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5.25]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2)
  2. [2017.05.01]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 인공자궁을 생각함
  3. [2017.03.22]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5)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은유칼럼]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 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는 내 어설픈 사랑 연구에 맞춤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각기 다른 세대의 이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인데 스토리가 촘촘하고 풍성하다. “우린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얼굴이다”라는 극중 대사처럼, 그리스의 경제, 외교, 정치 조건에서 그들이 겪는 곤란은 다르지만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사랑하는 모습은 닮은꼴이다.


청년 커플은 그리스 여대생과 시리아 이민자 남성이다. 경제 위기에 처한 그리스인들에겐 기근과 전쟁을 피해 흘러든 이방인은 불청객이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은 수업시간 교수가 말하는 난민 문제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난민은 토론 과제가 아니라 만져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민자 남자는 그리스인들 사이에 있을 땐 사회에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혐오의 대상이지만 그녀와 있을 땐 시리아에서 태어난 순박하고 정의로운 예술가 청년이 된다. 인종이나 계급, 문화의 차이는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사랑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에 미리 쪼그라들거나 위험을 계산해 행동하지 않는다. 늘 불안한 눈빛을 보였던 그는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변한다. 그녀 곁에선 천진한 웃음의 존재로 개화한다.


중년 커플은 파산 위기를 맞는 그리스 회사 직원과 그 회사의 구조조정 책임자로 온 스웨덴 여성의 사랑을 그린다. 하루하루 실적으로 평가 받는 마케팅 업무의 스트레스와 쇼윈도 부부 노릇에 지친 중년 남자는 공황장애 약을 먹으며 간신히 일상을 지탱한다. 왜 그런 약을 먹느냐며 남자의 나약함을 비웃는 그녀. 사랑에 빠지면서 숫자만 보이다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냉정하고 빈틈없는 사고 체계에는 교란이 일어난다. 자본주의의 생리인 신속함과 무자비함을 요구하는 본사의 닦달을 못 이기고 업무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가 먹던 알약 로세프트 50mg을 삼킨다. 이제 남의 밥줄 끊는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노년 커플은 그리스인 평범한 주부와 독일에서 이주해온 역사학자 남자다. 사랑이 잉태되는 공간은 마트. 그녀는 절박하다. 장바구니에 토마토 한 상자를 넣었다 뺐다 할 정도로 생활고가 극심하다. 아직도 싱크대 앞에서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인가’ 한숨 쉰다. 이런저런 고민을 그에게 터놓는다.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마트 밖은 위험하다고 여기는 그녀를 남자는 신화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녀는 그가 선물한 두툼한 신화 원서를 읽고자 돋보기를 쓰고 영어사전을 편다. 혼자 힘으론 불가능한 말하기, 듣기, 읽기의 세계를 그의 꾸준한 도움으로 통과한 그녀는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에 항의하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사랑의 급진성이 아닌가.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에 빠지기 그것은 곧 혁명’이라고 말하는 책 『사랑의 급진성』을 떠올렸다. 한 사람의 이민자가 혐오의 대상에서 환대의 대상이 되고, 해고하는 사람이 해고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공부하지 않던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범상한 일상,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생겨날 수 없게끔 사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의 단층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는 사건”(12쪽)이라는 혁명의 정의대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랑이라는 ‘일인분의 혁명’을 완수한다.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도 약간 방향을 튼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주인공, 사랑에 무능력한 존재가 나온다. 극우 파시스트 조직에 가담해 유럽 난민에게 무차별한 테러를 자행하는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불운으로 인한 자기 삶의 실패와 불만족을 이민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투사하며 혐오의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간다. 혐오를 뿌리고 혐오를 거두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다. 누구나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일상은 비슷할지 모르나 사랑의 있고 없음으로 훗날 다른 얼굴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삶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 아닌가 하는 물음에 『사랑의 급진성』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 제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19쪽) 성적 욕망으로 팽배한 현대사회지만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자기동일성에 안주하는 현대인의 왜소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166쪽)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보는 것, 둘째는 듣는 것, 셋째는 연인의 후한 마음”(19쪽)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의 세 커플도 각각 낯선 사람에게 눈길을 건네는 사소한 행위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과 정성을 후하게 쏟으며 사랑의 주체가 된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151쪽)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 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 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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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 인공자궁을 생각함

[은유칼럼]

        “저 엄마 왜 울어?” 

