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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11] 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과제 리뷰 (6)

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과제 리뷰

[글쓰기의 최전선]

지난 시간에 톨스토이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얘기가 오갔죠. 삶에서 우러난 글이냐, 삶을 배반한 글이냐. 오랜 논쟁거리이기도 한데, 저는 둘 다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가시나무 론에 근거해서요. 인간의 내면은 바다처럼 넓고 여러 결이 있으니까 어떤 속성은 일상에서 표출되고 어떤 속성은 비활성화 되어 있다가 작품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문득 니체의 주장이 생각나서 찾아봤어요.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였다면 아킬레우스를 창조해내지 않았을 것이며, 괴테가 파우스트였다면 파우스트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 <도덕의 계보>, 3논문, 4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아마도 차라투스트라처럼 살지 못해서 차라투스트라를 창조해낸 것이겠지요. 원하는 대로 다 살아버리면, 즉 응축된 에너지를 이미 발산해버리면 쓸 것이 없어요. 동시에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분신이기도 하죠. 자기의 가치, 지식, 정서, 감성을 양분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출산해냈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작가만이 아니라 한 사람을 단일한 속성으로 환원시켜서 앎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려는 권력의지가 있는 지도 모릅니다. 자식, 남편, 엄마, 친구 등 누구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규정해야 관계 맺고 상대하기 쉽고 편하니요. 언제나 예측 불가능성은 공포로 다가오니까요. 글쓰기 수업이 자기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시간, 그리하여 총체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습니다.

 

 

이슈트

서울, 거대한 고독에 대한 글. 시청 덕수궁 앞을 무대로 주로 그렸어요. 이슈트 특유의 장점은 현상과 생각과 정념을 파고드는 집요함이에요. ‘근성있다고 할까. 글이 꼭 늪처럼 빨아들이는 힘이 있어요. 그러니 소재와 주제 의식을 잘 골라야겠지요. 이번 글은 쌍용차노동자 분향소라는 정보를 끝내 밝히지 않고 에둘러 표현했는데, 그래서 글이 약간 모호해요.

 

저는 알아듣고 이해하고 흐름을 따라가지만, 모든 글은 익명의 대중을 대상으로 써야 해요. 모든 사람이 대한문 앞에 쌍차 분향소 있다는 걸 알지 못하니까 그 정보를 서두에 적절한 시점에 제공해야죠. 이 글을 읽으면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대한문 앞에 쌍차 분향소가 숨은그림처럼 숨어 있다는 것, 역사는 형편없는 기억력을 가졌다는 걸 알면 더 의미가 있겠지요.

 

-오랜만에 가지는 전시 나들이다. -> 오랜만에 가는 전시 나들이다. 오랜만에 전시 나들이를 갔다.

- 던킨도너츠의 유리창에 막아준 덕에 -> 던킨도너츠 매장의 통유리가 막아준 덕에

-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보다(이야기보다) 더 작은 아무도 들어주는 않는 이야기들이 무덤 주변을 떠다니고 있다. ->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보다 더 작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무덤 주변을 떠다니고 있다. (이렇게 고치면 어떨지, 의견^^)

 

 

봄봄

<거대한 고독> 독후감 성격의 글이네요. 매끈하게 잘 읽혀요. 첫 서두 인용문구 좋아서 베끼려고요. 아쉬움은 책에 대한 소개에 그친 감이 있어요. 중간에 우리가 어디에 있을 때 자신이 용납되고 있음을 느끼게 될까를 나의 이야기로 풀어주세요. 자신이 용납됨을 느낀다는 게 추상적인 정식이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떤 경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서 풀어주세요.

그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들이 나의 마음을 대신해서 인가, 내가 그들의 마음과 멀리 있어서 인가, 어느 쪽에도 손을 번쩍 들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나는 선악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을 뿐이다.’ 이 문장이 핵심인데 근거가 모호해요. 그들이 나의 깊은 우울, 고독 등을 대신 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내가 그들의 마음과 멀리 있다는 게, 너무 다른 삶이라 그렇다는 건가요. 선악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을 뿐이다. 이 문장도 더 풀어주세요. 무엇에 대한 어떤 세속적인 선악 판단인지가 보충된다면, 좋은 감상문입니다.

