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 - 여성의 집단기억 봉인 푸는 페미니스트

[행복한인터뷰]

한겨레 박승화

 

새까만 눈동자에 설핏 물기가 오르곤 한다. 소행성B-612호에서 온 전령사처럼 짧은 곱슬머리, 날렵한 재킷에 긴 스카프를 둘렀다. 호쾌한 웃음과 수다에 열띠다가도, 갓 난 송아지처럼 물끄러미 보다가 고인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하여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함석헌은 말했던가. 초점을 잃고 사라지는 사물들을 지나 눈물렌즈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세계를 향한 그리움일까.

언어 대신 상징으로 답을 청했다. 그녀가 가방에서 타로카드를 꺼냈다. 옥빛 융단이 깔리고 동그란 카드가 몽글몽글 흩어진다. 잰 손놀림이다. 78장의 상징화. 구상과 서정추상 사이 평평한 그림들, 압도적 느낌들. 태초의 그날처럼 삶이 가득하다. 거기서 카드 두 장을 찾은 그녀가 신분증 제시하듯 멋쩍게 내민다. 생년월일에 따른 별자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타로카드가 있다. 그녀의 상징은 현자(Crone)와 달(Moon)이다.

하느님이 남자예요? 누가 그래요?

“현자는 밖으로 확장하고 추진하기보다 내면 성찰적인 성향을 의미하고, 달은 무의식을 뜻해요. 아마 저한테 외향적이지 않은 면이 있는 거겠죠.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무의식에 한번 가닿아보고 싶어요.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윤상은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다. 1992년 자원활동가로 시작해 2012년 소장 임기를 마쳤다. 20년 장강 같은 세월, 깊고 짙은 인연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991년에 생겼다. 이미 마련된 반성폭력운동의 장에 그녀가 몸담은 게 아니라 그녀의 몸에 반성폭력운동의 장이 형성된 셈이다.

스무 살 어느 봄날이다.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물음의 씨앗이 강의실로 날아들었다. 필수교양 과목인 기독교문학 시간. 서른셋 젊은 나이에 교수로 부임해 화제가 된 현경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여러분. 하느님이 남자예요? 그럼 자지가 있어요? 본 사람 있어요? 하느님이 백인이에요? 누가 그랬죠?” 당시는 빈곤과 인간 소외를 핵심으로 한 해방신학, 남성 위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생태여성신학 등 새로운 기독교 신학운동이 활발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새내기 대학생은 가슴이 뛰었다. 기존의 상식을 이탈한 ‘다른 목소리’는 고정관념을 신나게 흔들었다. 인식만 파격이 아니라 인디언처럼 머리를 길게 땋은 외모도 신선했다. 교수에게 느낀 발작적 존경심은 지식과 진실에 대한 열정의 불을 제대로 지폈다. 전공인 교육공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철학과 복수전공을 택했다. 숨통이 트였다.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는 그런 공부가 좋았다. 철학과 조교 언니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마저 빛나 보였다. 평범한 것보다 색다른 것, 응용학문보다 순수학문에 관심이 기우는 자신을 보고 느꼈다. 매우 실질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가슴 깊이 겉멋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귀인은 또 한 번 나타났다. 대학 4학년 때 교양여성학 특강에 초대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정경자 선생이다. 이번에는 ‘다른 수준의 육체적인 것’의 물음이 던져진다. “여러분 중에 성폭력 피해를 받아본 분 손 들어보세요.” 학생들은 잠잠했다. 강사가 말하기를, 저는 피해가 많은데 여기는 한 분도 없으시냐고 하더니 강의를 이어갔다. 성폭력이란 극단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서적·언어적 폭력을 포괄한다고, 성폭력 공포 때문에 배낭여행을 못 가고 밤에 외출을 못하는 것과 같이 일상을 옥죄는 것도 피해의 범주에 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 있느냐고 다시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윤상의 손도 스르르 올라갔다.

운전면허 취득 10년 걸린 까닭은

윤상은 딸 셋의 장녀다. 첫째에 대한 기대와 지원을 받았고 자매끼리 자라서 별다른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다. 아버지는 아들과 테니스 치는 친구가 부럽다고 말했다. 딸이랑은 못 칠 게 뭐 있겠느냐며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테니스를 배웠다. 어느 날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등 뒤에서 갑자기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어떤 남자가 순식간에 뒤에서 몸을 만졌다. 소녀 윤상은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쫓아가지도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뒤에서 뛰어오던 그 남자는, 소녀의 앞을 가로질러 무심한 보폭으로 유유히 걸어갔다는 점이다. 벌건 대낮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입 시험을 치르자마자 고3 겨울방학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교육과정 막바지에 담당 강사가 결근해 젊은 남자 강사가 대타로 들어왔다.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어쩐지 오싹했다. 강사는 차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수강생은 수동적인 상황에 처한다. 아니나 다를까, 강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은근슬쩍 허벅지를 만졌다. 끝나고 뭐해? 커피 한잔 할까? 툭툭 손가락으로 찔러보듯 말을 건넸다. 그 시간이 천년만년같이 길었다. 이후 그 강사와 마주칠까 노심초사하며 간신히 학원을 다녔다. 운전면허시험을 봤지만 출발하자마자 떨어졌다. 그때부터 발길을 끊었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기득권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 자기 기회를 10년씩이나 유예하겠어요. 그건 삶 속으로 어마어마하게 깊숙이 들어와서 찌르는 경험이에요. 또 갑자기 성폭력을 당하면 극심한 공포를 느껴요. 얼어붙은 공포(Frozen Fright)라고 하죠. 이런 경험이 여자와 달리 남자는 일상적이지 않으니까 공감하기 어려워요. 특히 판사 같은 남성 법조인은 더 몰라요. 그러니까 그때 왜 저항 안 했느냐, 왜 소리 안 질렀느냐, 말만 했어도 넌 구제됐을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경험에 이름이 붙지는 않는다고 윤상은 말했다.

“저 같은 피해 경험이 과거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아이들도 알지만 그땐 무섭고 두렵고 뭔가 이상해서 엄마한테도 말 못하고, 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거죠. 그게 몸의 기억인데 그 불쾌함, 기분 나쁜 기억이 망각 회로에 갇혀 있다가 그날 강의를 듣고 나서야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예요.”

이것이 ‘명명의 정치학’이다. 윤상이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꺼내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맞아 나도 그래” “그런 적, 나도 있어”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렇게 여성이라는 하나의 큰 범주가 공통적으로 갖는 경험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정치적인 일 아니겠는가 묻는다. 여성의 피해를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일로 만들거나 무화하려는 가부장 권력에 맞서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더없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이 모든 구조적 모순과 대안적 인식을 획득할 수는 없었지만 강의를 듣고 나자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보통의 경험 보통의 여성을 위한 단체임을 알았다. 자원활동가를 환영한다는 강사의 말에 용기를 내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하루씩 출근했다. 언론사에 팩스 보내기, 사서함에서 우편물 찾아오기 같은 심부름을 하고 어깨너머로 실무와 언어를 익혔다. 1994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서명을 받았다. 때로는 법원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간이 오그라들고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배짱을 두둑이 키웠다.

대학원에서도 고난도 ‘실전 훈련’은 계속됐다. 학부 때부터 오매불망 동경해온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무엇 하나 간단치 않았다. 읽어야 할 책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쏟아지는 말도 죄다 어리둥절했다. 너 이성애자니? 결혼은 왜 하는데? 그거 진짜 네 생각이야? 등등. 매사 문제제기를 하는 친구들과 부대끼고 토론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자기를 하나하나 설명해내야 했다. 성 정체성은 다양한데 내가 이성애자인 게 고민 없이 된 것 같고, 이성애자여서 미안하다 할 수도 없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성찰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삶을 살아내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혈기왕성한 20대여서 버틴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의 딜레마 해결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통과됐다.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더니 월급 40만원이 웬 말이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로 정식 출근했다.

그렇게 페미니스트 생활인이 되다

시인 김수영은 평소 후배 문인들에게 독서와 생활을 혼동하지 말라고 이르곤 했다. 독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이라는 게 시인의 지론이었다. 어디 문인에게만 해당될까. 잘 익히고 잘 살고픈 이들이 직면하는 과제였다. 윤상도 그랬다. 20대까지가 온갖 금기와 상식에 도전하는 사유를 받아들이는 시기였다면, 30대로 들어서면서 현장에서 난제를 풀어가며 일상을 뚫고 나가는 시기가 도래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윤상의 생활난(生活難)’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과 소장으로 일하는 동안 본격화된다. 크게 꼽자면 세 가지다. 돈과 사람 그리고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통념.

