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론'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1.09] 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다중 (2)
  2. [2010.10.21] 정치론- 자연권 (6)
  3. [2010.10.12] 정치론: 서론 - 인간본성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기획 (8)

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다중

[스피노자맑스]




사회계약론

17세기 계약론적인 테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결사와 시민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는 기능보다는, 정치적인 사회의 구성과 시민사회의 권력이 국가로 양도되는 것을 합법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권력의 양도가 실효성을 거둘 수 있도록 합법화 되어, 국가라는 법적인 개념의 토대를 마련한 명백히 사회학적인 허구일 뿐이다. 사회계약론은 초월적 성격을 갖고 있으나 형식적으로 제한됐다. 국가라는 관념을 구성할 수 있는 제반 의미들 가운데 군주제적 개념, 즉 명목적 권력의 단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초월성에 관한 개념이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사회계약론은 근대적 성격을 띠는 절대주의 국가의 다양한 통치 형태들을 합법화하려는 내적 경향을 실질적으로 갖는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마키아벨리, 알투시우스의 입장. 정치란 형식적으로는 권력의 양도에 관한 생각을 배제하지 않은 채 그것을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제반 실천들에 대한 구성적 힘들의 다수성과 고유성에 대한 물질적 규정들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정치학을 구성하고 있던 지배적인 입장들, 가치상대주의와는 상관없다. 정치현실주의는 결코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단호한 수용이다.

사회계약론이 일반적으로 절대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이라면, 이 이론을 거부하거나 혹은 권력의 양도라는 생각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공화주의적인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국가적 소외를 대변하고 정당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실천에 맞서는 논쟁적인 전통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어떤 계약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과 정치는 계약주의의 변증법적이고 부정적인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법과 정치의 절대성은 행동으로서의 진리를 입증해준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절대성’
어떻게 자유를 절대성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까? 계약론자들은 자연적인 상태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법적으로 상대화되고 다시 정의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자유들의 절대성이란 혼돈이며 전쟁상태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구성조직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 절대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1. 형이상학 일반의 관점) 스피노자의 절대개념은 힘의 일반적 지평으로서, 그것의 발전 및 현재성이다. 절대는 구성이다. 즉 자신을 구성하는 힘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더 복잡해지는 열려 있는 현실이다. “서로 합치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질수록, 그들 모두는 더욱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된다.” 절대는 고유한 본질로서의 힘. 힘의 실현 결과로서 실존이 된다. 절대=힘=자유. 힘의 확장=자유의 강도. 절대적 통치는 권력의 단일성을 의미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권력의 단일성이 주체들로부터 나오는 힘들의 투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힘들의 총체성이야말로 언제나 열려 있는 내재적인 삶이며, 유기적 전체의 역동적인 분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개념의 관점 -정치이론에서 절대적 통치)
(1)권력의 합법성에서 절대적 통치; 명목적 권력과 그 실제적 행사의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양자가 결합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통치 형태다. 존재의 힘은 모든 통일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2)권력의 형태에 관한 결의론의 전통 속에서 절대적 통치; 민주주의의 타락할 가능성. 그것은 어떤 이타성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동일한 유기체의 삶이거나 혹은 죽음인 것이다. 국가의 절대성은 발전과 타락과 재정립의 역동성을 동시적으로 갖는 모습으로 주어진다.
(3) 국가행정 내부의 관점에서 절대적 통치; 스피노자적 민주주의는 입헌 민주주의로 정의될 수 없다. 즉 권력의 분립과 균형 및 상호변증법에 기반 하는 통치 형태가 결코 아니다. 통제와 균형을 위한 몇몇 직제들 고려하지만 이것은 권력의 분립, 변증법적인 입헌상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직제들은 제헌적 힘의 표현적 형상들, 체제의 단일제적 긴장에 관한 단상들이나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법적 기능은 자유와 단일성의 가장 높은 잠재력을 발현하는 계기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절대적인 권위는 만일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대중 전체에 의해서 점유되는 바의 것이다.”(TP,8:3)

참고* 헤겔의 절대적 통치 스피노자에게 소외의 거부는 절대적인 반면, 헤겔에게는 주체들과 욕구들의 특이성에 대한 어떤 인정도 모두 변증법적 운동의 모범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절대의 형이상학 속으로 흡수. ‘절대’는 결과로서 향유물로서 주어진다. 따라서 헤겔의 절대적 통치는 특이성들을 초월해 있으며, 이로부터 나오는 부정적 규정들을 거부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 통치는 대중의 무지와 나폭함 속에서 해체될 것이다. 이런 절대적 통치는 절대적 평정. 현존자의 절대적 동일성. 모든 특이한 힘들을 초월하는 절대적 운동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은 무한하며 나누어질 수 없는 총체성이다.

