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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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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 그 삶 / 채호기 '격렬하고 불투명한 삶' 어느 날 내 몸은 잘게 부서져 눈이 되어 흩날리니 이리저리 몰리며 몸부림치는 나의 영혼 눈보라로 흩어지네. 살점 몇 개는 사람들 신발 밑에 깔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딴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질펀히 녹아 하수구로 흘러 버려지는가. 살점 몇 개는 벌거벗은 너의 눈 속으로 흘러들어 두근거리는 피가 되어 너의 몸속을 떠돌며 네 예민한 감각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니 너의 삶도 상심의 회오리에 실려 찬 계곡을 눈보라처럼 부유하네. 그토록 단정하던 너의 몸, 뚜렷한 색깔과 형태의 너의 몸이 흐트러지며 단단히 잡고 있던 마지막 흰 숨결까지 게워내며 눈보라 속에 천천히 지워져가고 너의 몸과 너의 삶이 선명한 푸른색으로 남아 있던 그 자리 내 몸과 네 삶이 뿌옇게 섞이고 있는 거기 그 자리 서리 낀..
사랑은 / 채호기 '사랑은 그렇게 왔다'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