우선 돈. 윤상이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자리를 제안받고 가장 망설인 이유다. 활동가 12명의 급여를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일하려면 후원회원을 관리하고 크고 작은 기부를 끌어내야 한다. 아무리 명분이 정의로워도 돈 부탁이 쉬울 리 없다. 원체 성격도 소심하다. 그런데 소장이 되고 나자 “급해지면 별짓을 다할 수 있구나”를 알았다. 직·방계 가족은 물론 엄마 친구, 먼 친척에게까지 후원회원 신청서나 1일주점 티켓을 ‘넙죽’ 내미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세대재단의 전문가를 초빙해 교육도 받았다.

“전도랑 똑같대요. 대뜸 교회에 가자는 게 아니라 장기 계획을 세우고 평소 관심사를 살피다가 적기를 택해 요구하라는 거죠. 만약 거절당해도 그건 상대방의 몫이지 내 잘못이 아니니 상처받지 말라고 하고요. 우리는 성공사례 나누기랑 스티커 그래프 붙이기도 했어요. 먹고살려면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해야 돼. (웃음)”

이 대목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낸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기엔 좀 이르다. 윤상에게 사람 문제는 돈 문제보다 더한 자기초극을 요했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위계 구조다. 시민단체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을 지향한다. 조직의 효율성을 얻으면서도 민주적인 조직을 실험하지만 모든 것이 매뉴얼화될 수는 없는 노릇. 의사결정 방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에 고충이 컸다. 활동가가 그만둔다고 하면, 윤상은 ‘내가 잘못한 거 같다’며 사과하곤 했다.

“안 흔쾌하죠. ‘에라, 네가 다 해라’ 이 말이 여기까지 차오르지만 꾹 참아요. 하하. 정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사과만 하는 거 같았다니까요.”

이게 다 인과응보라고 여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입 활동가 시절 최영애 소장과 일했는데, 자기 역시 소장에게 왜 맘대로 결정하느냐고 사사건건 따졌다. 소장을 미워한 걸 뒤늦게 반성한다며 자숙 모드로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제아무리 대인배 소장을 지향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특히 자신을 저임금으로 노동자 부려먹는 고용주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설움에 복받쳐 기어이 입을 뗀 적도 있다. “나, 너네들이랑 똑같이 적은 월급 받고 일하거든. 나도 피고용인이거든.”

씻을 수 없는 고통 아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 생존자와 직접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고통받는 이들과 상담하고 일을 처리하는 건 활동가다. 각자 맡은 사건과 피해자가 백이면 백 전부 경우가 다르다. 그럴 때 동료들끼리 동료상담(Peer Counselling)을 한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너 이게 힘들구나, 이런 상태구나 얘기해준다. 일이 너무 바빠 서로 얘기할 시간이 없으면 두 배로 힘들다. 어려운 사건을 승소하면 되게 기쁘지만 승소 이후에도 힘든 일은 끝나지 않는다. “술이 필요한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특히 언론의 성폭력 관련 보도 행태는 늘 안타깝다.

10년 전쯤 활동가 시절, 윤상은 기자들에게 이런 전화를 받았다. 여름이라 피해가 많죠? 20대 여성이 여름에 과다한 노출을 하고 다녀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여기에는 남자들의 성욕은 불가피하다는 가부장제의 논리가 깔려 있다.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은 것, 노래방에 가서 춤춘 것, 밤에 귀가 안 한 것 등을 전부 성범죄의 구실로 삼는다. 몇 년 전, 한 일간지에는 성매매를 단속해서 성폭력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기사도 실렸다. 성매매를 막으면 여염집 여자가 피해를 입는다는 발상은 여자를 마리아 아니면 창녀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다.

“성폭력은 대개 계획된 범죄예요. 자기가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르거든요. 매사에 당당하고 내일 기자회견 할 수 있는 여자를 선택하지는 않죠. 근데도 사람들은 성폭력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언론 보도도 그래요. 조두순 사건 같은 것만 성폭력 피해의 전부인 양 부각시키죠. ‘성폭력 피해는 무조건 씻을 수 없는 상처래.’ 말해주고 싶어요. 씻을 수 있거든요! 죽지 않거든요!”

갈 길은 멀다. 윤상은 그간 수많은 자리에서 강의하며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바꾸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성희롱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도 어느덧 15년이다. 그런데 관례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으로 의식을 바꾸기에는, 100년쯤 뒤면 모를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더군다나 포털 사이트에는 날마다 성폭력 관련 기사가 최고의 페이지뷰를 기록한다. 극단적인 사례 위주로 보도되다보니 집·직장·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건은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사이코패스’만이 아니라 ‘멀쩡한’ 가해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사회적 학습 기회가 마련되지 못한다.

“저를 포함해서 활동가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요. 선정적 보도 태도 때문이죠. 피해자가 주어가 될 때조차 아이의 피해를 그렇게 낱낱이 알려야 하는지 안타깝고, 얼마나 죽지 못해 고통스러운지를 부각하는 방식도 참 나쁘고요. 피해 당사자가 나서서 언론에 발언해야 하는데 안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편견과 비난에 대한 걱정 없이 힘들고 아팠던 걸 말할 수 있으려면, 당사자 발언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사회가 되어야겠죠.”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유일한 사람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임기를 마치고 1년간 꿀맛 같은 백수 생활 뒤에 얻은 새 명함이다. 계약직 공무원 신분으로 시청에서 근무한다. 유리 건물의 ‘온실효과’에 따른 여름철 무더위만 아니라면, 일할 맛 난다. 급여 수준이 양호해졌다. 첫 월급을 받고는 감격스러워 휴대전화 카메라로 통장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을 정도다. 가난한 활동가들과 만났을 때 술값과 밥값을 내는 것으로 부의 사적 재분배에 기여한다. 하는 일은 서울시 유관기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성희롱 등 인권침해 관련 민원 처리인데, 윤상은 또 눈이 커지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직장여성 잔혹사의 구조와 원인 및 대처 방안을.

아이들은 가족, 친·인척, 선생님 등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는다. 가족관계를 벗어나는 성인들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다. 어린아이한테는 부모가 생존권이고, 성인은 직장(상사)이 생존권이다. “성폭력은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여성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더럽고 불쾌한 경험들.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야, 라며 회자되는 일들. 회식 때 주물럭거리던 남직원은 이튿날 당당히 출근하고 여직원은 아프다고 휴가를 낸다. 우울증 약을 먹고 직장을 다니거나 급기야 사표를 낸다. 직장여성의 아픈 역사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명명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데, 여전히 대다수는 당하면서도 참고 산다. 윤상이 제안하는 해법은 ‘말하기를 통한 연대’다. 직장 내 성희롱도 상습범이 정해져 있다. “한 놈이 또 한다.” 피해자가 다수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작 피해 여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당하고도 어디다 말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김 과장만 땡큐다”.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데 모든 여성이 얘기하지 않아. 아마 국가정보원도 이만큼 보안 유지는 못할걸요. 평소에 시시콜콜 잡담하면서도 성폭력 얘기는 빠지거든요. 무겁게 얘기하자는 게 아니라 공통의 경험이라는 걸 공유하자는 거죠. 일상에서 여성 연대가 필요하고, 연대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시민인권보호관도 관계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만나는 자리다.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윤상은 절절히 세세히 목도했다. 담당 사건이 잘 해결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밀스러운 자기 언급 뒤에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별일 없이 살지 못하는 사람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데가 없거나 말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논리적·합리적·이성적 잣대에 걸려 미끄러지는 말들. 그걸 더 온전히 듣기 위해 윤상은 타로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한다. 철학이나 타로나 사람들 삶에 관계된 질문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본디 상징은 로고스의 독점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 고도의 상징화인 타로카드를 통해, 로고스의 독점을 해체하면서 열리는 자유의 공간, 말씀이 아닌 목소리가 활개 치는 시간을 향유하는 것이다. 윤상은 시민인권보호관이 되고 얼마 뒤 워크숍에서 동료들의 타로점을 봐주어 인기를 끌었다. 사람 사이 벽을 허물고 말을 나누고 마음의 화평을 돕는 좋은 매개로 삼는다.

윤상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페미니스트 동지들이다. 징한 관계다. 울고 웃고 지지고 볶다가 정들고 철든다. 이를 두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이고,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라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윤상은 두 글자로 ‘성불’(成佛)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나 활동가를 구할 때 써먹기도 한다. 이 자리가 돈이나 명예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임기를 마치고 나면 성불할 수 있다고. 그러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별로 성불하고 싶지 않다고.

“사실 성불은 모르겠고 소장 하고 났더니 세상에 무서울 게 없고 못할 일이 없어졌어요. 일이 힘들어서 피폐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사람은 중도 하차하죠. 희망이라는 고문을 꽉 붙잡아야 해요. 인간에 대해서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돼요. 소장 할 때 인터뷰하면 무슨 힘으로 일하냐고들 많이 물어보던데, 힘은 딱 하나예요. 동료밖에 없어요.”

