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7.31] [한겨레] 왕따 생존자의 말하기 (2)
  2. [2012.01.27] 아우슈비츠, 상처의 철학 (4)

[한겨레] 왕따 생존자의 말하기

[은유칼럼]

오래된 농담처럼 ‘왕따’라는 단어를 말하기까지 십수년이 걸렸다. 그녀는 중학생 때 지독한 왕따를 당했다. 3년 내내 혼자 다녔다.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고 들어오면 책상에는 아이들이 남긴 반찬, 그러니까 음식물 쓰레기가 올라와 있었다. 매일 울면서 집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담임을 찾아가 말했으나 담임은 조회 시간에 주의 한번 주고 말았다. ‘네 동생 왕따라며?’ 외려 언니가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약한 것을 비집고 들어가는 괴롭힘은 죄책감 하나 없이 당연해 보였다.


폭력을 꾸준히 당하자 그녀에게도 폭력 성향이 생겼다. 부모가 뒤를 받쳐줄 수 있다면 걸상을 들어 누구라도 내리찍고 싶었다. 외부로 향하지 못한 공격성은 육체의 말단인 손톱을 향했다. 하도 물어뜯어 검지에서 중지로, 중지에서 약지로 손톱에선 늘 피가 번졌다. 밤마다 자문자답의 꼬리물기가 시작됐다. 왜 나한테 그럴까, 내일 학교 가면 나아질까, 가해자 부모를 찾아가서 말할까, 차라리 자살할까….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힘든 사건일수록 그렇듯이 그녀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스물셋, 동사무소 헬스장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10년 만에 마주친 그 동창,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찌르고 욕설을 뱉던 왕따의 가담자는 그 자리에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얼결에 이뤄진 재회와 사과를 그녀는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억압된 것의 회귀. 상대는 죄책감 덜고 살자고 사과했을지 모르나 그녀는 치욕의 불구덩이에 다시 빠져들었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시야와 관계를 넓히며 악몽에서 벗어난 그녀는 고통의 언어화 작업을 시도했고 ‘폭력과 기억’을 주제로 글을 썼다.


“말로 받았던 폭력과 그들의 얼굴은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잊지 않고 있다. 이건 내가 용서해야 지워질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한 학인이다. 자라지 못한 손톱을 부채처럼 펼쳐 보이는 그녀 앞에서 난 몹시도 부끄러웠다. 함부로 하는 사과가 자기기만인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됐고, 왕따의 화살이 내 아이만은 비켜가길 바라는 학부모로 사는 내게 그녀의 증언은 엄중한 진실로 압도했다. “잊지 않겠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택한 ‘존엄의 회복’의 수순이 꼭 그와 같았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이것이 인간인가> 270쪽)


왕따를 당한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존자가 된다는 뜻이다. 왕따 학생 자살 사건이 사회면 단골 뉴스가 된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니 섣부르게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은 존엄 회복의 노력이고 폭력 근절의 실천이다. 오늘도 손톱을 뜯으며 폭력의 독을 빼내고 있을 아이들은 어떻게 슬픔에 익사당하지 않고 ‘사건의 반복’을 사유하는 생존자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두 가지를 말한다. 눈가가 젖어 있거나 교복이 망가졌거나 “티는 나는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아이들을 살필 것. 당사자는 숨기지 말고 ‘고통 말하기’라는 우연한 시도를 누릴 것. “처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 아픔의 정보를 내주었을 때 상대방도 자기 얘기를 터놓았다. 왕따나 직장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 한겨레 '삶의창' 2016.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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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상처의 철학

[비포선셋책방]

인간이 겪는 고통과 기억, 언어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 아직은 막연하다. 글쓰기수업 할 때 과제를 내주면 대부분 고통스런 기억을 긁어내 언어로 담아온다. 잘 안 담긴다. 흩어진 나날들. 자기로부터 객관화가 어려운 기억인데 털어버리고 싶을 때 알맹이 없는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빈 중심에 들어찬 진실이 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하여질 수 없는, 잊을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 삶에서 떼어버리고 싶지만 자기를 형성한 결정적인 부분인 삶의 어두운 이면들. 누구나 있다. 사회면에 나오는 흉흉한 뉴스들. 그 자체로 야만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이 참 많이도 겪고 산다 

이 범람하는 고통 앞에서 나는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져보는 중이다. 공부를 하면 훌륭해질 가능성과 이상해질 가능성은 반반이다. 이상함이란 삶을 떠난 유려한 말의 성찬과 관념의 유희만 남는 경우를 뜻한다. 삶의 중력이 사람을 향하기보다 인식을 향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인식의 매혹은 그만큼 크다. 그래서 벤야민은 꿈을 꾸는 것만큼이나 꿈에서 깨어나기도 중요하다고 역설했으니. 나는 책에 탐닉하면서도 책을 내려놓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울러 늘 공부를 열심히 하고자 안달이면서도, 행여 열심히 할까봐 걱정도 같이 한다. 제때에 필요한 공부를 게으르지 않게 하기가 목표이며, 필요게으름의 척도가 나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아우슈비츠 혹은 상처의 철학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꼭 해야 할 공부라는 강력한 느낌이 왔다. 인문숲에서 김진영 선생님이 하는 강좌다. 아우슈비츠는 아감벤, 아도르노, 아렌트 등 현대철학에서 워낙 핵심적 키워드로 다뤄지고 있는데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 답답했다. 좋은 기회가 왔고, 역시나 기대이상의 수업이 진행 중이다. 첫 시간 첫 마디가 이랬다. “아우슈비츠 강의에 웬 여자 분이 이렇게 많이 오신 겁니까?” 반가운 듯 쓸쓸한 웃음을 지으시더니 약자의 문제이기에 여자가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3회 차 수업을 마쳤고 7회가 남았다. 혼자만 알면 무슨 재민겨 사상에 입각하여 배운 내용을 정리를 해보려 한다 

