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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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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아프게 하는 착한 사람들 오빠가 서른 초반에 병을 얻은 뒤, 엄마는 모임만 다녀오면 눈물지었다. 특히 명절이나 생일 등 가족 행사에서 다른 친척이 자식 얘기 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오빠 또래의 사촌들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평범한 얘기는 그런 평범한 삶에서 멀어진 (듯 보이는) 자식을 둔 엄마를 소외시켰고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게 했다. 운명의 얄궂음일까. 유독 공개적인 자식 사랑으로 엄마를 힘들게 했던 한 친척의 생일날, 엄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후 외숙모가 말했다. 엄마가 외숙모에게도 하소연을 종종 했다고 한다. 유일한 기댈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숙모는 짝 채워 장가까지 보낸 외아들을 사고로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 후 친지 누구도 당신 앞에서 자식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면서, 가..
성폭력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근에 폭탄처럼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 부대꼈다. 내가 당한 크고 작은 피해 경험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전해 들었던 피해자들 이야기가 일제히 대책없이 되살아났다. 몸의 기억이 들쑤셔져서 잠 못 이루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할 수 없다. 집단 트라우마다. 그 와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이 『용서의 나라』 라니 사실 미심쩍었다. 성폭력과 용서라는 말은 양립 불가능한 조합 같았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성폭력 피해 생존자 이름은 토르디스 엘바. 아이슬란드에 산다. 16살 소녀일 때 교환학생을 온 남자친구와 사귀었고 강간당한다. 가해자는 자기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버린다. 그후 토르디스는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등 고통을 겪다가 9년 만에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용서의 첫걸..
이상한 정상 가족 - '불쌍한 아이'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 인터넷 광고 페이지에서 아기 사진을 보았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한 줌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가 누워서 천장을 보는 옆모습이었다. 작은 생명의 연약함, 무구함, 천진함이 몽글몽글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어느 사회복지 단체의 광고 홍보성 페이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은 이웃의 관심을 당부했고, 게시물 아래에는 ‘후원했다’, ‘우리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돕겠다’, ‘천사 같은 아기야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때는 연말, 날은 춥다. 원래 아기 사진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데다 순탄치 못한 서사까지 더해지니 나 역시 그 페이지를 휙 나가지 못하고 어정거렸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부모 없이 자라는 게 가여워서가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을 ..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남자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 남자들도 알고 보면 돈 버느라 불쌍하거든요.” 강연을 마치고 질문 시간에 손을 든 중년 남성이 말했다. 난 강연 내용을 재빨리 복기해보았다. 남자를 밉다고 했나? 그렇지 않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곤란과 불편, 내가 만난 여성들이 당한 폭력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남자보다 여자의 불쌍함을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것을 두고 남자에 대한 미움, 투정, 원망으로 받아들이고 그는 동정과 배려를 당부했다. 당황한 나머지 난 말을 얼버무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답변 시나리오를 짜보았다. “제가 남자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어떤 대목에서 받으셨어요? 전 여성의 삶을 이야기했거든요. 선생님이 여성이 겪는 아픔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다정한 얼굴을 완성하는 법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외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음식 장만이 힘들다며 추석은 쉬고 설날에만 오면 어떻겠냐고 주저주저 운을 뗐다. 그간 매년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외가에 갔었고 숙모는 20인분 가량 친지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우리 가족을 각별히 챙겼다. 명절상에 특별요리를 더한 상차림이 예순을 넘긴 숙모에겐 고단한 노동이었을 텐데 미리 헤아려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외숙모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숟가락 몇 개 놓는 건데”라며 표정이 어두워진다. 물론 한 끼 밥을 못 먹어 그러시는 게 아닐 것이다. 친지와의 왕래가 줄어드는 명절에 대한 서운함과 사위어가는 인연에 대한 쓸쓸함을 느..
만국의 싱글레이디스여, 버텨주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 뒤에는 으레 ‘어차피 후회할 거면 결혼하는 게 낫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결혼은 누구의 좋음이고 누구의 후회인가, 주체가 생략됐다. 결혼 생활로 덕을 보는 사람이 지어내고 결혼 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으리라 짐작한다. 저 말씀이 효력을 잃어간다. 결혼해서 후회한 사람들, 아마도 여성들이 작성한 후회의 목록이 널리 공유되며 생긴 변화 같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결혼을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여성은 결혼하거나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 받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한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후회할 게 빤하면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상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 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는 내 어설픈 사랑 연구에 맞춤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각기 다른 세대의 이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인데 스토리가 촘촘하고 풍성하다. “우린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얼굴이다”라는 극중 대사처럼, 그..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 인공자궁을 생각함 “저 엄마 왜 울어?” “몰라. 아까부터 울더라.” 간호사들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멀어진다. 새벽 4시 32분 아이를 낳고 나는 분만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닐곱 시간 산통 끝에 몸통은 거죽만 남은 듯 너덜너덜했다. 혀가 껄끄러워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는데 노란 모래 가루 같은 입자가 묻어나왔다. 물 좀 달랬더니 간호사가 적신 거즈를 준다. 그걸 입술에 대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무슨 스위치를 켠 것처럼 느닷없고 하염없이. 흐느낌도 통곡도 아닌 조용한 눈물의 방류를 간호사들이 본 모양이다.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오빠를 낳고 어떻게 나를 또 낳았을까. 첫 아이 출산 때 정신이 돌아오고 처음 든 생각이다. 몸을 초과하는 통증에 몸서리쳤다. 그래 놓고 나는 또 둘째를 낳은 것이다. 동이 트자마자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