의사소통이 되는 존재.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이 사회의 아픔을 깊이 바라보고 통찰하는 존재. 그들이 있어서 뭐라도 도모해보고 있으니 그런 밑천을 가진 건 “나의 대단한 재산”이라며 으쓱해한다.

가만히 응시하면 보인다. 능히 겨워서 웃을 때도, 못내 치밀어오를 때도, 몸소 서러워 말할 때도 잠시 잠깐 무엇이 어룽거린다. 그럴 것이다. 이 세계의 남루함을 삶의 신비함으로 변환시키는 장치가 신체 어딘가 장착돼 있어야 인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윤상에게는 그것이 눈에 어린 물빛이 아닐까. 어느 시인도 “아무 병(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고 봄을 노래했으니….

 

 

* 2014년 4월호 한겨레 사람매거진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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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 2차 피해자 해인 -"성서비스노동자의 성폭력 고통, 외려 커요"

[행복한인터뷰]

한겨레 박승화

 

더한 고통, 덜한 고통이 있을까. 같은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해도 내가 의미하는 고통으로 너는 이해하지 않는다. 고통은 서로의 상태를 비교하도록 허용되는 체험이 아니다. 영혼의 경험이다. 윤동주의 시구대로 “늙은 의사가 젊은이의 병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내재적이고 전달 불가능하며, 그래서 비교 불가능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쉬이 비교당한다. 장소, 시간, 수법 등을 따져 육체적 경험으로 여기고 고통의 양을 객관화한다. 안방에 침입한 괴한에 의한 아동의 피해와, 모텔에서 일어난 유흥업소 종사자의 피해는 같은 성폭력이라도 달리 간주된다.

이해받는 고통, 의심받는 고통은 있다. 정숙한 여자와 타락한 여자라는 사회적 척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인(가명)은 후자의 경우다. 사건 직후 여성긴급전화에 요청했을 때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도 도리어 고약한 의심과 핀잔의 말을 들었다. 성폭력과 성노동은 엄연히 다른 범주이지만 누구도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다. ‘예/아니요’만 통하는 사법적 언어로는 피해사실을 낱낱이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의 불능 상태에서 보낸 3년. 자기언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해인은 고통의 독특한 존재방식으로 인해 철저히 고독했다.

“그 키스방 건인가봐?” 한 형사가 지나가면서 툭 던진다. 서울 강북경찰서 형사팀. 사무공간에 칸막이가 없다. 남자 형사 앞에서 피해를 진술하기도 수치스러운데 현장중계하는 꼴이다. 창피함에 목소리가 작아지자 담당형사는 크게 말하라고 다그쳤다. 바로 옆자리에는 업주가 앉아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나서 “손님하고 2차 나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뻔뻔스럽게 말하던 자다. 1만원짜리 몇 장까지 쥐어주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뒤, 해인은 업주를 성폭력으로 고소했고, 키스방 업소의 불법 성매매 알선에 대한 처벌 의사를 밝혔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는 성폭력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를 가만두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업주는 조사를 받으며 시종일관 ‘그런 적 없다’로 응수했다. 외려 해인더러 돈을 요구하며 성매매한 여자라고 주장했다. 키스방 종업원들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적이 없고 다들 자발적으로 하는 거라며 거짓 진술을 일삼았다. 업주는 친구까지 대동하고 조사를 받으러 왔다. 해인은 기가 찼다. 서러운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신뢰관계인도 없이 혼자 왔는데 가해자는 친구를 데려올 수 있는 일이구나….’

사방에서 옥죄는 남성의 시선들. 그 속에서 해인은 털 뽑힌 참새처럼 작아질 대로 작아졌다. 담당형사는 얼굴도 보기 전에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합의하실 거죠?” 대질심문 때문에 조사받을 때는 “증거가 없어서 처벌 안 돼요. 어차피 불기소예요”라고 했다. 마지막 남은 존엄의 깃털마저 뽑아버린 결정적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보통 다른 여성들은 피해 상황에서 상처를 입더라도 저항하기 마련인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조사 말미, 업주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사과를 하였고 고심하는 해인에게 형사는 메모지에 적어서 보여주었다. “어차피 불기소이니 사과를 받으세요.”

“저는 공황상태에서 온전한 판단력도 갖기 힘든데 계속 불기소를 강조하는 건 처벌 의사를 꺾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또 몸에 상처가 남을 때까지 반항했어야 한다는 담당형사의 말은 정조를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내가 불리하구나. 어떤 말을 해도 모텔까지 따라가놓고 성폭력 운운하는 여자의 횡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싶었죠. 암담하더라고요.”

단순히 젠더 감수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건 직후 여성 상담원에게는 “그 나이 먹고 모텔까지 따라갔느냐”는 말을 들었다. 해인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갔다. ‘과연 나의 경험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퇴근길, 해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연체 이자를 송금했다. 하루라도 입금이 연체되면 다음날 타격이 크기 때문에 늘 조마조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참고서나 옷 한 벌까지 얻어 입고 자랐다. 테이크아웃 커피조차 사치였다. 검박한 생활의 결과물은 엉뚱한 데로 고스란히 새나갔다. 월급 전액이 원금 상환은커녕 사채이자를 메우는 데 들어갔다. 아버지의 두 차례 투자 실패로 인한 뒷감당은 해인 몫이었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억울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빨리 부채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 전화로 문의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면접을 보러 오면 알려준다고 했다. 업주는 해인을 보더니 화장을 하지 않았다며 탐탁지 않아했다. 여기서 일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특별히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비좁은 방. 소파 옆에는 휴지가 있었다. 업주는 말을 바꿨다. 이곳은 무늬만 키스방이지 대부분의 손님은 성매매까지 원하니까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기본 시급만 받아서는 돈벌이가 안 되고 성매매를 해야 팁을 받을 수 있고 지정 손님도 생긴다는 거였다. 해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하루만 일해보고 결정하라고 권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손님이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범벅이 된 채 성관계를 시도했다. 해인은 중간에 뛰쳐나왔고 업주는 어르고 달래고 협박했다. 손님 비위를 안 맞추면 어쩔 거냐, 환불을 요구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실랑이가 벌어졌다. 해인은 대기실로 와버렸고 대기실에 있던 최연장자가 대타로 투입됐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의 이중고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업주는 단속에 대비한다며 일하러 온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강요받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각서를 받아서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부당함도 참기 힘들었다. 하루쯤 경험으로 여기겠다고 말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업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거기에 있어보라고 다른 데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자신은 이런 데서 일하는 여자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온갖 감언이설로 위로하고 다독였다. 캄캄한 새벽길. 업주는 집에 데려다준다며 동행하더니 모텔촌으로 향했다. “비도 맞고 늦었으니까 씻고 쉬고 가라.” 그 말을, 수면 부족과 피로감에 지친 해인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모텔에서 ‘풀려나기까지’ 4시간이 걸렸다.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사비네 여인들의 강간>에 나오는 여인처럼 해인의 몸은 심각하게 꺾였다. 손을 아무리 내저어도 허공엔 잡을 것이 없었다. 한 마리 사나운 말처럼 돌변한 업주는 말발굽 같은 성기로 몸의 중심을 짓눌렀다. 화폭의 남성이 손에 칼을 쥐고 있듯이, 업주는 맥주병을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남성의 동물적 폭력성의 파괴력은 그림의 안과 밖에서 조응했다. 평생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던 피카소와 살았던 두 여자, 마리 테레즈 월터와 자클린 로크는 자살했고, 반나절 몸 들인 유흥업소 업주에게 성폭력을 당한 해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동의하지 않아도, 밤은 온다. 사채이자처럼 꼬박꼬박 밀려오는 밤. 해인은 밤마다 울부짖었다. 성노예처럼 취급당했던 새벽의 시간이 되면 ‘기억의 폐수’(최승자)가 흘러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자살충동이 심하게 밀려올 때는 차라리 살인계획으로 전환시켰다. 죽어야 될 자는 내가 아니라는 억울한 심정에 가상의 복수극을 펼쳤다. 복수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읽고 대리만족을 느꼈다. 신변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 가방에 넣고 다닐 전기충격기와 가스총 같은 ‘무기’를 찾아다녔다. 택시를 탈 때, 가방에 무기가 없으면 근처 만물상점에서 식도를 사서 탑승하기도 했다.

“정말로 무기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더 편하다기보다, 반항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조사 과정의 추궁에 따른 후유증이었죠. 그날 조사받다가 이대로 더 가다간 나만 만신창이가 되겠다 싶어서 바로 고소 취하장을 제출했어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이 증거가 될 수 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법에 무지했죠. 지금도 고소를 취하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 수사기관에 신고한 것 자체를 후회했으니까요. 영화 <공정사회>의 결말처럼 사적인 복수를 택하는 게 현명하진 못해도 한심스럽진 않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2차 피해는 없었을 테니까요.”