 

 

ty

초기에 문장이 길어서 초래하던 혼란이 사라지고 문장이 가지런해지자 태영님의 글이 빛을 발하네요. 특히 이번 글은 한 사람에 관한 추억을 조각조각 엮어서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냈어요. 아주 가까운 친구도 아니고 직장 동료인 한 사람을 이렇게 불러낼 수 있는 태영님의 시선이 뭉클하고 아름다워요.

 

내가 그녀라면, 누군가 나에 대해 이렇게 끄적대고(-> 끼적대고) 있다면 불같이 노여워할 것이다. (왜 그런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망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의 윤리적인 측면을 사유해주세요.)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다시금 이기적이게도 내 나름의 정리를 위해서이다. (내 나름의 정리가,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의 정리인지, 죽음에 대한 정리인지, 그것들을 아우르는 것인지) 또한 내가 아는 그녀는 이런 나를 이해해 줄 거란 막연한 안도감이기도 하다.(내가 아는 그녀는,을 풀어주세요. 이를 테면, 평소 너른 속내를 가졌던 그녀는 혹은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던 그녀는)

 

- 나는 전해들은 그녀의 부재를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그녀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고운 피부의 포동포동한 그녀가 어디 있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 이 문장 참 좋습니다. 어디 있는 걸까, 궁금하고 어디에 있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한 발 더 들어가서 글이 깊어져요. 죽음은 긴 사라짐같아요.

 

- 그저 나는 그녀가 아까운 것이다. 한 번도 화려하게 펴 본적 없는 그녀의 젊음이 안타까웠고, 완성하지 못했을 사랑이 아쉬웠고, 반짝이다 이내 꺼져버린 그녀만의 이루지 못한 꿈이 서글펐기 때문이다.

-> 안타까웠고, 아쉬웠고, 서글펐다로 어미에 변화를 주어 운율을 살린 점 좋습니다.

 

 

보보끄

보보끄님만이 쓸 수 있는 톡톡 튀는 경쾌하고 깊어 재미난 글입니다. 몇 군데 문장 손만 보면 좋겠어요.

 

- 30대 초반 우연히 여성단체에서 진행하는 자기성장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 30대 초반에 한 여성단체에서 진행하는 자기성장프로그램에 우연히 참가했다. (수동을 능동으로)

- 그 프로그램 중 하나가 유서와 자기 묘비를 쓰는 것이었다.

-> 그 프로그램 중 하나로 유서와 묘비를 썼다. (‘이 많네요. 가급적 자제해주시고요)

내가 지은 묘비()박옥기 소박하게 살다가 조용히 잠들다로 기억이 난다.

 

- 내가 30대 초반 아이가 10대 초반일 때는 주로 구김살 없이 기죽지 마라, 어른들 말씀 잘 들어라 처럼 밝고 착하고 예의바른 어린이가 되길 바랬다. (비문이에요. 주술관계 호응시키기)

-> 내가 서른 초반이고 아이가 십대 초반일 때 나는 항상 아이에게 기죽지 마라’ ‘어른들 말씀 잘 들어라고 말했다. 아이가 착하고 예의바른 어린이가 되길 바랐다.

 

- 아프거나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내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내 앞에서 나에 대한 험담이나 빨리 죽어야 할텐데..라는 말은 하지 말 것. 외롭고 허전하지 않게 항상 내 손을 꼭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더 고생하지 않고 잘 돌아가셨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마라) 죽으면 경건하게 장례를 치루고 수의는 최고급에 가장 예쁜 거 입혀줘라.

-> 신선하고 재밌는 표현. 왜 최고급 수의를 입고 싶은지 궁금해요. 그거까지 써주세요.^^

 

- 처음 유서를 쓰기 시작할 때의 설레임(->설렘)보다는 오히려 두렵기만 하다.

 

 

기도

시를 썼네요? 시적인 감수성도 잘 어울리는 기도.

 

- 내 과거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겁난다. 그것이 문장으로 화했을 때 별 거 아닐까봐 혹은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을까봐.

-> 여기서는 삶에서 별 것별 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척도가 핵심이에요. 그것은 곧 진영의 가치관이기도 하고요. 그걸 쓰지 않으면 글이 계속 겉만 맴돌 수 있어요.