다중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다중’의 주체들을 통과하면서 절대성이 된다. 밑으로부터, 자연적 조건의 동일성으로부터 출발해 모든 사회적 힘들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주의는 권력의 양도가 없고, 어떤 소외도 없다. 모든 사회적 활력을 만인의 자유를 조직화하는 일반적인 노력 속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유와 절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다중이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재고찰될 필요가 있다.

“다중은 파악되기 쉽지 않지만, 법적인 주체, 사회적인 것의 필연적 전가, 정치적 구성과 단일성을 위한 가정이다.(TP, 3:7)" 다중은 특이성들로 구성되는 파악될 수 없는 물리적 다수적 본성과 헌법과 법을 제정하는 법적 주체적 본성 사이에서 형성되는 역설이다. 절대와 다중 사이의 관계, 힘의 두 가지 변환 사이의 관계는 서로 포섭되지 않는다. 전자가 정치적인 것의 단일성을 향해 응축해가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주체들의 다수성을 향해 확장해가고 있다.

다수성 (1)물리적 관점: 물리적 엮임과 조합, 결합과 분리, 불안정한 운동과 형체화의 세계 (2)동물적 관점: 중은 정념들과 상황들의 지속적이고 모순적인 얽힘이고 더 나아가 새로운 위치이동을 통해서 그 자체로 제도들을 구성하는 이성과 의지의 축적이다. (3)이성의 관점: 민주주의 심급의 절대성에 대한 제안. 스피노자에게 모두의 의지는 만일 그런 것이 주어지도라도 일반의지가 될 수 없다. 다중은 군중이 아니며 평민대중도 아니다. 다중은 보편적 관용과 자유의 토대이다.

다중의 개념과 관련된 결론들은 그것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포리아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이런 아포리아 형태는 지극히 생산적이며 바로 절대성과 자유 사이의 이런 불균형이야말로 민주주의적 정체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한다.

“다중은 집단적 힘의 존재론적 기획으로서 주체들의 상호 엮임이다.”

도의심 “도의심은 우리가 이성의 인도 아래 생활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이다. 도의심은 힘이 이성에 합당한 욕망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긍정적인 정념의 계열에 속하며, 욕망 자체를 덕으로 변환시킨다. 도의심은 다중의 영혼이다. 도의심은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방식으로 다중에게 열려 있는 특이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우리는 특이한 것들을 이해할수록 신을 더욱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E5. 정리24) 

* <전복적스피노자> 3장-후기 스피노자의 민주주의개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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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자연권

[스피노자맑스]

<홉스와 스피노자- ‘자연’을 보는 차이>

스피노자에게 끌리는 점. 위계가 없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벗어났다. (홉스를 잘 모르는 관계로 고병권의 글을 참조했다. 스피노자와 홉스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점이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설명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이 도달해야할 본연의 모습이라면 홉스는 자연을 극복해야할 나약한 상태로 본다. 홉스는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처럼 취급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가정을 내놓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들은 비슷한 본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개인을 환원불가능한 단위로 설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개체는 항상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이뤄진 조성체다. 고정된 원자는 없다. 스피노자에게는 항상 이것이나 저것이 문제되지 일반적인 어떤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양도의 문제.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로 자연권의 양도를 제시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영구적 전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제3자인 국가에게 양도하고 국가의 가공할 위력 아래서 계약을 맺고 그 이행을 보장받는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므로 양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들이 연합하여 사회체나 정치체를 구성할 때 권리의 변화가 나타난다. 개인은 개인적 변용이 아닌 집합적 변용을 수행한다. 양도가 있다면 제3자에 대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부분으로 참여하는 전체에 대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부를 만하다. 당대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기독교는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는데 그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감히’ 동일선상에 놓았으니 말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조작하지 않는 것’ - 자기 본성을 다 펼치고 사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악도 없다. 항상 ‘외부’(악마)의 유혹에 따른 죄와 타락이라는 기독교적 이해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외부의 유혹,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지 않은 개인의 무능이라는 스피노자의 지적질에 동감한다.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아무것이나 임의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도박중독자가 도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속이다. 그에겐 도박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이처럼 정념에 종속된 인간은 무능력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이성이 아니라 욕망에 끌린다.”  