고독한 이빨을 갈고 있는 살의, 아니 그것은 사랑

국가기관에 의한 2차 가해를 두고 “성폭력보다 더 고통스러운 폭력”이라고 해인은 말했다. 지금과 달리 2010년만 해도 성폭력 사건은 별도의 밀폐된 공간에서 여경에게 조사받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해인에게 원스톱지원센터의 존재나 신뢰관계인이 동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지해주지 않았다. 현재 시행 중인 증인지원관이나 피해자 국선변호사 같은 피해자의 법적 권리를 위한 제도는 기소 이후 상황에 해당한다. 기소 이전 경찰 조사 단계에서의 피해자 인권보호 장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흡한 실정이다.

아무튼 작은 천막도 없이 ‘2차 가해’라는 비바람을 맞은 해인의 정신적 외상은 컸다. 두 번째 자살 시도 이후 외래진료를 받다가 입원치료를 시작했다. 약물치료 덕분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줄었지만 삶의 의욕도 같이 사그라졌다. 항상 우울감에 젖어 복수심을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말을 끊고 약에 취한 시간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을 끊고 말을 시작했다. 입원 두 달 뒤 즈음 사이코드라마에 도전했다. 그때 성폭력 경험을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겪은 상황만이 아니라 원했던 상황인 배려받는 수사 과정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심리극 진행자가 무슨 아르바이트였는지 물었을 때 해인은 또 말더듬이가 되어 ‘호프집’이라고 해버렸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성폭력 이후 신체적 ‘증상’에 대해서만 얘기했지 사건의 ‘정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모텔’과 ‘키스방’이라는 그 두 단어를 빼고 상담하다보니 늘 겉돌았다. 이야기를 해도 후련하지 않고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한 말, 막힌 말이 아니라 트인 말을 하고 싶었다.

열망이 기회를 불렀을까. 지난해 하반기 해인은 성폭력상담소의 프로그램인 글쓰기 워크숍과 큰말하기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른 성폭력 생존자들과 관계를 맺고 말을 나누고 글을 썼다. 그곳에서도 해인은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같은 생존자들이나 활동가들에게도 처음부터 피해사실을 터놓지는 못했다. 글쓰기 워크숍에서는 16주 과정의 마지막 수업에서야 한 편의 글로 사건의 전말을 온전히 고백했다.

“내가 말할 기회를 꼭 갖고 싶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글을 쓰면서 초안 만드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한줄 한줄 완성하면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글쓰기는 억압적이지 않은 말을 창조하고 자꾸만 끊어지려는 말을 잇는 과정이었다. 글로 정리하고 말이 트이면서 약도 줄일 수 있었다. 해인은 그간 정신과 입원, 약물 복용, 상담, 글쓰기, 말하기 등 수많은 치료 방법을 통해 고통의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일련의 시도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본 방법은 글쓰기나 말하기 같은 ‘스스로 드러내기’였다.

고양이로서 실천할 수 있는 선행은 악행만큼 다양하고

“고양이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첫날 밤부터 눈에서 빛이 났던 건 아니죠. 열세 살 때부터 고독한 눈알을 원했는데요, 초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알을 빙빙 굴렸을 뿐이죠.”

-김행숙, ‘고양이군의 수업시대’ 중에서

고양이 눈알로 응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해인이 어려서부터 목도한 세계다. 화장실 불을 켜지 않는 습관으로 지금도 어둠을 지향한다. 아버지를 ‘독재자’라고 부른다. 은유적 수사가 아니다. 해인이 자라면서 본 모습은 독재자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한 남자다. 가난의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신혼 때부터 재떨이를 던지고 폭언을 행사했다. 그런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는 더욱 순종적으로 변해갔다. 해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릴 때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견뎠다.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느끼는 존재가 어머니다.

해인은 고양이-엄마가 되었다. 캣맘(cat-mom)이다. 동물에게서는 상처받지 않으리란 희망으로 유기묘를 3마리 데려왔다. 처음에는 무척 공격적이던 고양이들이 자꾸 보듬고 품고 애정을 주자 달라졌다. 도도하지만 사납지는 않다. 고양이와 해인은 서로 존재하는 것으로 돌보고 키운다. 해인은 고양이와 살면서 환경과 기질의 관계를 인식했고 생명체의 변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고양이에게 사랑과 책임감을 배우고 나니 직장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용기까지 생겼다. 그뿐인가. 폭행이나 협박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처럼 성폭력 유형의 편견 때문에 주저하는 이에게는 기꺼이 동행이 되어준다.

“성폭력 생존자 중에 피해를 입고도 신고를 못한 사람은 신고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신고한 사람은 유죄판결이 난 사람을 부러워해요. 그런데 유죄판결이 나기까지 1~2년 동안 그 지난한 과정에서 일어난 얘기를 들으면, 아휴 그냥 저기까지 안 간 게 다행이다 싶다고들 하죠. 제가 겪은 일이 어떤 형사의 개인적 자질이나 직업의식 수준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과중한 업무 속에서 성폭력 문제를 다루니까 감수성도 부족하고 무지해서 생긴 일이죠. 나중에 만난 생존자들 또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지 수사 과정에서 겪은 고충은 비슷했어요.”

해인은 길게 본다. 지금은 명백한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사건도 동일한 조건에서 과거에는 가해자 처벌이 어려웠다. 성폭력을 둘러싼 조건은 계속 변해간다.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직접 참가하고자, 성폭력 피해자 지원 동행 자격으로 법정에 간다. 참관을 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점을 고민하고, 그렇게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

성노동 여성 당사자 운동도 열심이다. 성폭력 생존자의 문제는 여성단체에서 대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물론 초반에는 보호와 상담이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치유됐을 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단체와 시민사회에서 제도적인 문제를 풀어갈 때 동시에 생존자들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야지 사회적 편견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해인이 자신의 2차 피해 경험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공론화를 시도하는 이유다.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부근. 수많은 간판들의 아우성 속에서 그곳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음지식물처럼 질기게 연명한다. 아직도 악취를 풍기는 기억의 거점. 사건이 발생하고 2년이 지났을 즈음, 한번은 분에 차고 억울해서 올라가본 적이 있다. 가해자였던 업주를 만나지는 못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런 업소는 신고가 들어가면 폐업하고 사업자등록증 명의를 바꿔가면서 영업을 지속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 키스방이 사라진들 무엇할까. 업주들은 또 다른 신종 변종업소를 만들어내고 여자들을 인형처럼 부릴 텐데 말이다.

사건 당일, 잠깐이나마 머문 키스방 대기실 풍경이 떠오른다. 말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방금 상대한 손님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성토의 장이었다. 30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아 만근 수당을 받았다는 언니는 싱글맘이었다. 반값 등록금 실현은 요원한 일이어서 사립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온 앳된 학생, 낮에는 편입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 출근하는 휴학생 등 제각각의 사연들을 갖고 있었다.

그 누가 알까, 아니 알려고 할까.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는 물어도 ‘그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는 거의 묻지 않는다. 성매매집결지는 물론이요 키스방이나 노래방, 안마방, 다방 같은 신종 변종업소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에 대한 크고 작은 인권침해들, 목숨을 위협당하는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인권 사각지대다. 가부장제 사회의 타자인 여성, 그 여성에서도 주변화된 존재인 성노동자는 실제 피해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문제화하기 어렵다. 해인이 그러했듯이.

“여러 상황 중에 하필 키스방에 간 첫날 성폭력 사건이 생겼을까, 원망이 컸어요. 근데 제 사건을 계기로 다른 생존자들과 성노동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생겼어요. 매스컴에서 성노동자는 마치 쉽게 돈 벌려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성노동의 특수성이나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 건강권을 담보해야 하는 상황이 있거든요. 제 일이 아니었다면 저에게 상처 준 사람과 비슷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다가 저도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성매매 여성에 대한 큰 편견은 없었지만 약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봤음을 고백한다. 그들을 시혜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여겼다. 그들이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성노동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인터뷰하는 것에 크게 지지를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정부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잘 받는 게 실속 있다고, 그게 아니면 여성들이 하루빨리 그 일을 접고 사무직에서 일해야 한다고, 그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물론 아니다.

“제가 갔던 키스방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다른 직장과 다르게 취급돼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성매매집결지 외에도 다방이나 키스방에 종사하는 여성이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느 지역의 노래방 도우미들이 시급을 올려달라는 운동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간헐적인 움직임이겠죠. 감정과 육체를 팔아가면서 장시간 노동하는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걸 막는 일에 작게나마 일조하고 싶어요.”