- 하여튼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공부하거나 행동할 때다. 내 안에 아무 것도 (야마 같은 거) 없을까봐 겁나서 꺼내지도 못하겠다.

-> 공부나 행동은 자기 인식, 자기 이해, 자기 해방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걸 덮어두면 어쩌려고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공부와 행동으로 새롭게 거듭 나니까 유연하게 생각해요. 삶의 창조자가 되기 위해, 삶을 멋진 예술로 만들기 위한 공부라는 걸 잊지 말고요.

 

- 무엇을 아무리 얇게 썬다 하여도 그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는 말처럼

- 위로의 반대에 있는 말은 합리화이니까

-> 위로의 반대말이 합리화라는 게 나는 금방 이해가 안 돼요. 이 부분 살 붙여줘요.

 

- 자기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들여다보는: 동시에 행해지는 일은 붙여 쓰기) 일이 죽을 것처럼 힘이 들어 그만, 글쓰기를 포기하였다는 어느 작가의 한 시절을 나도 어슬렁거려 본다.

 

 

바다

지상의 낙원에 저도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요. 글을 읽는 데 완전히 몰입되어서 한 번도 쉼 없이 읽히네요. 같이 소방훈련 몇 번 한 거 같아요. 에리카라는 인물의 캐릭터도 생생하게 묘사되었고요. 마지막 반전에 가슴이 쿵 했는데, 죽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게 해준 에리카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 들어간다면 이 글이 사례와 사유가 비율이 맞는 글로 완성도가 높을 것 같아요. 그 부분 꼭 써주세요. 정말 궁금해요.

 

- 그리고 엄마도 아빠도 동생들도 남편도 내 아이들도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두 번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에리카는 두 번 세 번 내가 진짜 괜찮은 것인지 물었다. 뿐만 아니라 괜찮지 않으면 다 두고 자기에게 오라고 자기가 해결해 주겠노라고 말했다.

-> 이 부분은 제가 쓴 것인 줄 알았어요. 나의 괜찮지 않음을 아무도 몰라주고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 문득 서글퍼서 자기설움에 빠져 지내곤 합니다. 나의 에리카도 어딘가에 있겠지요.^^

 

 

벌꿀

동화작가 벌꿀님. 벌꿀님 글 읽으면 파스텔톤 그림책에서 벌꿀님이 왔다갔다 해요. 참 신기해요. 어떤 장치가 있길래 이런 서정을 자아내는지요. 독특하게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좀 짧아 아쉽긴 해요. 시간이 없으셔서 못 썼다면^^; 더 써보세요. 아이는 어른처럼 죽음에 대해 심각하지도 무겁지도 않으니 때로 잔혹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잖아요. 고양이의 죽음과 물고기의 죽음. 두 죽음에서 죽음을 대하는 어른, 아이 등 일상적인 자세가 보여요. 사회적으로 승인된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자세가 있는데 작은 것들의 죽음을 통해 다른 것들이 드러나는 거 같아요. 그게 또 인간의 여러 성정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고요.

 

종이와 오늘에 이어 (방울이도 아니고) 방울에게 쓴 편지가 좋네요. ‘그것은 살아있다는 소리. 잊혀진(->잊힌) 것들과 죽어간 것들이 실은 어딘가에서 묵묵히 잘 살고 있다는 소리. 그렇게 믿고 싶은 소리.

 

 

늦봄

길담서원 박성준 선생님이 사는 이야기가 죽음에 대한 준비로 연결이 되네요.

- 선생님은 실제로도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내용으로 꽉찬 열 권의 책을 찾고 있다고 하셨다.(부사는 가급적 생략하면 문장이 깔끔해요. 존칭어도 안 써도 됩니다.)

-> 선생님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내용으로 꽉 찬 열권의 책을 찾고 있다고 했다.

