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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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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시집 , 문학과지성사 시 ..
엄마생각/ 기형도 '내 유년의 윗목'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집 문학과지성사 학교가 파하는 1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새겨진 이름 꽃수레. 집 전화다. 며칠 전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엄마가 없으면 너무 허전하다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제목으로 일기를 써서 나를 놀래킨 딸내미. 이번엔 또 어떻게 마음을 달래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받는다. 짐짓 밝은 척 오버한다. “어, 우리 딸, 집에 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