‘성매매가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이론으로만 이해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생각이다. 그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나마 당사자로서 경험하면서, 해인은 ‘성노동자의 성폭력 피해 지원’과 ‘성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게 됐다. 이것이 특정한 사건 속에서 진리를 체험한 주체가 그 진리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을 고수하는 윤리적 태도(알랭 바디우)일 것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의 권력과 자본이 여성을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한, 성노동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은행원으로 오래 일하다가 어느 날 직업을 바꾸는 게 힘들고 두렵듯 성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새 출발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러니 성매매의 근절이냐 허용이냐의 거시적인 입장만 되풀이해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성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보호할 수 없다. 그 틈에서 해인은 자신의 역할을 발견한 것이다.

얼마 전 반성매매 단체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악몽에 그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지금 또 어딘가에서 고용주로부터 강제적으로 성상납을 요구받거나 당해도 신고 못하는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언젠가 그들 목소리에 기대어 해인도 힘을 얻고 싶다.

더디 사라지는 고통, 안고 가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가까스로 피해 경험을 다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해인은 아직도 투병 중이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낯선 남자만 보면 안면 근육이 경직돼버린다. 슬픔은 가도 아픔은 남는 법이니.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익명과 뒷모습을 원하는 걸 보면 떳떳하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쓸쓸히 말한다.

모든 고귀한 변화가 그렇듯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것 같지만 실존적 차이는 있다. 해인은 더 이상 정신과 병동이나 방 안 같은 격리된 공간이 아닌 삶의 복판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아프다. 아픈 세상에 가서 아프고자 한다. 의심받는 고통이 이해받는 고통이 될 때까지. 그리고 논리회로에 갇힌 단단한 언어가 분열하는 다성의 언어로 삶에 스밀 때까지.

 

*이 글의 각 중제는 허수경(‘울고 있는 가수’), 이성복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최승자(‘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김행숙(‘고양이군의 수업시대’), 황지우(‘산경’)의 시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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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 읽고 쓰고 말하며 거듭난 주체, 나는 행복해도 된다

[행복한인터뷰]

 

이곳은 소수언어박물관이다. 사멸해가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신이 살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박물관에 사는 한 노인은, 모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에 빠진 채 차가운 전시관에서 삶 비슷한 것을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러자 그가 쓰던 소수언어도 사라진다. 말의 통제, 삶의 단절 그리고 작은 말들의 사라짐. 어쩐지 괴이하고 쓸쓸하다. 삶의 질료인 언어가, 관계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도구가 된 이 시대를 김애란은 소설 <침묵의 미래>로 그려낸다.

 

너울은 침묵의 미래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 사라지는 언어 최후의 화자가 그러하듯, 말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였다. 인터뷰를 위해 취재 의뢰 메일을 보냈을 때 그는 카페에서 쓴 시를 한 바닥 적어 보냈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음계의 말들이 공중에 퍼지다가 낙엽처럼 쌓였다. 오래 침묵했고 이제 막 말이 트였다. 집필을 하고 강연을 간다. 사라지려는 말의 불씨를 현장에서 조곤조곤 지피고 있다. 그 말들을 모아 책으로도 엮었다. 제목은 <꽃을 던지고 싶다>, 부제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로 산다는 것’.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너울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러 지방에 갔다. 실무자와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소개를 받고 강단에 올랐다. 성폭력 생존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커다란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집에 오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강의 시작 전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강사인 줄 몰랐으며 자기도 성폭력 피해자인데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마 메일을 보낸 그이도 웃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몰랐을 거라고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경험하면 행복에 어색하고 불행에 익숙하다고.

 

매일 힘든 건 아니에요. 때때로 힘들죠. 근데 즐거우면 불안해요. 행복을 빼앗길 거 같고 행복하면 안 될 거 같고. 슬픔 중독자처럼, 나는 불행해야 한다 이런 강박에 빠져서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거 같아요.”

 

아홉 살 때다. 엄마가 운영하던 자동차공업사에 딸린 식당을 찾은 손님이 첫 번째 가해자였다. 순둥이였던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고 피해 사실을 직관적으로 함구했다. 일주일 내내 굶을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아빠는 엄마를 매일같이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온통 멍울진 엄마에게 아이가 기댈 품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작게 움츠러들던 아이는 계속 표적이 되었다. 열두 살에는 할머니 댁에서 삼촌에게, 다음 해에는 등굣길에 낯선 남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작은 몸뚱이에는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발설하지 못한 말들이 고름처럼 퍼져갔다. , 할머니댁, 학교 어디에도 아이가 몸 둘 곳이 없었다.

 

피난처가 필요했다. 전쟁터 같은 집은 들어가기 싫었고 또래는 유치해보였다. 친구랑 친해지면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공간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아침에 교문이 열리기도 전에 학교에 도착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철학책, 위인전, 소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도 강간당하고도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 어떤 책도 왜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세상이 말을 해주지 않자, 아이도 세상을 향한 입을 다물었다.

 

200712, 너울은 꿈을 꾸었다.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꿈이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악몽 후 며칠간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서야 꿈속에서 그 남자가 입고 있던 옷차림이 선명히 떠올랐다. 황토색 웃옷과 청바지는, 열세 살 때 강간했던 그 남자의 옷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청바지를 안 입어요. 그냥 불편하다고만 느꼈어요. 청바지를 입으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계단을 못 가고 지하철을 못 탄다거나 했죠.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공포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몸은 다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죠.”

 

25년 전 사건은 25년 간 일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갔으나 열심히는 살면서도 종종 우울하고 문득 죽음충동에 시달렸다. 가난은 천형 같았다. 생계를 해결하느라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밥벌이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평온한 시기를 보내던 즈음, 느닷없이 악몽이 덮친 것이다.

 

읽기, 자기고통을 해석하다

 

꿈을 꾸고 난 후, 여성단체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과 독서를 병행했다. 상담 선생님이 외국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를 소개해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답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등 돌린 책과의 해후이다. 너울은 책에 다시 빠져들었다. 원인도 모르면서 결과는 나의 책임이라며 괴로워했던 시간들, 천 번도 넘게 물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했다. 이것은 그토록 찾았던 피해자의 언어가 아닌가.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는 철학교수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과 치유 과정을 기반으로 자아와 외상,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다. 난마처럼 얽힌 고통의 서사가 가지런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불편한 진실-강간피해 생존경험 드러내기>(테레사 라우러)은 미국의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상담을 받는 지난한 과정을 기록하고 나중에 상담사가 되는 과정이 담겼다. 이 책은 상담을 받는다고 좋아지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인생을 믿는다>(사미라 벨릴)는 프랑스에서 청소년기에 강간을 당한 여성이 잘못된 통념으로 발생하는 2차 폭력의 고통을 상세히 묘사했다. 사회적으로 성숙함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가 혼란 속에서 어떻게 성폭력을 견뎌내는가를 배웠다. <트라우마>(주디스 하먼)는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폭력의 동일한 메커니즘과 인간의 심연을 밝혀낸 책이다.

 

자기의 고통을 여성주의와 접목해서 해석한 책들이 힘이 됐어요. 세상에 나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내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알았죠. 저는 언어화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다 언어화하잖아요. 그동안 못 먹고 못 자고 아프면 짜증나고 저를 미워했거든요. <트라우마>를 읽고는 나를 아픈 대로, 부족한 대로 인정하게 됐어요. 스스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죠.”

 

고통도 해석이다.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성폭력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다’ ‘여자가 유혹해서 성폭력이 생겼다같은 말들만 해도 버젓이 가해자를 숨기고 피해자를 내친다. 본디 주류언어는 강자의 좋음에서 비롯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니체는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고도 했다.

 

너울은 피해자의 언어로 된 책을 읽으며 자기언어를 구했다. 상담을 시작하고부터 일 년 동안 읽은 책이 100여권. 갈급했다. 책의 내용에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연결지어보면서 서서히 자기미움에서 풀려나고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오염된 말들은 저절로 폐기되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는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성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더 이상 죄인처럼 웅크리고 살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담원으로 4년간 일했다. 내담자들은 10대나 20대나 너나없이 눈물지었다.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나만 이런 일을 경험해, 라고 말했다. 해석된 고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흠칫했다. ,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저들도 나처럼 힘들어하는구나.

 

너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외국 생존자 수기를 읽었을 때의 아쉬움도 더해졌다. 한국에는 왜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 없을까. 우리 피해자들은 왜 말을 안 할까. 그렇다고 특별한 정의감의 발로는 아니고 때가 되었다는 자각, 어떤 우주적인 기운에 끌렸다. 2012년 봄부터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성폭력 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연재를 시작했다. 첫 이야기는, 인생 2막의 전환점이 되어준 2007년 꿈 이야기로 전개된다.