우선 증언의 문제. (너무나게 직접적인 책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것이 인간인가> 저자 레비의 증언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가지 중요한 사실. 첫째는 아우슈비츠의 목적은 집단학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인간됨을 남김없이 탈취하는 것. 탈인간화 시키기. 유대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명을 하는 게 목적이다. 둘째는 아우슈비츠는 나치만의 작업인가. 아니다.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학살 가담자가 50만에서 70. 당대 독일사회 전체가 가담해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무슬림. ‘무슬림이 되는 과정은 굶기의 기아의 과정을 따라간다...기아가 더 심해지면 종기들은 온몸으로 번져서 몸 전체가 흐르는 고름과 진액으로 덮힌다. 그럼 심한 설사가 시작된다. 이 때가 되면 수용자는 감각이 둔해져서...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고립상태에 빠진다. 걷는 일은 느려지고 보행법도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서 걷는 모습으로 바뀐다. 체온이 현격히 떨어져서 언제나 몸이 덜덜 떨리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멀리서 보면 마치 기도를 하는 아랍인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SS나 수용자들이나 모두가 그들을 무슬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신도 육체의 품위도 모두 빠져나가서 다만 숨 쉬는 뼈와 살만이 되어버린 존재다. 무슬림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아님의 경계에 선 존재다. 인간에 관한 모든 정의-개념 다시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물음표...

홀로코스트. 유대인 청소정치.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 그중 100만은 정치범, 집시, 동성애자 등. 수용소는 인간 조건이 무효화되는 곳. ‘인간과 인간 아님을 나누는 실험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가 나치만의 작업이었을까. 유대인 분리-추방-수송-수용-학살의 과정. 직접 참여자는 나치정당원, SS부대, 게슈타포 등이 있고 간접적으로는 군대, 경제산업단체. 수용소 짓고 부수고, 게토화 하고 추방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기간산업이 필요로 했다. 독일의 고속도로 정밀공업, 건축산업 등. 또한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식민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일반 공무원들. 유대인 문제로 도장을 한 번도 안 찍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식민정부와 경찰, 사무원이 마구 사인한 결과는 무엇이었나 

아카데미, 학자들은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인문적, 법적 이데올로기. (유신헌법처럼) 민족학, 종족학, 인간학 등이 유대인 학살에 동원됐다. 교회들. 교회에서는 나치에게 신도들의 인적기록을 제공하고 신도들에게는 면죄부를 팔아서 수익을 남겼다. 종교적 합리화 신의 뜻이라며 고해하면 용서해주는 방식. 그리고 일반인들. 앞 장 서서 고발한 이들. 사업경쟁자 옆집 가게 사람이 잡혀가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또 유대인 끌려가서 집이 비면 그 빈집이 독일인에게 제공되었기에 외국 살던 독일인 사이에 고향 회귀운동이 일어났고 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정권만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당대 사회 전체가 공장이었다. 저마다 이권에 따라 의무를 수행하고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집단범죄, 총체적 범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는 가스 살인 총 책임을 부여받았다. 가장 직접적 학살 행위를 저지른 자. 정신감정을 했더니 아주 정상적이었다. 사디스트적이지도 않고 질서와 자연을 사랑했다고. 커다란 권위가 부여한 업무에 열성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 전범자 재판받을 때 유대인들을 죽어야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질문 자체가 불필요하다. 나는 원칙대로 수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임무인데, 왜 인간성 문제를 끌고 오느냐는 식으로 자기정당화를 시킨 것. 임무의식 > 인간감정. 그에게는 인간성보다 임무가 중요했다 

참담한 확인. 아이들이 날마다 죽어나가는 우리 사회를 홀로코스트로 볼 때. 어떤 거대한 이 횡행하고 일반인의 삶까지 휘저어 놓는 원인은 교육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목고, 자사고, 자율고, 국제고 등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이득 취하는 교육관료들, 대학들, 학원재벌, 영어 특수를 노리는 업체들, 영어 유치원, 참고서 출판사, 일선 교사들. 그리고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의원들, 아동학자, 교육학자, 심리학자 등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주는 아카데미, 우리학교 전교1등 공부비법 전해주면서 무한경쟁이데올로기 생산하는 언론 등의 암묵적 동의하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단지 밥 먹고 살기 위해 성실하게 사는 생활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성찰 없이 행하는 일들이 세상을 살만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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