 

저는 박선생님 얘기를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 대다수이니까, 선생님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주면 글이 알차겠어요. 한 가지 정보라도 충실히 남기자!는 목적에 맞게 말이죠. 이 글을 읽으면 사람들이 길담서원에 찾아가보고 싶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통혁당 사건과 연루되어 원치 않는 옥살이를 13년간 했던, 자신이 권한 책 몇 권 때문에 함께 옥살이를 했던 후배들에게 미안함을 토로했던, 퀘이커 교도로 목사일을 했지만 하나님이 진심으로 믿어지지 않아서 그만두었다는

 

-> 이외에 박선생님이 서점을 열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가 하는 부분까지 한 단락 정도 더 들어가면 좋겠어요. 그러면 솔직한 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특별한 그 장면과 더불어 매우 각별하게 다가온다고 독자가 느낄 수 있겠지요.

 

박성준 선생님의 삶이 이반일리치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늦봄의 물음으로 끝나는데 그 부분이 다시 글이 시작되려는 느낌이 들어요. 박성준과 이반일리치를 통해서 늦봄은 죽음을 어떻게 대비하기로 했는지, 책 열권을 고를 것인지, 죽기 직전 가족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가고 싶은지, 어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해요.^^

 

- 주고 받을 게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 이 문장에서 가슴이 철렁하네요. 멋진 통찰이에요.

 

 

선미

다산 정약용은 걷는 것을 청복淸福맑은 즐거움이라고 했다. 전국의 곳곳이 그야말로 맑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 이걸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글이 더 품격 있겠어요. 글쓰기 어렵다더니 힘들어하는 게 느껴지네요. 몇 가지 혼란을 정리하면 다시 잘 될 거예요. 여행기는 정보와 느낌이 고루 들어가야죠. 정보는 본문에 녹이지 말고 별도의 팁으로 빼요. 이를 테면 찾아가는 법. 숙소 등등이 본문에 있으면 어수선해요. 본문에는 덤덤하게 자기가 해석한 풍경과 경험한 장소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써주세요.

 

통신망 발달로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데 보편적인 이야기 말고 박선미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요. 야외촬영으로 맺은 인연, 신부가 익사한 이야기 등은 화제 집중이 되네요. 수다 떨 때처럼 그런 걸 잘 가공해서 써 봐요. 길게 아니고 포토에세이처럼 짧아도 돼.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제목은 이게 좋겠어요. ^^ 사진은 대박이지 뭐.

 

 

동희

삶에서 우러난 관찰과 사유가 돋보이는 좋은 글입니다. 2기 수업할 때 포함해서 이제껏 가장 잘 썼어요^^ 동희씨만 알고 쓸 수 있는 영화제작팀원의 이야기. 있는 그대로만 성실히 묘사해도 워낙 현장이 긴박해서 그런지 긴장이 살아나요. 그렇기 때문에 동희씨가 느끼는 허탈감도 극대화되고.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건 아닌가, 혐의를 지울 수 없는데 그런데도 왜 그 때만 살아있다고 느끼게 될까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그걸 더 안고 사유해보아요. 열쇠는 그대가 갖고 있어요. 인상적인 표현들 모아봤어요.

 

- 시도때도(시도 때도) 없이 울려 충전기에 꽂고 전화를 해야했던(해야 했던) 핸드폰은 마치 고장난 것(고장 난 것) 마냥 한 번도 울리지 않는다.

- 독방 늙은이 혹은 사형집행 전 마지막 외박을 선물 받은 사형수 같은 느낌이 든다. 육체적 죽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의 나는 죽어버렸나? 라는 생각을 지울수(지울 수) 없게 된다.

- 잠을 재우지 않고 다섯끼(다섯 끼)를 먹인다, 1000km넘게 24시간 가까이 운전을 할 때도 있다.

- 문자라도 오면 좋으련만 왔다하면 대리 운전, 대출 문자 뿐이다. (문자뿐이다.)

 

 

스누피

공부 잘하는 법은 국영수 중심으로 예복습 충실히 하면 된다고 하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글 잘 쓰는 법도 마찬가지.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될 거라는 이론은 아는데 그게 쉽지 않고 노력해도 금방 달라지지 않아서 답답해요. 저도 많이 경험해요. 생각하는 것과 표현하는 것이 일치하지가 않아서 괴로움을 겪어요. 그 간극을 좁힐 길이 요원해 보여서요. 고만고만한 글 지겹고 더 깊은 글을 쓰고 싶은데 틀 안을 맴도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

 