 

 

쓰기, 부단히 나로 돌아오는 일

 

모든 말하기는 협상적 말하기다. 약자는 이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수위를 고려해서 말한다. 경험을 어디까지 털어놓을까. 과연 써도 되는가. 그러나 말할 수 없음의 자리에서 증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사흘을 울고, 열흘을 앓아눕고, 한 달을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너울의 성폭력 피해는 성인이 돼서도 계속됐다. 대학생 때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원 원장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 고용주에게도 당했다. 가까스로 지탱해온 삶을 한 번씩 더 추락시키는 운명의 야멸참에 몸서리칠 때 어떤 스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남자 때문에 힘들겠다고, 자기에게 몸 보시를 하면 전생의 업을 씻을 수 있을 거라고. 귀가 번쩍 뜨였다. 전생? 그 말은 이제껏 해명되지 않던 삶의 질곡, 비극의 연쇄, 반복강박과도 같은 자기처벌의 상황들을 설명해주었다. 과거를 구제해줄 계시처럼 들렸다. 그렇게 승복을 입은 남성에게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건이 많을까. 다른 여성에게 물어봤어요. 남자들한테 성적인 제안을 받느냐고. 그런 일이 있으면 미친놈이러고 만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성장해야 해요. 자기부정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지켜요. 성폭력은 어떤 여자가 예뻐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가 아니라 힘이나 권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고르는 거거든요. 제가 취약해 보인 거죠.”

 

그때는 몰랐다. 성폭력으로 망가진 어린 시절. 자아의 기초가 허물어져버린 신체. 열두 살부터 죽음에 대한 시를 썼다. 성장기 내내 치욕과 불안에 시달렸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서 어른이 됐다. 살고자 택하는 일들이 자꾸만 죽음을 재촉했다. “어른이 돼서 겪은 사건은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어떤 상황은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기에 그걸 글로 옮기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마 그러한 상황을 내가 원하거나 즐긴 건 아니므로, 폭력의 경험인 건 맞다고 본다.”

 

스님의 성폭력 사건 이후, 운명의 공범이 되기로 했다. 생의 불능 상태라고 판단했다. 고시원 쪽방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지인이 발견해 살아났다. 성을 팔기로 했다. 자살도 실패한다면 성판매 여성이 되는 것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 읽은 소설 <헬로우 미미>,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같은 책들에서 체득한 성폭력 피해여성의 삶이 전부 그랬다. 죽거나 미치거나 창녀가 되거나.

 

글 쓰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다. 성산업에 띄엄띄엄 6개월 정도 종사한 경험이 자칫 성판매 여성을 대표하는 말처럼 될까봐 부담스러웠다. 성폭력 피해자는 다 불행하다거나 성판매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일까봐 우려했다. 또 그동안 여성운동의 성과, 성폭력은 (여자 인생 끝장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관점을 무너뜨리면 어쩌나,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사회적 편견이 더 공고해질까봐 주저했다. 그래도 썼다. 내가 겪어낸 일들이니까.

 

30회 연재를 마쳤다. 글쓰기는 를 회피하지 않고 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촘촘히 쓸수록 까맣게 죽어버린 과거에 피가 돌았고 겹겹이 존재감이 형성됐다. 다행히 내용이 힘들지 쓰는 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어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뽕 맞은 것처럼일필휘지로 써내려가곤 했다. 쓰기의 쾌감과 직시의 고통을 넘나들며 일다에 연재한 글들은 20139월에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거부한다는 뜻의 제목 꽃을 던지고 싶다’. 성폭력 피해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기억의 복구 작업을 마치고 세상에 내놓은 너울은, 자신 있게 말한다. 피해자에게는 경험을 잊는 대신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사건이 없어지지 않는 한 잊히지는 않아요. 과거를 부정할 때는 뿌리 없는 사람 같았어요. 과거가 없다는 게 끔찍한 게 뭐냐면, 저는 그 시기에 함께 했던 사람이 없어요. 서른 살 이전에 만난 사람은 지금 아무도 안 만나요. 한 해가 지나면 전화번호를 다 지웠어요. 학년이 바뀌면 아무리 친해도 안 만났어요. 친구를 보면 그 기억이 다시 났으니까요. 힘들어도 과거를 드러냈더니 제가 역사를 가진 사람이 되더라고요. 과거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인정하게 되고 내일을 꿈꾸는 힘이 생겨요. 누군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싶어 할 때 나는 이런 경험이 있어, 라고 말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끼죠.”

 

 

말하기, 드러나야 줄어든다

 

너울은 얼마 전 충북대에서 꽃다운 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학생 400명이 대강의실에 가득 모였다. 누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 있는가. 한국의 성문화 하에서는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이고,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12%에 달한다고 한다.

 

축제기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몰입했다. 그 총총한 눈빛이 큰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내 삶과 내 경험이 누구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경험이 가치 없는 게 아니구나. “성폭력 경험이 가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나의 삶이, 그 경험을 견디면서 살아낸 내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에 너울은 마음이 환해졌다. 이는 보람이고 긍지이자 의무이다. 또 다른 생존자에게 강연의 기회가 이어지도록 활동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너울은 어디든 부르면 가고 가면 열심히 한다.

저자로 데뷔한 이후 글쓰기 작업도 꾸준하다. <여성신문>에 매주 너울의 치유의 레시피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생존자의 이야기를 쓰되, 생존자를 드러내지 않고 고통을 드러내기. 어떤 생존자는 어떤 고통을 겪는지 들려준다. 매번 성폭력 얘기만 담으려니 부대껴 요리를 곁들인다. 가령, 일전에 집을 나와 사는 친족성폭력 생존자에게는 식당 밥이 아닌 집 밥을 먹이고 몸보신도 시킬 겸 닭백숙을 해주었다. 요리는 너울의 주특기다. ‘꽃을 던지고 싶다출판기념회에는 그날 초대한 80여 명의 음식을 손수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글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말도 나눈다.

 

널리 말하기를 실천하는 이유는 절실하다. 성폭력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더 보았으면 해서다. 생존자가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주변에서 생존자에게 너 왜 이렇게 불안해?’ 라고 말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날카로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또 생존자들에게는 너는 그럴 수밖에 없어가 아니라 너가 그러는 게 당연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제가 처음 성폭력을 경험한 게 30년 전이거든요. 그때는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없어서 말 못했어요. 우리나라 아동성폭력 신고율이 9%에요. 미국도 6명 중 1명만 주변에 알린대요. 어느 외국 학자가 분석했는데, 아동성폭력 가해자는 한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특성이 있대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다른 피해자가 있었을 거예요. 주위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있었으면 반복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죠.”

 

지금도 여전히 아동성폭력 피해자는 너울이 느꼈던 고통을 그대로 호소한다. 그럴 때 미안하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거 같아서.

 

 

모이기,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벤야민은 이야기와 치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병이란 그것이 이야기 들려주기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멀리 떠내려 보낼 수만 있다면 치유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댐과 같다.” 벤야민의 처방대로 이야기는 너울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술로, 책으로, 다른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저만치 떠나보냈고 자연스레 자신도 이야기의 수문을 열 수 있었다.

 

작은말하기(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하는 자조모임) 친구들, 여성학과 대학원 친구들, 글쓰기 힘들 때마다 격려해준 일다의 조이여울 대표, 상담과 학업을 물심양면 지켜보며 8년간 곁이 되어준 애인, 출판을 제안해준 출판사, 글을 의미 있게 읽어준 독자들은 너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빚어주고 간직하고 퍼뜨려준 고마운 동료들이다.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돌려주기 위해 너울은 지난여름 인터넷에 생존자 네트워크 카페 성폭력, 그 이후’(http://cafe.daum.net/e-hoo)를 개설했다. 아직 사무실이 없어 엔지오 단체로 등록하지 못했지만 십시일반 후원과 자발적 재능 기부로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회원이 50명 남짓이다. 운영진 다섯 명이 격주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업을 논의한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기록화 사업이다. 피해자들이 자기 언어를 갖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한다. 또 가죽공예, 타로상담, 미술치료 등 각자 회복에 도움이 됐던 강좌를 개설하는 치유회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생존자의 작품 전시회 등도 계획한다. 책 읽고 글 쓰는 모임도 꼭 꾸리려 한다. 읽으면 똑똑해지고 쓰면 자유로워지고 말하면 당당해진다는 것을 먼저 깨친 자의 욕심이다.

