없는 것처럼 자란 속 깊은 딸, 엄마의 자랑, 엄마의 보험, 엄마의 친구. 이 모든 명예 훈장은 실은 집안의 일손이자 엄마의 보조 노동력이자 감정 해우소로 딸을 승인하는 몹쓸 언어다. 그 딸들은 며느리가 되어서도 “집안의 사노비(55쪽)”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노비라니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경상도 남자와 결혼한 선배의 얘길 듣기 전이라면 서울 여자인 나는 그리 생각했을 거다. 새 며느리의 첫 명절, 생면부지의 친척들이 줄줄이 들이닥쳤고 부엌에 갇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유건 쓰고 도포 입은 남자는 없었으나 남녀 상차림을 따로 했다고. 거기까진 각오를 했는데 현실은 늘 예상을 초과하는 법. 시어머니가 말하길,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이 남긴 밥을 먹자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왜 누군지도 모르는 늙은 남자들이 남긴 더러운 밥을 먹어야 해?”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 

그날 우린 깔깔대다가 같이 울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구토가 치미는 강도의 기억.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은 왜 언제나 새롭고도 새삼스러운가. 한 사람이 물꼬만 터주면 “삭히거나 잊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자신의 이야기 (278쪽)”를 너도나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51쪽)”으로 길러졌으나 이제 그런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변신한 한 존재가 있다. 그저 말하고 있음. 단지 말하고 싶음. 나는 말해야겠으므로 쓰인 소설 한 권, 여성들의 삶을 정 가운데로 놓은 이야기가 있어 참 다행이다.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