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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1] 무심한 구름 / 허수경 (8)

무심한 구름 / 허수경

[올드걸의시집]


한--, 청평쯤 가서 매운 생선국에 밥 말아먹는다
내가 술을 마셨나 아무 마음도 없이 몸이 변하는 구름
늙은 여자 몇이 젊은 사내 하나 데리고 와 논다

젊은 놈은 그늘에서 장고만 치는데
여자는 뙤약볕에서 울면서 논다
이룰 수 없는 그대와의 사랑이라는 게지!
시들한 인생의 살찐 배가 출렁인다
저기도 세월이 있다네 일테면 마음의 기름 같은 거

천변만화의 무심이 나에게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이 몸을 치유시킬 수 있을랑가
그때도 그랬죠 뿔이 있으니 소라는 걸 알았죠
갈기가 있으니 말이란 걸 알았죠
그렇다면 몸이 있으니 마음이라는 걸 알았나

생선죽에 풀죽은 쑥갓을 건져내며
눈가에 차오른 술을 거둬내며 본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



-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집>, 문학과지성사



하루 참 길다. 비가 내려 집에 갇혀지냈다.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가 비가 들이치면 닫았다가 바닥을 닦았다가 걸레를 빨았다가 화장실에 간김에 세면대를 닦았다가 세수랑 양치를 했다가 책상에 앉았다가 뉴스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커피를 내리다가 밥을 차리다가를 서너번 반복했다. 기계적이다. 사각으로 된 집안을 미로찾기 하는 것처럼 요러조리 돌다보니 밖이 캄캄하다. 비오는 휴일엔 집이 감옥이다. 빗발이 창살이고, 자식들은 나를 감시하는 간수다. 특히 딸내미. 참새처럼 떠들어 귀여운데 그 재롱이 길어지면 고문이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어도 와서 그림을 들이민다.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크게 가고싶은 곳도 없고. 다만 말 안하고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인데 '고독의 권리', 그러니까 은신처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게 싫다. 밝은방. 다 드러난다. 식구들 잠든 시간. 겨우 되찾은 어둠에 살 비비는 심정으로 심야를 맞는다. 

웬 글을 그렇게도 많이 썼을까. 일주일 동안 그 생각을 했다. 하나마나한 말들. 나에겐 절박해도 남에겐 크게 중요치 않은 사건들. 누구도 궁금해하지도 않은 이야기. 끊임없이 세상을 대상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참 많이도 떠들었다. 그 아득한 정념과 도취. 한바탕 꿈같다. 뱃살처럼 출렁이는 글들. 응시하고 만져보고 두드리고 늘여보고. 기름기처럼 떨어지지 않는 그 집착들. 그 언어화된 흔적들이 괜히 꼴도 보기 싫었으나 그것이 내 삶을 지켜주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해본다. 여자의 똥배가 자궁을 보호하듯이 말이다. 쓰지 않았으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 서른 이후 생에 대한 애도작업이었으려나. 슬픔을 잘 떠나보내기 위한 몸부림. 돌이켜보면 글뿐만이 아니다. 삶이 총체적으로 그랬다. 무목적성. 무계획성. 무시간성의 환상적 구현. 뭘 그리도 만날 쓸데 없는 일을 하느냐는 핀잔을 가까이는 엄마와 남편에게, 이따금씩 오랜만에 만나는 벗들에게 듣고 살았다. 

쓸 데 없음의 결정판을 이루려고 지난 목요일엔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3차 희망버스 떠나는 날까지 열흘 전부터 240시간, 240인이 일인시위를 했는데 마침 장소가 숙대입구역에서 가까웠다. 연구실 근처라서 나도 신청했다. 낮동안 괜찮더니 오후7시무렵 부터 억수같이 비가 퍼부었다. 저녁에 일인시위 동지랑 숙대 근처 고대앞 스러운 허름한 주점에서 만났다. 파전에 막걸리 한통 비우고 건들건들 슬리퍼 끌고갔다. 밤 10시부터 11시. 앞이 안보이는 빗속. 피켓 들고 우산 들고 한 시간을 서있었다.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산 죄값. 팔 아프게 반성했다. 11시부터 12시까지는 동지의 일인시위를 지켜보고. 12시부터는 발 잠기는 폭우에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렸다.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사라지는 검은 차의 행렬.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아니라 빈차없는 세상. 졸짜증.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는 시절. 그저 하루하루 쓸데 없는 짓으로 건너간다. "삶 속에는 비만 내리고 나는 육체를 우산 삼아 그 빗속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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