우리의 목표는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전환이어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식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육식욕을 채식욕으로 바꾸듯이 말이다. 암 환자가 자기 몸 상태를 ‘인식’하고 술과 담배 끊는 것처럼 정신 상태의 건강을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무지하고 정신이 허약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법에 대해서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몸이 약한 사람이 몸의 건강에 의무를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까. 인식의 확장이 자유의 증대다. 인간은 이성적일수록 자유롭다. “이성적인 삶을 복종이라고 말할 수 없고...스스로를 거슬러서 명하는 정신의 자유를...노예상태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일까? 아니다. 금욕, 고행을 희생을 주장하는 사상들을 비난한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 굴욕스러워하는 지성, 자기 자신을 마비시키는 행동과 같은 것들은 거짓이며 오류이고 부조일 뿐이다.  

정리하자. 도박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도박으로 인한 힘의 약화가 악이다. 더 많이 종속될수록 힘은 약화된다. 고로, 절제도 나름이다. 어떤 절제인가. 힘의 증대를 가져오나, 강화를 가져오나. 자기파괴와 자기배려의 차이이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행위 속에 내재한다. 행한 만큼이 인식의 정도다. 지행합일. 앎과 삶의 일치. 이성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의 힘을 행할 수도 있는데 안 한 게 아니다. “우리 애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 안 나오”는 건 스피노자 사전에 없다. 공부의 필요성을 알지만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거다.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해진 만큼이 인식의 정도라는 것.  

<스피노자의 코뮨주의>

“서로 도움 없이 인간은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하여 그들이 세력을 합친다면, 그들은 연합하여 더욱더 많은 세력을 갖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의존과 독립의 조화 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고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기적인 것은 자기파괴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고 독립적인 개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들에게 행한 악은 자신에게 행한 것이다.”  

자연법을 통해 ‘도덕적 형이상학’을 구축하지 않으려는 스피노자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도덕법칙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정서의 증감이라는 물리법칙으로 사유한다. 다수가 배부르고 기쁨의 정서가 증가하면 그게 정의이고 좋은 정치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의는 관념이 아니다 물질적이다.

알수록 사랑스러운 스피노자 오빠~  (나이든 남자를 좋아하는 나의 연상취향의 극한이 아닐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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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서론 - 인간본성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기획

[스피노자맑스]

왜 읽는가.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내게 왔다. 아니 내가 찾아갔다. <에티카>를 읽고 나니 스피노자에게 욕심이 생겼다. ‘이 오빠, 뭐 있다’는 촉이 왔다. 체내 당분이 부족할 때 케이크만 봐도 군침이 돌듯이 그는 내 사유에 필요한 영양소를 담뿍 함유하고 있는 철학자였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나만 아니라 자식, 친구 그리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고귀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책장을 넘길수록 방법이 아주 없지 않다는 희망이 보인다. 다 같이 잘사는 법이란 결국 정치문제로 귀착된다. 현실의 정당정치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정치. 삶을 다스리는 측면에서 볼 때 <정치론>은 맞춤한 책이다.


왜 스피노자인가. 스피노자는 16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서구는 오랫동안 지켜오던 것들이 흔들리며 새로운 방향을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대이다. 격동의 시대를 통과하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의 현실에 연결시켜 보았다. 체제에 안주하지 않았고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계획했다. 그의 책은 이단으로 몰려서 출판조차 불가능했다. 그만큼 불온했다. 그렇다고 스피노자를 17-18세기에 가두고 시대적 맥락에서만 본다면 텍스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없다. 2010년 신자유주의의 독소가 뿌리처럼 넓게 퍼진 대한민국에서 ‘반시대적 사상가’의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쓰임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읽는 자의 몫이다.

