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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04] 상처의 철학 2 - 기억과 증언의 문제 (6)
  2. [2012.01.27] 아우슈비츠, 상처의 철학 (4)

상처의 철학 2 - 기억과 증언의 문제

[비포선셋책방]

# 사는 능력

아우슈비츠 수수용소에 들어가고 3-6개월이면 어김없이 죽었다. 몇 명은 살았다. 독일어를 몰라서 일찍 죽어간 자들도 많다. 단어 하나 배우기 전에 쓸려나간 것이다. (레비는 침몰당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책을 썼다.) 수감됐다고 다 희생자가 아니라면, 구조된 자들은 무슨 힘으로 살아남았는가. 동물성과 야수성이다. 이것이 있을 때만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았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오는 사례. 알프레드는 늘 깔끔하고 품위유지를 목숨처럼 여겼다. 남들과 다르게 처세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뤘고 특수임무를 맡았다. 앙리는 친화력이 좋았다.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등 약자의 위치를 전격적으로 취했다. 마치 애완견처럼 굴어 살아남았다. 사는 능력은 윤리와 존엄성 포기했을 때 도달했다.

# 권력 속성

카포는 나치친위대인 SS에 협력했던 앞잡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 온 사람 중 카포를 뽑았다. 내부를 다스리기 위한 지배전략이다. 피권력자에 속해 있으면서 권력자 행세를 하게 한다. 당시 가스실로 가는 사람들을 카포가 선별했다. 하지만 카포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가스실로 보낸다.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안 되므로 그도 반드시 죽는다.

어쩐지 익숙한 이야기. 나치의 권력시스템은 우리나라 기업의 구조조정 방식과 일치한다. 사장님이 직접 해고하지 않고 팀장 같은 중간관리자를 시킨다. 퇴출할 직원을 골라내게 하고 해고한 다음에는 머지않아 그 중간관리자를 내보낸다. 주위에 이런 경우를 당한 분을 보았다. 또 하나. 나치 친위대 SS에게는 가정에 충실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원들은 집에서는 자상한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삼성이 그랬다. 90년대 즈음, 기업문화 쇄신 운운할 때 직원들이 집에 일찍 가는 요일을 정하는 등 전사적 캠페인을 실시했다. 나치의 조직 매뉴얼을 입수했을까. 나치고 삼성이고 약자의 피로 돌아가는 권력시스템은 똑같은 모양이다.

# 자기유지

아우슈비츠를 체험한 자는 성찰하는 능력이 없다. 원래 체험한 자가 핵심적인 것을 말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고통을 직접 겪으면 기억작용이 장애를 일으킨다. 이것이 트라우마. 사유의 의도적 도피는 자기유지의 한 방식이다. 아우슈비츠 당사자인 레비가 부족하고, 지식인 아감벤이나 아렌트가 더 진실한가의 차원은 아니다. 당사자가 겪는 성찰에는 한계성이 있다.

기억의 문제는 곧 증언의 문제다. 그런데 증언은 믿을 수 없음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생존자가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세상에 그게 말이 돼요?”그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장벽에 부딪힌다.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들어주지 않는 거다.

나도 자주 쓰는 말. 김진숙 지도위원의 책 봤을 때, 장기농성장 이야기 들을 때, 맑스의 책을 읽을 때, 그 끔찍한 노동현실을 믿을 수 없어 한다. 사회면 흉측한 뉴스들. 학교폭력 가정폭력의 문제에 깊게 탄식한다.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는가?” 한숨 쉬고 탄성 속에 날려 보낸다. 어쩌면 습관적인 반응. 각자는 일상적인 자기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들어주지 않는 것이고, 그게 종합적으로는 지금 세상의 유지를 강고히 한다 

# 육체의 합리성

아도르노가 말한 개념 육체의 Ratio. 체험에는 근본적으로 사유작용이 따른다. 육체의 합리성이 들어가 있다. 행동의 사유적 성격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가해자들은 전범재판에서 말한다. ‘나는 모른다’ ‘명령을 따랐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저들은 사람이 아니래...’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육체의 이성을 거짓으로 만들고 자기가 배운 것(권위, 관습)을 선취하는 태도다. 그로 인해 거짓이 진실이 된다. 내가 믿는 게 진실처럼 되어버리는데 이는 자기유지 전략이다. 희생자는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을 위조한다면 가해자는 희생자보다 더 많은 앎이 가능한 상황이지만 명령수행일 뿐이다, 사실은 몰랐다고 자기변론 하면서 위조한다 