        “몰라. 아까부터 울더라.”


간호사들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멀어진다. 새벽 4시 32분 아이를 낳고 나는 분만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닐곱 시간 산통 끝에 몸통은 거죽만 남은 듯 너덜너덜했다. 혀가 껄끄러워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는데 노란 모래 가루 같은 입자가 묻어나왔다. 물 좀 달랬더니 간호사가 적신 거즈를 준다. 그걸 입술에 대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무슨 스위치를 켠 것처럼 느닷없고 하염없이. 흐느낌도 통곡도 아닌 조용한 눈물의 방류를 간호사들이 본 모양이다.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오빠를 낳고 어떻게 나를 또 낳았을까. 첫 아이 출산 때 정신이 돌아오고 처음 든 생각이다. 몸을 초과하는 통증에 몸서리쳤다. 그래 놓고 나는 또 둘째를 낳은 것이다. 동이 트자마자 남편이 양가에 전화를 드렸고, 엄마는 아침 7시 병실 문을 열고 뛰듯이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던 엄마. 왈칵 눈물을 쏟으며 말한다. “고생했다. 애 낳는 게 얼마나 아픈데…”


삼칠일이 지나 산후도우미 아주머니가 가고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쁘고 혼자 남겨졌다. 밤낮으로 두 아이 사이를 오가며 쩔쩔매던 어느 날, 아이를 재워놓고 방문을 닫는데 아이가 뒤척였다. 다시 토닥토닥하고 재우면 또 깨고 그러길 수차례. ‘잘 자라 우리 아가’를 입으로는 흥얼흥얼 등을 두드려주는데, 빨리 자라 좀 제발 하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짝을 세게 한 번 내리쳤다. 손바닥에 꽉 차는 조그만 등의 느낌. 후끈했다. 그런 난폭함이 내 몸 어디에서 나왔는지 놀랐고 더 놀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는 분유도 이유식도 거부했다. 끼니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제발 한 입만 먹어라, 제발. 애원은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분노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벽에 던졌다. 아기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모든 게 지옥이었다.” 

한 여성이 산후우울증을 호되게 앓았던 경험을 글쓰기 수업에서 발표했다. 저 대목에서 멈칫,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래 전 화의 기운이 나를 덮쳤다. 행여나 들킬세라 과제물에 시선을 두었다. 낭독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더니 세상에나,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휴지를 꺼내 코를 푼다. 각기 다른 연령 대 여성들이 운다. 침묵을 깨고 한 명이 말문을 열었다. “남들은 척척 해내는 육아가 나는 왜 이렇게나 힘이 들까.” 이 문장이 특히 공감이 간다고, “그 말을 저는 남편에게 들었어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가는 길, 이 집단적 슬픔의 광경이 떨쳐지지 않았다. 지금도 육아의 고통을 자신의 모성 부족으로 탓하며 속울음 삼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 안의 폭력 성향이 불쑥 나타날 때 어떻게 잠재울까. 문득 엄마들을 모아서 ‘봉기蜂起’를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충동적으로 페이스북에 봉기 단상을 올렸고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토록 고된 육아를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수행한 선배 엄마들에 대한 원망, 육아로 인한 일상의 압박과 인격의 왜곡에 대한 토로가 족자처럼 펼쳐지는 와중에 한 줄 의견이 외롭게 버티고 있었다. ‘저도 봉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내가 구상하는 봉기는 단순하다. 벌떼처럼 모여서 윙윙윙 떠들기다. 자기 공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니, 내 목소리를 내보내고 내 삶에 다른 목소리가 흘러들게 하는 것이다. 육아의 기쁨만큼이나 슬픔을, 어린 생명이 주는 충만함만큼이나 자멸감을 저마다 말하기만 해도 자신이 비정상이 아님을 알고 적어도 자기 억압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나는 또 엄마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을 펼쳐서 읽어주고 싶다. 그간 젠더 불평등은 근원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난 회의적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깨인 남자, 페미니스트 배우자를 만나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임신과 출산이 이뤄지는 한 양육에 따른 최종 책임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여자에게 귀속되더라는 것이다. 여자의 몸이 무거워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삶도 무거워진다. 비출산 경향도 그걸 인지한 여성들의 선택일 거다. 이에 대한 여성의 구제 방안을 『성의 변증법』 이 제시한다.