 

누구도 성폭력을 찬성하는 사람은 없는데 성폭력 피해는 왜 이리도 많이 발생하는가.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기는 그만큼 어렵다. 선뜻 나서서 알려 하지 않는다. 여성들조차 자신이 성폭력 피해 가능성을 거의 상상하지 않고 산다. 어쩌면 소설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의 설정처럼, 성폭력 생존자가 대상화되고 한갓 소재주의로 전시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당사자가 직접 증언하고 같이 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너울은 소설 속 노인이 그리워했던 의 언어들, 이를테면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며, 호소하는 말들을 원 없이 부릴 것이다. 말의 물살은 또 다른 말의 잔물결을 낳겠지. 아마도 성폭력 생존자의 언어가 거리낌 없이 오가는 날 성폭력이라는 몹쓸 단어는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큰 피해를 입히고 사라져가는 파도라는 뜻의 너울성 파도처럼.

 

 

 

* <나들> 2014년 2월호 '내 몸, 파르헤시아' 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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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 - 보사노바뮤지션 '너무 흔한 비밀을 노래하네'

[행복한인터뷰]

[내 몸, 파르헤시아] 보사노바 뮤지션 소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방법 방법/ 약간은 낙관적으로 강해질 것/ 남들의 시선을 나에게 대지 말기/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열중하기/ 부드럽게 환하게 서로를 지켜보기/ 나보다 세다고 눈감아주지 말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중

소히 1집 <앵두>(2006)에 수록된 노래다.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가사에, 흥겨운 보사노바 리듬을 입혀서 청아한 음성으로 부른다. 그해 처음 반팔 셔츠를 꺼내 입은 날 살갗에 떨어지는 노란 햇살처럼 묵은 감각을 깨우는 기분 좋은 노래다. 아니다. 그해 처음 내리는 겨울비가 콧등에 떨어질 때처럼 시큰하기도 하다. 경쾌하거나 애잔하거나. 소히의 노래는 빙긋이 웃게 한다. 이름의 주술적 힘일까. ‘소히’(sorri)는 포르투갈어로 ‘미소짓다’란 뜻. 본명 최소희(昭喜) 역시 웃는다. 기쁘게.

데뷔 이전부터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소히는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어느 뮤지션은 “우리나라에서 소히보다 브라질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어느 팬은 “완전 동안 보사노바 가수”라고도 했다. 한국 가요와 브라질 음악의 섞임이 돋보이는 2집 <밍글>(Mingle·2010)에 이어 세 번째 앨범 <데이케어>(2013)를 낸 소히는, 어느 인터뷰에서 “보사노바 말고도 하고 싶은 음악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3집 음반은 제가 직접 프로듀싱을 했는데 밝은 음악만 있지 않거든요. 슬프고 우울한 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집, 2집 때 보사노바 이미지 때문에 시종일관 미소지어야 하고 샤방샤방해야 했어요. 그걸 벗어나니까 사람들이 무거워졌다고 느끼더라고요.”

기타를 잡은 지 10년. 소히는 외려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어둠을 표현할 만큼 비로소 ‘낙관적으로 강해진 것’이다. 워낙 기질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방 안에 오도카니 놓인 소녀가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 싶지만 그 반대다. “혼자 있어서 음악을 만난 게 아니라 음악을 만나서, 음악만 듣느라 혼자 있게 됐다”며 웃는다.

 

흑인음악과 보사노바, 사춘기 반려음악

순수한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커다란 눈은 세상과 싸우고/ 영악하지 않으면 거친 세상에 살기 힘들 거란 생각에/ 모두 초조해지고/ 그리워라/ 따사로운 시선/ 느끼고파/ 연결된 기분/ 느끼고파/ 혼자가 아니란걸 <왈츠> 중

중1 때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TV 프로를 보았다. 흑인음악이 잠깐 나왔는데 그루브한 리듬앤드블루스(R&B) 음악이었다.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듯 넘실대는 흥겨운 리듬에 단박에 사로잡혔고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들었다. 더 어릴 때 김완선의 무대를 보면 가슴이 뛴 적도 있다. 열정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기타를 처음 잡은 것은 고3 때다. 록을 좋아하는 사촌언니를 따라 라이브클럽 ‘드럭’에 갔다가 음악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지면서 밴드를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한 달 정도 기타를 배우고 그때부터 혼자 연습했다. 소히의 첫 그룹은 슈게이징 록밴드 ‘잠’이다.

“흑인음악은 듣는 건 좋은데 직접 하려면 힘들었어요. 감정을 오버해야 하는데 제가 과하게 표현하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스무 살 때 ‘잠’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쳤죠. 슈게이징(Shoegazing)이 고개 푹 숙이고 신발만 보고 연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록밴드지만 액션 없이 정적으로 하니까 좋았어요. 성장기의 우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었죠.”

‘내 몸’에 가까운 음악은 따로 있었다. 보사노바가 소히의 귀를 두드렸다. 우연한 계기다. 서점에 갔다가 브라질 가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의 베스트 앨범을 반값에 팔아서 반가운 마음에 샀고, 들었고, 반했다. 풍부한 리듬에 절제된 감성이 깃든, 그 건조함에 매료됐다. 음악이든 일상이든 감정을 발산하기보다 억누르는 것을 추구했던 소히다. 그 길로 인터넷 보사노바 동호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베이시스트를 구한다는 공지가 떠서 오디션을 보고 브라질 음악 밴드를 시작했다.

보사노바(BossaNova)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이란 뜻이다. 삼바의 복잡한 리듬에 모던재즈 기법을 도입해 세련되고 단순하게 발전시킨 브라질 음악으로, 1960년대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한영애의 <어느 날>,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이 보사노바 장르에 속한다. 브라질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소화하는 뮤지션은 소히가 유일무이하다.

왜 브라질 음악일까. 음악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음악으로 청춘을 기대고 영혼을 돌보고 앨범을 채운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존재의 요청이다. 브라질 음악의 어떤 요소가 소히와 부합했는지 묻자 소히는 ‘쇼로’(Choro) 이야기를 꺼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음악도 영향을 받았대요. ‘쇼로’라는 전통음악이 있는데 되게 슬프거든요.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통해서 브라질에 흑인음악이 들어왔으니까 역사적 배경에 따른 특유의 정서도 있겠지만, 쇼로의 영향으로 브라질 음악이 밝지만 슬픔이 있어요. 삼바를 들어봐도 리듬을 잘게 쪼개고 박자가 빠르지만 멜로디는 구슬프거든요. 포르투갈 음악 자체가 슬픔을 깔고 있대요. 쇼로가 ‘운다’라는 뜻이거든요.”

 


‘웃으면서 말하기’ 모방하고 싶다

나나나나 나나나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나나나나 나나나나/ 에겐 슬픈 일이 많아/ 나나나나 그래 너처럼/ 모두 내 잘못인 줄 알았어/ 하필이면 왜 나였는지/ 그냥 재수가 없었어/ 나나나나 참 웃긴 건/ 하필 나인 사람 너무 많아 <나나나> 중

울음이 끝난 뒤 하늘 같은 무구한 표정으로, 소히는 아동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얘기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정말 절망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정상이 아닌 것 같았고 긴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긍정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괴로워했다기보다 주위의 시선이나 매체에서 다루는 기사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쉬이 상처받고 자주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 사건을 많이 탓했다.

“아동 성폭력의 괴로움은 우선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가족, 친구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죠. 어머니가 알게 됐는데 구체적인 피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를 엄청 혼내셨어요.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혼이 나니까, 잘못했구나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도 당황하신 거 같아요. 나이가 들고 학생이 되고 나서 제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내 잘못이고 그런 게 괴로웠고, 큰 비밀이었어요.”

2007년 8월, 소히는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처음 말했다. 홍대 앞 인디신에서 친하게 지내던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멤버 송은지의 제안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에 참여할 때였다. 앨범 제작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정민아·송은지 등의 가수 외에도 글 쓰는 이들까지 6명이 위안부 관련 세미나를 듣고 학습 친목모임을 꾸렸다.

처음 모인 날, 술을 마셨는데 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흐르면서 ‘나 이런 적 있다’며 성폭력과 성추행 얘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소히도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듯 말이 나왔다. 피해 사실을 축소시키기는 싫었고 있는 그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뒤로는 성폭력 피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을 때 마치 “나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소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을 만났다.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때문에,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는 것,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나가야 한다는 것 등 구절구절이 뭉친 과거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극렬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누가 한마디만 잘못해도 가만 안 두는. (웃음)”

영화, 음악, 책 등 두루 섭렵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조세영 감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보았다. 스크린에서는 ‘같은 고통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에 출연한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침울하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항상 울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불편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매달 주최하는 성폭력 피해여성 자조모임 ‘작은말하기’ 자리에 나갔다. 