# 기억-증언의 불가능성

육체의 기억력은 방어기제가 없다. 육체의 어린아이성. 트라우마는 대상화할 수 없는 기억이다. 언어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구성된다. 기억될 것은 빠져나가고 내러티브화 할 것만 수렴된다. 기억술. 여기서 말의 욕망이 작동한다. 모든 이야기는 드라마가 되려는 속성이 있다. 이야기 자체의 내용이 맞고 틀림은 중요하지 않다. 말의 자립. 자동기술법의 작동. 이 때부터 내가 언어의 도구로 변해버린다. 언어 형태나 개념들에 의해 사유가 움직인다. 개념이 혼용되어 영향관계가 생기고 영향관계 속에서 나만의 경험이 중화된다. 특수성이 사라지고 보편성이 획득된다. 그로 인해 진실 같은 풍문이 형성되며, 개별적 진실은 그것에 의해 재단된다. 이것이 기억-증언의 딜레마, 불가능성이다.

내가 요즘 천착하는 문제다. 개별자의 고통. 말의 배반. 사회적 약자일수록 자기언어를 갖지 못한다. 자기 삶의 조건의 특수성가 개별성은 늘 범주의 보편성으로 통합된다.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의 충돌.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실 혹은 진심에서 멀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도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나의 슬픔이 그 무엇인가로 수렴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일반화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치 그들이 내게서 슬픔을 훔쳐가는 것만 같아서.”  

레비는 자신의 이름 지을 수 없는 불편함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격세유전적 두려움. 격세유전은 대를 걸러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 이유를 이 시대에서 아우슈비츠 안에서 아무리 논리적, 이론적으로 찾아봤자 불가능하다는 의미. 그 이유는 딴 데서 온다. 하나하나의 육체들이 결정적이다. 이들을 야만의 시대’ ‘나치의 시대 희생자등으로 집단화, 단순화 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언어의 위반적인 속성. 담론의 무례함이라고 할까 

우리들의 생리학과 병리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수용소에는 점진적인 병이라는 게 없다...아마도 세상의 의사들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 어떤 고통 때문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세상의 의사들은 위염이나 정신병을 치유해줄 수는 있다. (혹은 증상을 없애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불편함, 지금도 잠 못 들게 하는 어떤 이름 없는 불편함이 있다. 굳이 이름 지어 부르자면...격세유전적인 두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침몰당한 자들과 구조된 자들>


- 인문숲 김진영선생님 <아우슈비츠 혹은 상처의 철학> 강의를 듣고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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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상처의 철학

[비포선셋책방]

인간이 겪는 고통과 기억, 언어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 아직은 막연하다. 글쓰기수업 할 때 과제를 내주면 대부분 고통스런 기억을 긁어내 언어로 담아온다. 잘 안 담긴다. 흩어진 나날들. 자기로부터 객관화가 어려운 기억인데 털어버리고 싶을 때 알맹이 없는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빈 중심에 들어찬 진실이 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하여질 수 없는, 잊을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 삶에서 떼어버리고 싶지만 자기를 형성한 결정적인 부분인 삶의 어두운 이면들. 누구나 있다. 사회면에 나오는 흉흉한 뉴스들. 그 자체로 야만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일들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이 참 많이도 겪고 산다 

이 범람하는 고통 앞에서 나는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져보는 중이다. 공부를 하면 훌륭해질 가능성과 이상해질 가능성은 반반이다. 이상함이란 삶을 떠난 유려한 말의 성찬과 관념의 유희만 남는 경우를 뜻한다. 삶의 중력이 사람을 향하기보다 인식을 향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인식의 매혹은 그만큼 크다. 그래서 벤야민은 꿈을 꾸는 것만큼이나 꿈에서 깨어나기도 중요하다고 역설했으니. 나는 책에 탐닉하면서도 책을 내려놓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울러 늘 공부를 열심히 하고자 안달이면서도, 행여 열심히 할까봐 걱정도 같이 한다. 제때에 필요한 공부를 게으르지 않게 하기가 목표이며, 필요게으름의 척도가 나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아우슈비츠 혹은 상처의 철학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꼭 해야 할 공부라는 강력한 느낌이 왔다. 인문숲에서 김진영 선생님이 하는 강좌다. 아우슈비츠는 아감벤, 아도르노, 아렌트 등 현대철학에서 워낙 핵심적 키워드로 다뤄지고 있는데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 답답했다. 좋은 기회가 왔고, 역시나 기대이상의 수업이 진행 중이다. 첫 시간 첫 마디가 이랬다. “아우슈비츠 강의에 웬 여자 분이 이렇게 많이 오신 겁니까?” 반가운 듯 쓸쓸한 웃음을 지으시더니 약자의 문제이기에 여자가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3회 차 수업을 마쳤고 7회가 남았다. 혼자만 알면 무슨 재민겨 사상에 입각하여 배운 내용을 정리를 해보려 한다 