그런데 길게 봐야죠. 뭐가 금방 바뀌고 변하고 취해진다는 건 그만큼 가치 없는 것일 가능성이 커요. 조금씩 힘 방향을 바꾸어나갈 수 있어요. 그 노력의 시간이 조금 덜 고통스럽고 더 즐겁기를 바랄 뿐이고, 스누피가 힘들어하니까, 꿈까지 꾸었다니까 마음이 아픈데 뭐라도 돕고 싶어요. 같이 글 배우기 위해 만난 동료니까요. 힘내고요. 글은 기능적인 부분이니까 꾸준히 쓰고, 남의 글도 읽고 얘기 듣고 더 개방적인 자세로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면 글도 달라질 거예요. 제가 조금 고쳐보겠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몸서리'. 이따금 들이닥치던 죽음의 불안을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았는데 드디어 찾은 듯하다. 근원적으로 죽음의 허무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더 기민해진 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껍질을 힘겹게 벗은 순간부터인 것 같다.

 

-> 몸서리. 이따금 들이닥치던 죽음의 불안을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았는데 드디어 찾았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인가,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 때부터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죽음에 더 민감해진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옷을 힘겹게 벗은 순간부터다.

 

견고했던 신앙의 부재는 자유와 공포를 동시에 안겨 주었고 습관처럼 죽음 이후를 곱씹었다.(이 문장은 빼도 됨) 취침 기도가 빠진, 까만 적막이 흐르는 내 잠자리에 죽음이 찾아와 바라보곤 했다. 그럴때면 몸을 이루는 수천조의 세포들이 아직은 건재하다며 악다구니를 쓰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무기력한 몸서리로밖에 그놈을 쫓을 뿐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 취침 기도를 하지 않았다. 까만 적막이 흐르는 내 잠자리에 죽음이 찾아와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악다구니를 쓰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서리로밖에 그놈을 쫓을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사색적인 내게 감성과 이성은 중요함을 넘어 소중하기까지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어쩌면 고통을 쾌락으로까지 끌고 갈 만큼 파헤쳐 생각하고 양껏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고생 끝에 오는 앎과 정화의 개운함은 회피해도 고개를 내미는 혼란의 찝찝함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묵묵히 하던 일을 하는 통증의 부축으로, 지나온 삶의 부조리를 곱씹고 끔찍한 통찰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이반일리치의 이야기가 마냥 고통스럽지 않았다.

 

-> 나는 지나치게 사색적이다. 도스토예프시키 말처럼, 어쩌면 고통을 쾌락으로까지 끌고 갈 만큼 파헤쳐 생각한다. 혼란스러움을 양껏 즐기는 편이다. 고생의 끝에 가면 마음이 정화된다. 그 때의 개운함은 혼란의 찝찝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지 지나온 삶의 부조리를 곱씹고 끔찍한 통찰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이반일리치의 이야기가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봄봄

수업 이전에 쓴 글을 이렇게 잘 쓰면 어떡해요. 구색이 너무 잘 갖춰져 제가 민망하잖아요. ^^;

- 타인의 죽음은 어쩌면 자신의 삶으로 귀착한다.

-> 멋진 통찰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반일리치를 통해 우리 삶을 들춰본 거죠. 잘 안 열어보던 그 자리를요. 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시골의 장례 풍습 이야기 생생하게 한 폭의 영화처럼 잘 읽었습니다. 큰 아버지와 할머니가 교차 편집 되는 것도 좋아요. 봄봄님 이야기꾼이세요. 벌꿀님의 댓글에 깊이 공감하여 붙입니다.

 

고마워요.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죽는다면 종합병원 지하 장례식장과 기업로고 박힌 일회용 젓가락과 숟가락, 포크레인이 아니라 꽃상여와 상여소리, 바람소리, 누군가들이 곡하는 소리와 삽으로 보내드리고 싶어요.’ (벌꿀)

 

 

* 은유의 음악다방

 

오늘은 앙드레 가뇽의 '러브 미 텐더' 입니다.

노란 햇살이 빗금처럼 들이치던 아침, 이불에 누워 이 노래 들었을 때 잠시 천국을 떠올렸습니다.  

바다님의 그린 지상의 낙원, 그리고 봄봄님이 그린 상여소리의 음악적 구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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