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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차오르는말들]

지난해 봄 글쓰기 공부를 하는 벗들과 남산에 올랐다. 열댓 명이 줄지어 20여 분 걸었을까. 벚꽃으로 점점이 수놓인 작은 연못 옆 너른 평상을 발견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든 것은 우리들이 일제히 두 손에 시집을 펼치고 나서다. 제목은 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 시인의 첫 시집이자 가장 뛰어난 시집으로 꼽힌다. 돌아가면서 마음에 드는 시를 한편씩 낭송했다. 이 순간과 맞춤하다며 누군가 을 골랐다.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병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 전문)

짧은 시다. 한자 한자 더듬듯 읽어 가는데 왜 그리 살갗이 간지러운가. 어쩌자고 가슴에 찌르르 파동이 일었다. 모두가 에 감염된 듯 뺨이 환해지는데 한 남성 학인이 물었다. 슬픈일좀, 있어야겠다가 무슨 뜻이냐고.

그로부터 얼마 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분노와 애통과 슬픔의 긴 강 돌고 돌아 다시 봄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슬픔도, 애통도, 분노도 농도가 점점 엷어져가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애도의 시간 잇고자 글쓰기 수업에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기로 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으로 시인·소설가·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한 사람씩 마음에 남는 문장을 읽었다. 한 학인이 소설가 황정은의 가까스로, 인간의 일부를 낭독했다.

얼마나 쉽게 그렇게 했는가.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지이잉 떨려오며 말이 끊겼다. 20대 후반인 그녀는 가까스로 낭독을 마치고 마저 훌쩍였다. 무에 그리 서러웠을까.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나는 이제 어른들은 왜 그래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가해자 덩어리에 어느 새 속해 있더라고. 그게 슬프고 미안하다고 했다.

대안학교 교사인 다른 학인은 아이들과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1년이 지났는데 뭐가 달라졌느냐고 학생들이 물을 때 또 다시 응답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이 봄을 견뎌야할 것이라고 글을 써왔다.

갑작스레 찾아든 봄볕에 마음 설레는 토요일 오후 2, 우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슬픔을 슬퍼했다. 박완서는 어른 노릇 사람 노릇(2009)에서 재난은 결코 악인과 선인을 골라서 덮치지 않는 데 있다. 그 완벽한 공평, 아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길 없는 철저한 불공평 때문에 재난이 무서운 것이다라고 했다. 정말이지 답답한 일이다. 왜 하필 삼백명의 아이들인가 생각하니 너무도 미안하고, 그 꽃다운 아이들의 죽음을 잊고 사는 삶이 슬프다고 너도나도 말했다. 실컷 이야기를 나누자 마음은 묵직했지만 나로 사는 것 같았다. 세월호 1주기. 늘 그렇듯이 전문가들의 토론회는 있어도 일반인의 자리는 마땅치 않다. 차분히 사건을 되새기고 아픔을 곱씹고 두서없이 슬퍼할 수 있음에 그날 우리는 감사했다.

슬퍼한다는 것. 그건 온전한 내가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느낌이 오고 감각이 돌면서 존재가 열리는 상태. ‘슬픈일좀, 있어야겠다고 그래서 시인은 노래한 게 아닐까.

 

* 한국방송대학신문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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