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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전태일을 기록하며

[은유칼럼]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모인 글쓰기 수업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면, 그의 생애 만큼이나 뜨겁고 척척한 말들이 오간다. 감응의 지점이 세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60대는 ‘신발에 물이 새지 않으면 다행인’ 찢어지는 가난에 좀 더 공감하고 40~50대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는’ 집요한 싸움에 반응한다. 20~30대는? 가장 열렬하다. 전태일이 그리는 생생한 노동 현장 실태에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급 받아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전태일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먹고 살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이 서울로 몰린다는 것도요.” “노동력으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는 문장이 팍 와 닿아요.”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 시간이 다 될 때이다.’ 이 대목 읽으면서 진짜 제가 쓴 줄 알았어요.” 


전태일은 48년 생. 살아있었다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책에 나오는 수기는 1960년대 후반에 쓴 글들이다. 무려 오십년 전 어느 노동자의 참담한 수기를 ‘요즘 젊은이들’이 지루해하면 어쩌나 하는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무지와 편견이었다. 마르크스 말대로, 어떤 노동자가 어떤 자본가를 만나느냐는 우연적일 수 있지만 전체로서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만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법. 전태일의 평화시장이 그들에겐 편의점이고 사무실이다. 완장 찬 작업 반장 대신 CCTV가 감시할 뿐, 사람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 보는 현실은 너무도 닮았다. 


며칠 전 수업 때다. 머리카락 희끗한 어느 남자 학인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무슨 예언처럼 이런 말을 보탰다. “전태일은 기록이 남아 있고 분신을 해서 후대에 알려졌지만 아마 그 당시 전태일 만큼 열심히 싸운 다른 노동자가 또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난 거짓말처럼 어느 노동자의 ‘부고’를 들었다. 


경기도 시흥의 스피로폼 파쇄업체에서 한 노동자가 파쇄기에 상반신이 끼어 압착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그는 이미 25세에 공단지역에서 일하다가 프레스 사고로 손가락 4개를 절단한 산재노동자이고, 그 사건을 계기로 수지 접합 산재노동자들을 돕는 일에 15년 간 종사한 활동가였다. 4년전 베트남인 여성과 결혼해 3살, 5살 두 아들과 다문화가정을 꾸리며 일상을 일궈가던 중 참변을 당한 것이다.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사례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201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다룬 매체는 <한겨레>와 <민중의 소리> 두 곳 뿐이었다.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바둑 대결이 생중계 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기계가 사람을 삼켜버리는 영세 사업장의 무참한 현실은 뉴스가 되지 않았다. 아마 페이스북을 열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일이다. 이십대에 손가락 네 개를 잃고 사십대에 온 몸이 찢긴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진다.


기억할 것 많은 4월, 기억 하나 더 얹는다. 남현섭(1967~2016). <전태일 평전>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쓴다. 기록되지 않는 전태일의 죽음을 기록한다. 다음 수업에 학인들에게 읽어줄 것이다. 이 찬란한 봄에 그가 꾸었던 소박한 꿈을.


‘자연이 연출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그리고 상상하고 있노라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 때까지 이렇게 몸과 마음이 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6일 '건강한 노동세상 소식지'에 고인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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