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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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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지는 손 / 심보선 하얀 손 창백한 손 흐린 초점으로 보면 사라지는 은하계 같은 손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는 소파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다 오랜 윤회 끝에 한 천 년 만에 이 자세를 되찾았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이 자세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손의 주인이 말을 한다 고마워 너를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연못처럼 고요하다 둘에서 셋 아니면 셋에서 넷이 되었겠지 그 정도겠지 왠지 이 방의 가구들은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다 부처가 방금 걸어 나간 적멸보궁 같다 이제 당신도 그만 나가보지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바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 자세 그대로 소파 위에서 이별을 반가사유하며 영원히 늙어가겠다는 ..
파랑도 / 이희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
심보선 시인 - 나의 시는 1.5인칭 공동체 언어다 “사실 시를 쓰면서도 열심히 시를 읽지 않았어요. 당시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친구가 저보다 시집을 많이 읽은 문학소녀였죠. 그 친구가 기형도 시집을 빌려주었어요. 그때 지하철 안에서 읽고 다녔죠. 꽤 여러 번 읽었어요. 그 이유가 뭐였냐 하면, 시집을 그 친구에게 돌려주면 바로 ’안녕’을 고할까 봐 ‘완독’을 미루고 있었던 거죠. 물론 그러는 와중에 빨리 돌려달라는 그 친구의 독촉 전화는 계속됐지만.(웃음) 그래서 아직 다 못 읽었다고 미루고 미루고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어요. 결국 돌려줬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퇴짜 맞았죠.(웃음)” – 기형도 20주기 기념문집 발간기념 좌담 중에서 남겨짐, 그 후 폐인되는 사람 있고 시인되는 사람 있다. 심보선은 시인이 됐다. 1994년 조..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초 사는 일에 미련이 없다. 없었다. 그말을 예사롭게 해댔다. 진심이었다. 자식 두고 죽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쯤이면 나한테는 생의 마지노선까지 다녀온 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죽음이 목전에 닿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팔자 좋은 말잔치같아 부끄러웠다.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아니다. 삶의 밀도가 중요하지 길이가 중요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명은 재천이니까 안달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나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전화할 때마다 ‘빨리 가고 싶다’는 시어머니의 말은 진심일까. 살고 싶다는 표현에 비가 새는 것이라 여겼다. 나는 죽어도 여한이 ..
먼지 혹은 폐허 / 심보선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8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 완벽한 인간과 완벽한 경구 따위는 식후의 농담 한마디면 쉽사리 완성되었네.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사랑의 계시가 어느날 임하여 시를 살게 하고 폐허를 꿈꾸게 하네. (그대는 사랑을 수저처럼 입에 물고 살아가네. 시장 하시거든, 어여, 나를 퍼먹으시게) 한생의 사랑을 나와 머문 그대, 이제 가네. 가는 그대, 다만 내 입술의 은밀한 달싹임을, 그 입술 너머 엎드려 통곡하는 혀의 구구절절만을 기억해주게. 오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꽃은 성급히 피고 나무는 느리게 죽어가네. 천변만화의 계절이 잘게 쪼개져, 머무를 처소 하나 없이 우주 만역에 흩어지는 먼지의 나날이 될때까지 나는 그대를 기억하리 - 먼지 혹은 폐허 / 심보선, 시집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