왜 윤리학=정치학인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다. 자기 삶의 좋음과 나쁨을 분간하는 법이 윤리학이라면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힘의 증대를 도모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정치학이다. 신즉자연을 주창한 스피노자의 자연학=윤리학=정치학 등식이 성립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유리하다며 본성이 같은 개체가 결합했을 때 두 배의 힘이 생긴다고 말해왔다. 스피노자에게는 개체가 이미 하나의 복합체다. 우리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개체도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오장육부와 팔다리 등등의 복합체다. 정치체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에게 국가라는 공동체 형성은 코나투스(존재확장노력)라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연유한다.   자연에서 개체를 다루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룬다. 국가는 더 큰 개체화를 이루며 모든 사람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다. 이는 고립된 인간으로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서의 국가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개인도 국가도 모두 개체지만 그 능력과 본성은 완전히 다르다.


왜 인간본성에서 시작하는가. 스피노자가 이단인 이유는 모든 철학자가 인간의 고매함을 들먹이고 도덕적 통치를 말할 때 스피노자는 인간의 밑바닥을 들추고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학>첫 문장을 보라.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정념? 악덕 아니다. 본성 맞다.  철학자가 꿈꾸듯이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극히 정념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철학자보다 정치가를 높이 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이유에서보다 두려움에 따라 행동함”을 알고 인간의 악덕 방지를 연구하는 정치가가 철학자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정념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본 스토아학파를 비난한다. 

“나는 인간의 행동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신중을 더 했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인간 본성’에서 출발한다.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이상이 아닌, 경험과 현실을 참고해서 정치학을 구상한다. "
사랑, 증오, 질투, 야망 등등의 정념을 인간 본성에 있는 악한 빛이 아니라 본성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한다. 더위, 추위, 폭풍, 천둥처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현상들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연만물은 긍정이고 필연이다. 상어가 정어리를 잡아먹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다. 해충/익충을 가르는 것은 인간의 목적론적 시각이다.) 이러한 정념들, 자연의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곧 그에겐 '이성'이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은..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의 신체, 사회체에 집중시키는 확실한 수단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왜 힘이 권리인가. "국가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고, 국가의 신체와 정신은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행복이 다른 누군가의 선한 믿음에 의지하여" 성사된다고 보지 않는다. 덕성을 갖춘 지도자의 출현과 인도로 세상은 좋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에 반대한다. 그렇기에 "국가의 영원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불충실하거나 비열한 행동에 이끌리지 않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고 말한다. 여기서 '법'은 처벌과 심판체계로 이루어진 실정법이 아니라 만물조응의 원리 즉, 운동과 정지, 조성과 해체가 이루어지는 물리적 법칙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국가를 도덕이나 정의같은 형이상학으로 설명하지않고 힘의 증가와 축소를 가져오는 배치의 구성, 즉 물리학으로 분석한다.

힘과 권리의 관계. 스피노자 <정치학>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상당부분 기댄다. “얼마만큼 힘이냐에 따라 오직 그만큼의 권리를!”  군주론의 이 표어는 스피노자 철학의 원리를 잘 설명한다. 개체는 능력만큼의 권리가 주어진다. 하늘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는 도덕, 천부인권 그런 것은 없다. 힘만큼 확대된 권리가 있을 뿐이다. 정치체가 하나의 신체라면 자신이 표현하는 능력만큼 권리를 가지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을 따른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정치적 공동체, 즉 정치적 개체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과 능력의 확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기술이다.

* 매주 월요일 7시 수유너머R  <스니카즈> 세미나 합니다. 스피노자, 니체, 카프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하룻밤에 읽는 철학사> 같은 지루한 철학공부도 하룻밤에 끝장내는 공부도 아닙니다. 튜터 박정수와 좋은 동료들과 함께 강도높게 공부합니다. 쉽다고는 말못하지만 고통이 쾌락이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 좋은 사람과 좋은 가을 보내실 분 언제든 환영합니다. 스피노자 <정치론>으로 지난주에 시작했고 보조교재로 네그리의 <전복적스피노자>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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