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수사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3.09] 꽃단추 / 손택수 (2)
  2. [2010.12.04] 흰둥이 생각 / 손택수 (6)

꽃단추 / 손택수

[올드걸의시집]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달빛길어올리기. 인사동 어디쯤에 자리한 민속주점이 떠오른다만 영화제목이다.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장항선 등이 나온다. 전주에서 찍었다. 한지에 관한 영화다. 우리 것(알리기)에 천착해온 임권택 감독. 역시나 스크린에 펼쳐지는 풍광부터 절경이다. 달빛과 폭포와 바다는 비단실로 수놓은 듯 찬란하다. 날렵한 처마선이 춤추는 한옥마을, 한지공예는 예술이고. 지천년, 견오백.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을 간단다.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장인이 나온다. 한지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었다. 나의 무지와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래서 별로였다. 교훈이 과했다. 영화라기보다 전주시에서 제작한 한지홍보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다. 노트필기 했으면 공책 몇 장은 나왔을 거 같다.

거장감독 작품이라 더욱 아쉽다. 임권택 감독이 백한 번 째 영화라고 한다.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혼자서 쓰는 소설을 백편 쓰기도 어려운데, 영화는 공동창작이다. 어떻게 백 편을 찍으셨을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분이다. 사실 난 서편제를 못 봤다. 안 봤나. 암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던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 감독이 조급하셨나. 세월은 화살처럼 흐르고, 몸은 기울어가고, 세상에 전할 이야기는 많으니 바쁘셨을지 모르겠다. 자연스레 단추보다 지퍼를 택하게 되는 걸까. 단추보다는 더 많이 넣을 수 있고 서둘러 당도하는 지퍼. 요즘은 세상 사람들을 관찰하며 내가 나이 들면 어떤 모습일지,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조심스럽다. 지퍼로 봉합하기보다 금단추 은단추 꽃단추 끼우며 세상의 벌어진 틈을 메우며 살아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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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생각 / 손택수

[올드걸의시집]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

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

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

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

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

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애늙은이처럼 아기를 좋아했다. 내 나이 고작 7세 때 윗층에 사는 아기를 보러 새댁 아줌마 집을 계단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아기의 돌잔치가 열리는 날. 새댁 아줌마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낯선 사람이 많아서 아기가 계속 운다고 사진을 찍어야하니까 와서 아기를 달래보라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외할머니가 안아도 울고 할아버지가 안으면 더 울던 아기가 딱 두 명의 품에서만 수도꼭지 잠근 것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새댁아줌마와 나.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알아보듯 신통방통하게도 아기는 체취와 체온으로 나를 알아차렸다. 그 신기한 장면을 본 친척들이 웅성거렸다. 어린 나는 으쓱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의 존재감을 인식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앨범에 사진 한 장 누워있다. 빵 끈 같이 누런 금반지를 낀 아기를 안고 있는 바가지머리의 여자아이. 품에서 내려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첫 강아지, 흰둥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내 방에서 아기가 자고 있었다. 이웃 중에 과외를 하는 새댁이 있었는데 수업할 때마다 우리엄마한테 아기를 맡긴 것이다. 나는 이불을 살며시 떠들어 보았다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엎드려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등짝이 유독 까맸다. 분유통 모델처럼 포동포동 젖살 오른 뽀얀 아기만 보다가 까무잡잡한 아기를 보니까 너무 신기했다. 아기는 다 예쁘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백옥 같은 아기는 눈부셔서 예뻤고 검정콩 같은 아이는 단단해서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이웃집 아기를 돌보실 때면 항상 ‘강아지~’라고 부르셨는데 그 아기는 까맣다하여 검둥이강아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아기가 오는 요일엔 집에 일찍 들어가서 검둥개가 문드러지도록 안고 놀았다. 물고 빨고 뽀뽀를 해댔다. 그러면 그 검둥이 강아지는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촉촉한 눈웃음으로 반응했다. 

워낙 아기를 좋아하시던 엄마는 당신의 첫 손자를 벅찬 감격으로 맞이하셨다. 이틀이 멀다하고 손자를 보러 오셨다. 나한테는 틈만 나면 ‘니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은 아기를 낳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잘 먹고 잘 자는 순둥이 손자에게는 ‘지 에미를 귀찮게 안 해서 더 예쁘다’고 칭찬하셨다. 엄마는 연신 씻기고 연신 거둬 먹였다. 손자에겐 수식어가 더 붙었다. “우리 찹쌀강아지~”라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찹쌀이라 함은 쌀보다 더 영양지고 윤기 흐르는 귀한 곡식이다. 시난고난 어렵게 산 엄마의 성장배경을 고려할 때 그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아기 때부터 잘 자고 잘 먹던 찹쌀강아지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항시 모자람 없는 수면으로 밀가루 뒤집어 쓴 것처럼 뿌연 피부색을 유지하던 흰둥이 이마에 발긋발긋 여드름 꽃이 피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나의 흰둥이가 문득 낯설다.

“엄마 찹쌀강아지 한번 안아 보자”며 겨우 꼬드겨서 무릎에 앉히면 몽실몽실 체온 덥히던 흰둥이는 간 데 없고 기다란 장작같이 뻣뻣하다. 일분 정도 앉아 있다가 “영어 단어 외울 게 많다”며 일어나는 청소년 흰둥이. 앎이 네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삶의 진액 빼먹으려는 개장수만 우글거리는 세상. 시절이 하 수상하니 쇠줄을 풀어주고 싶다. 어디로든 달아나라. 나의 흰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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