“남자는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고통과 산고를 참아야 하는 이중 저주는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해소될 것이다.”(292쪽) 저자가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인공 생식의 완전한 발달을 뜻한다. 즉, 인공 자궁에서 태아를 잉태함으로써 남성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지도록 하자며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여성을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양육의 역할을 여성뿐 아니라 남성, 즉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것.”(294쪽)을 요구한다.


스물다섯 살의 저자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이 급진적 주장에 처음엔 놀랐지만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시험관 아기처럼 인공 자궁을 통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인류의 반이 그들 모두의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한다”(293쪽)는 것에 근본적인 회의와 물음을 던진 점, 피임법이 개발되기 전 계속되는 출산으로 여성들이 끊임없는 부인병, 조로, 죽음을 겪는 현실의 단절을 꾀한 점, 온갖 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해 대안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귀하게 다가온다.


         『성의 변증법』은 1970년에 발간됐다. 40년이 흐른 지금, 남성 양육 역할 확대는 남성 육아휴직제로 논의, 실천되고 있으니 파이어스톤의 ‘혁명적 요구’가 비현실적인 대안이라고만 일축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고정 불변의 현실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삶을 그려보는 태도를 배웠다.


가끔 생각난다. 분만실 침대 위에서 천장의 사나운 형광등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물짓던 내 모습이. 귓속에 흘러들던 미지근한 눈물이. 무에 그리 서러웠을까. 애 낳은 게 뭐 대수라고 ‘저 엄마는 왜’ 눈물 한 바가지 흘리는지 나도 잘 몰라서 더 서글펐다. 그런 내게 “임신은 야만적이다. (…) 임신은 종을 위하여 개인의 육체가 임시로 기형이 되는 것이다”(287쪽)라는 말, 자연분만의 신화화를 비판하는 문장은 구원 같았다.


그날 나는 여자의 몸에서 발생하는 고통,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외로운 노동을 딸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한다는 사실이 아득하고 미안했던 것 같다. 엄마가 몸을 푼 나를 보자마자 울었듯이 나 역시 막 탯줄 끊어낸 딸에게 본능적으로 눈물을 바친 게 아닌가 싶다. ‘생식의 기계화’를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언어가 내 초라한 눈물의 이유를 밝혀주었다. 그러니 점점이 흩어져 홀로 고행하던 여성들의 입술이 말할 때,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공유할 때, ‘고통의 언어화’로 자기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엄마들의 봉기는 인공자궁에 버금가는 혁명이 되지 않을까 나는 상상한다.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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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은유칼럼]

“맞벌이 하시죠? 수레는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학부모가 되고부터 핸드폰 액정에 학교 전화번호만 떠도 가슴이 철렁한다. 학교는 어쩐지 불길의 정조를 몰고 온다. 담임의 부름을 받고 불안을 안고 몇 시간 후 빈 교실에 마주 앉았을 때, 담임은 물었고 나는 순간 깜깜했다. 뭐든지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말할 게 없었다. 월수금 영어학원 간다고 둘러댔지만 고작 한 시간 반. 끝나면 아이는 또 무얼 할까.

 

상담 중 담임이 말했다. 지난주 과학 시험을 보았고 아이는 점수가 낮았고 남자애들 몇 명이 놀렸고 아이가 울었다. 수레가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삭이는 편이다. 혼자 있을 때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 같다. 일기에 ‘정주행’한 드라마 이야기를 쓰는데 줄거리 요약을 제법 잘한다고 했다. 집에서 아이를 세심하게 살피라는 당부와 함께 상담이 끝났다.

 

그날도 이런 날씨였다. 교정을 빠져나오며 올려다본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노랗고 바람은 시렸다. 세상과 내가, 나와 아이가 분리된 느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동장 끝에서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담임과의 상담은 아이를 아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를 아는 자리였다.


수레는 둘째다. 첫 아이 때는 교과서 육아로 임하느라 ‘9개월 이후는 물젖’ 이론에 입각해 만 9개월 되는 날 모유에서 분유로 갈아탔다. 지나고서 후회했다. 더 먹일걸. 그래서 둘째는 마냥 먹였다. 젖이 텅텅 비어 쭈글쭈글해지도록 대여섯 살까지 물렸다. 몸으로 연결된 관계는 각별했다. 내가 울면 아이의 눈에도 눈물이 찼다. 아이는 유능한 기상관처럼 내 표정 변화를 감지해 기분을 맞췄다. 그런데 난 밥만 제때 먹이는 것만으로도 허덕였고, 아이의 감정은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스스로 모성을 맹신하는 사이 아이는 열세 살이 됐다.