우선 증언의 문제. (너무나게 직접적인 책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것이 인간인가> 저자 레비의 증언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가지 중요한 사실. 첫째는 아우슈비츠의 목적은 집단학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인간됨을 남김없이 탈취하는 것. 탈인간화 시키기. 유대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명을 하는 게 목적이다. 둘째는 아우슈비츠는 나치만의 작업인가. 아니다.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학살 가담자가 50만에서 70. 당대 독일사회 전체가 가담해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무슬림. ‘무슬림이 되는 과정은 굶기의 기아의 과정을 따라간다...기아가 더 심해지면 종기들은 온몸으로 번져서 몸 전체가 흐르는 고름과 진액으로 덮힌다. 그럼 심한 설사가 시작된다. 이 때가 되면 수용자는 감각이 둔해져서...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고립상태에 빠진다. 걷는 일은 느려지고 보행법도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서 걷는 모습으로 바뀐다. 체온이 현격히 떨어져서 언제나 몸이 덜덜 떨리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멀리서 보면 마치 기도를 하는 아랍인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SS나 수용자들이나 모두가 그들을 무슬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신도 육체의 품위도 모두 빠져나가서 다만 숨 쉬는 뼈와 살만이 되어버린 존재다. 무슬림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아님의 경계에 선 존재다. 인간에 관한 모든 정의-개념 다시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물음표...

홀로코스트. 유대인 청소정치.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 그중 100만은 정치범, 집시, 동성애자 등. 수용소는 인간 조건이 무효화되는 곳. ‘인간과 인간 아님을 나누는 실험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가 나치만의 작업이었을까. 유대인 분리-추방-수송-수용-학살의 과정. 직접 참여자는 나치정당원, SS부대, 게슈타포 등이 있고 간접적으로는 군대, 경제산업단체. 수용소 짓고 부수고, 게토화 하고 추방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기간산업이 필요로 했다. 독일의 고속도로 정밀공업, 건축산업 등. 또한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식민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일반 공무원들. 유대인 문제로 도장을 한 번도 안 찍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식민정부와 경찰, 사무원이 마구 사인한 결과는 무엇이었나 

아카데미, 학자들은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인문적, 법적 이데올로기. (유신헌법처럼) 민족학, 종족학, 인간학 등이 유대인 학살에 동원됐다. 교회들. 교회에서는 나치에게 신도들의 인적기록을 제공하고 신도들에게는 면죄부를 팔아서 수익을 남겼다. 종교적 합리화 신의 뜻이라며 고해하면 용서해주는 방식. 그리고 일반인들. 앞 장 서서 고발한 이들. 사업경쟁자 옆집 가게 사람이 잡혀가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또 유대인 끌려가서 집이 비면 그 빈집이 독일인에게 제공되었기에 외국 살던 독일인 사이에 고향 회귀운동이 일어났고 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정권만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당대 사회 전체가 공장이었다. 저마다 이권에 따라 의무를 수행하고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집단범죄, 총체적 범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는 가스 살인 총 책임을 부여받았다. 가장 직접적 학살 행위를 저지른 자. 정신감정을 했더니 아주 정상적이었다. 사디스트적이지도 않고 질서와 자연을 사랑했다고. 커다란 권위가 부여한 업무에 열성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 전범자 재판받을 때 유대인들을 죽어야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질문 자체가 불필요하다. 나는 원칙대로 수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임무인데, 왜 인간성 문제를 끌고 오느냐는 식으로 자기정당화를 시킨 것. 임무의식 > 인간감정. 그에게는 인간성보다 임무가 중요했다 

참담한 확인. 아이들이 날마다 죽어나가는 우리 사회를 홀로코스트로 볼 때. 어떤 거대한 이 횡행하고 일반인의 삶까지 휘저어 놓는 원인은 교육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목고, 자사고, 자율고, 국제고 등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이득 취하는 교육관료들, 대학들, 학원재벌, 영어 특수를 노리는 업체들, 영어 유치원, 참고서 출판사, 일선 교사들. 그리고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의원들, 아동학자, 교육학자, 심리학자 등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주는 아카데미, 우리학교 전교1등 공부비법 전해주면서 무한경쟁이데올로기 생산하는 언론 등의 암묵적 동의하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단지 밥 먹고 살기 위해 성실하게 사는 생활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성찰 없이 행하는 일들이 세상을 살만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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