 


 

나를 피해자로 본다면, 그건 애석한 일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옆구릴 스치는 느물거리는 손/ 심증의 손/ 편하단 말에 존중은 없고/ 존중한단 말에 진심이 없는/ 아/ 가녀린 내 마음/ 오해가 될까 착각이 될까/ 억울해할 테지만/ 난 말할 거야 <심증> 중

진실 말하기, 이후 실존의 변형이 일어났다. 탈소심. 자기억압에서 조금씩 놓여났다. 무대도 확장됐다. 소히의 음악이 공감할 수 있는 품이 넓어졌다. 여성단체나 반성폭력운동 진영과의 인연으로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됐다. 성폭력 생존자의 증언 기록인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북콘서트에서 축하 공연을 했고,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성폭력 피해자 글쓰기 워크숍 문집 발간 북콘서트에도 출연했다. 노래가 끝난 뒤 기타의 여음 속에서 소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아동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라고.

“제 피해 사실이 알려져서인지 관련 행사에 자주 부르시더라고요. 고맙게 가죠. 페이를 주니까. (웃음) 불러주지 않으면 제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가서 얘기도 듣고 노래도 하고. 피해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말하는 그 힘이 느껴져서 좋아요. 그런 자리가 비공개잖아요. 근데도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이렇게 피해자가 많구나, 여전히 많구나’예요.”

타인의 아픔이 눈에 든다. 받은 것을 돌려줄 차례다. 과거의 자신처럼 끙끙 앓고 있는 피해여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나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횃불 같은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현실에 직면하면 이것저것 걸린다. 자기개방과 자기보호라는 상치된 두 욕망 사이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뒤척인다. (소히에게 인터뷰를 제의했을 때 하루만 더 고민해보고 다음날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피해자로서의 낙인이다. 대개는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않고 성적 이슈로 본다.

이런 관습적 해석의 또 다른 폭력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그렇게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를 말 못할 사연, 큰 비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사실 (피해자가) 말을 안 하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해요. 음, 말을 했을 때 누가 나를 이상하게 섹슈얼하게 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미친놈이지 내가 그런 사람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사실 저는 가진 게 없어요. (웃음) 제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잃을 게 별로 없죠. 만약 누군가가 거부감을 갖는다면 애석한 일이겠죠. 여전히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게 애석하겠지만 그것까지 제 힘으로 바꾸려는 건 지나친 욕심 같아요.”

서정주의 유명한 시구대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뉘우치지 않을란다’ 하는 자세가 때로는 필요한 법. 소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함이 생기는데 더 강해지기 전에 얘기하고 싶다고, 더 강해지고 나서 얘기하면 의미 없을 거라고 했다. 소히의 진실 말하기는 확신과 의지가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힘에서 매번 시도되는 것이다.

 

인디뮤지션의 밥벌이, 그리고 108배

마치 높은 성처럼/ 쌓인 관념을 깨뜨리는/ 모두 다 딱 쿵 짝/ 들어맞진 않아도/ 너의 모습들이 참 좋아/ 남의 고통 느끼는 상상력이 좋아/ 힘 빠르기 자랑 안 하는 네 기타가 좋아 <좋아> 중

소히는 우울한 손가락을 가졌다. 희고 가늘고 기다랗다. 아슬아슬하지만 정확하고 날렵하게 기타 줄을 탄다. 의사표현도 그러하다. 물속의 수초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어조인데 모호하게 말하는 법 없이 선명하게 전달한다. 말간 표정은 정지된 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활발하게 실어 나른다. 그 서정적인 손가락과 담대한 말하기와 갸우뚱한 감정선의 합작품으로 소히만의 고유한 노랫말이 나온다. 세 장의 앨범에 가사를 거의 직접 썼다.

이번 3집 앨범을 보면, <왈츠>는 상처를 잘 받는 작은 마음이 들어가 있고, <심증>은 성추행을 당할 때 큰소리 내지 못했던 억울한 상황을 표현했다. <투명인간>은 장기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 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떡볶이 식사>는 노점에서 1500원짜리 밀가루 떡볶이로 한 끼를 때우면서 드는 상념이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들은 평소에 조금씩 메모해놓은 생각, 감정을 관찰하고 일상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것이다.

뮤지션이고 노동자인 소히의 일상은 다채롭다. 20대부터 꾸준히 일했다. 방과후 선생님, 회사 경리직, 서빙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전직을 거쳤다. 현재는 “웹디자이너는 아니고 웹디자인 일을 한다”. 음악을 다루는 툴과 원리가 비슷해 어렵지 않게 배웠다고 한다. 주 5일 하루 5시간씩 생활비를 벌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는 게 약점일 수 있다고들 하지만, 소히는 오히려 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못 먹고산다는 걸 방증하니까요. 현재 음악판이 그렇다는 걸 숨길 이유가 없는 거 같아요. 음악은 다 스트리밍으로 듣고. 스트리밍 해봤자 1원, 2원 들어오나요. 공연이나 해야지 수익이 나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아이돌이나 주류 가수가 아니면 신보가 나와도 음악 사이트 메인에 안 뜨거든요. 결국 버는 사람만 계속 벌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연에도 적용되는 거죠.”

소히의 3집 앨범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앨범제작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금전적인 큰 어려움은 덜었다. 1년간 작업한 곡들을 장필순·고찬용 등이 소속된 뮤직레이블 ‘푸른곰팡이’에 보내서 앨범을 발매하는 등 좋은 동료와 작업하는 행운도 얻었다. 소히 3집 앨범은 이전의 브라질 음악에 대한 경쾌한 해석이나 소녀적 감수성에서 나아가 종교적 색채와 재즈적 분위기가 덧입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본인의 해석은 좀 다르다. 대략의 곡 작업을 기타로 했고 리듬이 부각된 흑인포크 성향으로 이동했다며 이전 앨범보다 더 리드미컬한 앨범이라고 말한다.

소히는 요즘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종교적 접근이라기보다 성찰적 계기 정도다. 틈틈이 108배를 하는데, 목탁을 쳐주는 ‘108배 애플리케이션’을 틀어놓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기도는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던가.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제 그런 일을 하면서 왜 그랬지 등등. 아무려나, 백팔번뇌의 팔 할은 음악이다.

“제 목적을 망각할 때가 많아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3집 앨범을 낸 건데, 좋은 반응이 없다고 상처를 받아요. 남들의 평가보다는 제 음악적 표현이 중요한데…. 만약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20명 있었는데 지금은 5명이다.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보다 5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5명도 없다고 치면, 지금까지 음악 하는 게 어디야.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성폭력지원센터 만든 가수 ‘메리 제이 블라이즈’처럼

넌 내가 보이지 않나/ 보이는데 못 본 체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 왜 우린 투명해져야 하는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 그렇게/ 그렇게/ 안아달라/ 애기하자/ 말하고 싶어/ 우리는 사랑했어/ 사랑을 잊으려고 하는 바보넌/ 투명인간? <투명인간> 중

피오나 애플은 12살 때 당한 성폭력의 기억을 음악으로 승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아티스트다. ‘힙합 솔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J. 블라이즈는 미국 뉴욕의 빈민가 출신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폭력, 약물중독 등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성장통을 음악에 고스란히 표현한다.

소히에게 특별한 뮤지션들이다. 특히 메리 J. 블라이즈는 음악과 삶에서 두루 존경한다. 그녀는 학대받는 여성들의 교육과 경력 개발 등 성장을 돕는 여성발전지원센터를 설립했다. 피오나 애플은 미디어의 선정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늘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담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 체험에 대한 선정주의적 시각에서 음악을 분리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명한 외국 가수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소히는 큰 자극과 위안을 받았다. 피오나 애플은 피해 사실을 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히 역시 피해 사실 때문에 음악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게 음악의 한 흐름인데 피해 사실을 떨어뜨려놓고 표현하거나 굳이 없었던 일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경험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수는 없는 일이다. 소히의 음악에는 피오나 애플과 메리 J. 블라이즈의 애절한 음성이 숨 쉰다. 밝게 웃는 성폭력 피해여성들과 떡볶이 노점상 아주머니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소히의 눈에는 보이는 그들과의 공동 창작물이 소히의 음악이다.

흑인음악에서 슈게이징록을 지나 쇼로의 영향을 받은 보사노바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랜 슬픔의 지층을 탐사하면서 소히는 어느새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레비나스)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음악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을 설파하는 힘이 길러졌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제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알리고 싶어 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슬픔이 있잖아요. 그 슬픔을 저의 슬픔으로 위로하고 싶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선입견이나 통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음악을 통해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사람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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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월간지 <나들>에서 '내 몸 파르헤시아'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소히가 3번째네요. 파르헤시아는 '진실말하기'라는 뜻으로 성폭력피해여성이 몸의 진실-삶의 얘기를 풀어가는 인터뷰입니다. 인터뷰이 요청에 따라 온라인 공개를 선택합니다. 소히는 공개를 해도 좋다고 해서 싣습니다. -> 본문보기 

* '내 몸 파르헤시아'에 인터뷰를 원하는 분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varyeye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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