 

그날 밤 아이에게 학교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대개 아이들이 그렇듯 겉으론 태연했다. 남자애들이 놀린 건 사실이지만 사과했고 다 끝난 일이라며 말꼬리를 잘랐다.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엄마는 무조건 걱정만 하잖아” 한다. 엄마한테 말해봤자 문제 해결에 도움은 안 되고 ‘엄마의 걱정’을 해소시켜줘야 하는 문제까지 추가되는 구조를, 아이는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울었다. 자책과 회한과 연민이겠지. 아이의 슬픔을 알아보지 못한 게 미안하고, 품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거 같아 섭섭하고, 밤이고 낮이고 일하느라 뒷등만 보여준 게 면목 없고, 무엇보다 아이의 몸에 고통을 견디는 회로가 깔린 게 안쓰러웠다. 흘깃 쳐다본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고통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눈물은 공유하는 우리. 그런데 아이는 왜 울었을까.

 

돌이켜보니, 난 딸이랑 닮았다. 나도 엄마를 좋아했지만 엄마에게 비밀이 많았다. 인생 고민은 막판까지 숨겼다. 고등학교 때 담임한테 말대꾸하다가 뺨 맞고 조퇴한 일을 엄마는 모르고 내가 모범생에 순둥이인 줄만 안다. 스물한 살 노조 상근을 결정했을 때도 출근 전날에야 실토했다. 말하는데 눈물이 마냥 흘렀다. 노조 활동 하는 거보다 이유 없이 운다고 혼났다. 도대체 왜 우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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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가오는 것들>에도 모녀 사이 눈물의 강이 흐른다.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딸은 출산 후 몸조리를 하다가 침대에서 느닷없이 운다. 엄마는 왜 우느냐며 이런저런 이유를 캐묻지만 딸은 말없이 울기만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테마가 녹아든, 내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딸과 엄마는 서로에게 멀고도 가까운 타인이다. 주변의 동성애자 친구들도 엄마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을 마지막 과제로 남겨둔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엄마에게 말하는 딸은 드물다. 돌싱녀 친구들은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나서 엄마에게 통보한다. 그건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효심과 자신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하려는 계산이 포함된 고도의 협상이다. 덜 진실한 태도는 아니다. 자식의 정체성 투쟁에서 엄마가 최후의 관문인 건 분명해 보인다.

 

그 봄날 상담 이후, 나는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에서 일찌감치 퇴각했다. 모녀관계에서의 무능을 인정했다. 아이도 내게 자주 상기시킨다. 수레는 요즘은 방과 후 집에서 고양이 무지와 노는 것으로 소일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난 무지가 너무 좋아. 잘 놀아주고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이것은 언중유골. 그러니까 고양이와 달리 (엄마) 사람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뜻이다. 난 잔소리 안 하는 엄마라고 자부했는데 아이 입장에선 아닌가 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157쪽) 구원은 과거에 있다. 엄마가 되면서 상실한 아이 적 감각을 복원하기. 이를 위해 엄마가 쓴 자식 양육서를 읽느니 딸이 쓴 엄마 이야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작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앞부분에 나오는 엄마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귀했다. 사실 딸의 금발과 눈썹을 질투하는 엄마는 보편적이지 않다. 전래동화 캐릭터처럼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기심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이성적 명분으로 바꾸고 명분을 사실로 바꾸는”(36쪽) 어머니, “내 삶에 분노를 쏟아내는”(41쪽) “나를 단 한번도 알아보지 못한”(43쪽) 필자의 어머니는 내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종종 딸을 향한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기정 사실로 왜곡할 때가 있고, 나의 풀리지 않는 화를 아이에게 퍼붓기도 한다, 보고 싶은 면만 초점을 맞추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연구 대상’ 엄마를 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딸의 지적 여정을 함께 하고 난 후, 나의 꿈은 정교해졌다. 자기가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는 엄마 되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수시로 그려보기. 그저 고양이처럼 말없이 아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http://m.ch.yes24.com/Article/View/32972

* 이 글은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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