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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31] 여자들의 저녁식사 (3)
  2. [2011.05.25]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10)
  3. [2011.04.06]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4)
  4. [2009.12.26] 사랑의 감옥 / 오규원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8)

여자들의 저녁식사

[은유칼럼]

모처럼의 불금. 친구 넷이 만나 밥과 술을 먹었다. 밤 9시가 넘자 “엄마 언제 오냐”는 전화가 번갈아 걸려오는 애 있는 여자들이다. 우리는 무더위를 어떻게 났는지 여름 안부를 주고받았다. A는 반바지 일화를 꺼냈다. 하루는 너무 더워 사무실에 반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타부서 선배가 지나가며 한마디 하더란다. “그렇게 짧게 입고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A는 이혼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라서 대충 웃고 넘기려다 그냥 말했다고 한다. “저 남편 없는데요?” 

B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절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B는 지난주말에도 태백의 절로 떠났다. 옆방에는 60대 중년부부가 묵었고 오며가며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부인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묻더란다. “이렇게 혼자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요?” B는 남편이 절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각자 주말을 보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익숙한 질문이다. 나는 결혼하고도 가끔 록 공연장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이웃집 언니들은 음악이나 공연에 관심을 갖기보다 남편의 태도에 감탄해 묻곤 했다. “그런 데 다니면 남편이 안 싫어해?” 

말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의 입장을 내면화한 말들, 결혼한 여자의 ‘행실’을 제약하는 발언이 여전히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러자 큰언니 C가 질문하는 여성들을 변호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살아보지 못해서 그럴 거라고, 자기도 스스로 가둔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C는 아내의 삶과 자기의 삶의 절충에 피로감을 느껴 남편과 별거 중이다. 

나 D의 기억. 십오년 전 안동 하회마을에 놀러갔다가 배낭을 메고 조리를 신은 외국인 할머니와 마주쳤다. 계모임 단체관광도 가족여행도 아닌 노년 여성의 나 홀로 여행이라니.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게 마냥 신기했다. 걱정도 됐다. 이렇게 만리타국까지 혼자 다녀도 정말 괜찮은지, 아마 영어만 능통했으면 다가가서 말 걸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느냐”와 크게 맥락이 다르지 않았을 뜬금없는 질문에 파란 눈의 할머니는 뭐라고 답했을까.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나의 물음은 그간 얼마나 진화했는가. '남편'의 시선만 간신히 모면한 듯하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 올 여름 ‘그래도 될까’를 되묻고 검열하다가 점잖지 못한 핫팬츠 두 개는 버렸고, 머리는 기장만 짧게 손질했다. 내 인생의 두발자율화가 시행된 지가 언제인데 머리 모양은 중고등학생 때 그대로. 단발에서 어깨까지 길이를 무료하게 오간다. 꼭 한번 빨간머리를 원했지만 어느새 흰머리가 정수리부터 증식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명동성당 첨탑이 보이는 이층 술집에서, 그날 우리는 늙기 전에 오프숄더 드레스 입고 송년 파티를 열어볼까 호기롭게 떠들었다. 술단지가 비는 동안 ‘남들이 뭐라든 입는’ 장단지가 드러나는 반바지에서 ‘우리가 입어보고 싶은’ 어깨가 내보이는 드레스로 논의가 진척됐다. 이게 어딘가. 자못 대견하다. 저무는 여름밤, 여자들은 매미처럼 시끌벅적 ‘생의 언어’를 배양했다. “욕망의 성기이며 육체의 현실인 말”(오규원)을.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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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올드걸의시집]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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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올드걸의시집]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일 동안. 공친 느낌. 잘 못 살았다는 자책. 더 바쁠 때도 시를 읽었는데, 내가 지금 시 한편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만한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닌데. 밀린 적금 붓듯이 한꺼번에 일시납 해버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시집을 곧장 꺼내지 않기로 한다. 아름다운 글 한 편 수배한다.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폈다. <병과 인내심> 분량과 내용 모두 맞춤한 소품이다. 식탁으로 갔다. 등 뒤가 따땃하다. 남동향이라 아침이면 해가 푸지게 든다. ‘누군가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는 훗날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여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였다이 순간 나는 기다리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직진하는 여인이 되지 못하고, 기다리는 자리를 탐낸다. 기다림이 속편하다. 적당한 쓸쓸함. 적당한 초조감. 시간이 팽팽히 펴지는 그 순간이 좋다. 커피머신이 기적소리처럼 요란한 음향효과를 내며 떤다. 아침의 고요, 커피의 낙하, 언어의 친절이 급진적인 시적경험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는 행복하다.

김치찌개 한 솥이랑 단호박 부침 달랑 놓고 저녁 먹는 자리. 기타가 화제다. 왕년에 다들 조금씩 쳐봤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박나 잘 놀았어. 롤라장도 갔다. 유행이었지. . 뒤로가기. 전영록의 불티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노래방에도 가고. 고등학생 땐 미팅하고 고수부지 가서 헌팅하고. 완전 날날이었네. 공부도 했어그게 고딩 문화였어. 디스코텍에도 갔고, 난 온갖 통속문화는 다 즐겼다. 대학가선 운동했지. 맞네. 80년대는 운동권이 대유행이었으니 그야말로 통속이네. 서강대 앞에 운동권들 가는 술집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지하에 아주 컸어. 밤새 투쟁가 부르고. ? 우산속? 우산속은 또 뭐야. 완전 제목 오글거린다. 우산속에서 뭘 어쩐다는 거야. 웅성웅성. 아 맞다. 우산속은 술집이 아니라 디스코텍이구나. 그녀가 끼어든다. 나는 나이트클럽 세대에요. 홍대앞 발전소 다녔어요. 우산속과 발전소가 마주보고 웃는다. 접시위에 단호박도 반달눈으로 스마일. 시큼털털한 수다를 마치고 매혹적인 '바깥에서'를 읽고  돌아오는 밤길. 문득 아주 통속적인 시가 읽고프다.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 같은. 벤야민의 여인과 오규원의 여자. 아름다운 언어가 낳은 두 여자.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詩集 같은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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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옥 / 오규원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올드걸의시집]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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