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5.28] 김영민 <공부론> 읽고 (4)
  2. [2011.05.07] 친구와 동무 (10)
  3. [2009.07.20] <동무론> 서늘하고 위험한 관계

김영민 <공부론> 읽고

[글쓰기의 최전선]

타자의 타자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면 이해의 실패는 본질적이다. 따라서 이해 가능성의결핍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의해 제기되는 묘사의 문제 중심에 있다. 타자를 타자로 유지하기 위해 그것은 지식이나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은 언제나 나의 지식이고 경험은 언제나 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오직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만 만나지며, 따라서 곧바로 그 대상의 타자성은 감소된다.

 

- 콜린 데이비스 <엠마누엘 레비나스-타자를 향한 욕망>

 

 

우리가 타인,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타인과 타자가 구별 없이 쓰이는데 어떻게 다를까요. 수업시간에 스치듯이 얘기했는데요.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보완하기 위해 일부 옮겨드립니다. 타인은 다른 사람. 실존의 개념이죠. 타자는 나 아닌 모든 것. 자연, 사물을 아우르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타자가 더 포괄적이고 무한적이죠. 타인은 지구 총 인구에서 나를 뺀 모든 사람으로 유한적이라면, 타자는 무한 증식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 철학 책 몇 권 읽고 났더니 잣대만 강해져서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 되어버린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뭐는 어떻다 이건 저렇다 어설프게 가치평가를 하는 거죠. 가까운 사람의 일침이 결정적이었지요. “니체 읽더니 더 이상해졌다.”-.- 책을 읽을수록 인식과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하는데 어쩐 일인가 싶어 부끄럽고, 또 놀랐지요. ‘내 안에 갇히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독서가 된다면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겠구나,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공부가 되도록 해야겠다. 무릇 공부가 흔들고 휘젓고 깨는 작업이 되도록 하자다짐을 했습니다.

 

물론 일상에 파묻혀 지내면 금방 까먹습니다. 그래도 가끔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나은 것 같아요. 다른 것, 타자는 처음부터 이해의 실패, 몰이해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통이란 게 가능한 것인가. 한참 회의했을 때, ‘내가 변한 만큼이 소통이다라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통은 내가 말한 것을 내가 듣는 형식이 아닌, 내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제가 이해한 타자성의 발견이고 소통이 가능하다면 그것입니다.

 

김영민의 <공부론>은 그런 제게 좋은 자극으로 가득한 책이었고요. 이번에 수업 교재로 쓰면서 다시 읽으니 새록새록 새로워요. 여러분의 엄청난 정동 - 누구는 눈물 흘리고, 누구는 울분 떠뜨리고, 누구는 상찬하고, 누구는 낙담하고. 다양한 반응을 목도하고 있자니 정말 괜찮은 책이었구나 싶어요. 한 가지 반응으로 수렴되었다면, 우리가 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의미는 조금 퇴색되었겠지요. 앞으로도 더 자기 느낌을 말하고 육성을 드러내고, 그리고 더 귀 기울이고 그렇게 공부해요. 제가 모 시인 인터뷰했다고 (자랑)했죠? ^^ 그 분이 마흔을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청춘이 등 뒤에서 문을 닫는 나이. 종강이 등 뒤에서 문을 닫으려 합니다. 아쉬움에 자꾸 뒤돌아보게 돼요. 남은 두 시간도 서로의 인연에 최선을 다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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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동무

[글쓰기의 최전선]


쓰던 번호 그대로. 십년이 넘었다
. 핸드폰 개통 당시 번호를 지금껏 쓴다
. 딱히 바꿀 기회가 없었다. 얼마 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때 친구다. 혹시나 해서 연락했다면서 대뜸 타박이다. “! 아직도 016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옛날 애인한테 전화 올까봐 번호 못 바꾸고 있냐?” “흐흐.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 그런 낭만적인 일이 생기면 참 좋겠구나.” 모처럼 이년저년 해가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말이 씨가 된 걸까. 며칠 후. 옛날 애인은 아니고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선배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내친 김에 만남까지 성사됐다. 3년만의 재회. 우리는 방금 전화 끊고 만난 사람처럼 따끈따끈한 대화를 이어갔다.

좋아하는 선배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떨어져 지내면 잊어버린다. 문득 보고 싶지만 쪼르르 연락하지 않는다. 모진 풍파 헤치고 외로움 벗 삼아 잘 살리란 믿음이 서로에게 있다. 수년 전 남편과 헤어진 선배는 직장과 육아의 생활고로 무척 힘겨워했는데 그날은 홀가분해 보였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앞면에는 바뀐 이름이 뒷면에는 벚꽃잎 같은 여릿한 글씨가 반짝인다. ‘싱글맘아, 행복해져라' 선배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싱글맘의 정체성 찾기와 육아, 자립의 노하우를 나누는 싱글맘 웹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명함을 보고 또 보았다. 뭉클하고 뿌듯했다. 내 그리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으쓱함과 나도 더 나누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교차했다.

핸드폰 번호는 십년 넘게, 남편은 이십년 가까이 못 바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는 고리타분하고 우유부단하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말이 너무도 가슴 시렸다. 좋아하면 꼬박꼬박 만나고 살아야한다고 우겼다. 이제야 수긍한다. 끈끈함을 추구했는데 서늘함이 좋아진다. 나와 닮은 종자보다 이질적인 대상에게 매료된다. 관계의 근속년수를 자랑했으나 그냥 두어도 제 스스로 불어나는 숫자가 무의미해졌다. 하얀 목련이 피었다가 지듯 만물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사람의 인연 또한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끌림으로 꽃피웠다가 연분을 다하면 스러지더라. 삶은 인연의 꽃밭. 혹은 난투장. 관계의 쟁투 끝에 친구가 바뀌면 삶의 풍경도 그 빛깔을 달리하는 것이다.

친구를 통해 나를 사유하기. 6차시 수업은 김영민의 <동무론> 읽고 좋은 친구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내심 걱정했다. 책 내용이 딱딱하다. 글쓰기도 쉽지 않다. 친구, 가족, 돈과 같은 삶의 근간은 웬만해선 들추기가 싫게 마련이니. 그래서인지 과제 제출율이 낮았다. 토론은 활발했다. 김영민은 친구와 동무를 구분한다. 친구는 공유된 기억이 축축한 정서적 결속감에 의존한 관계. 동무는 같을 , 없을 같은 것이 없는 관계, 거듭 새로운 실천으로 서로를 증거 하는 서늘한사이다.

나는 친구를 과거적 관계로 규정하며 동무보다 한 수 아래에 놓는 김영민의 <동무론>에 반대한다.” 비판적 사고의 종결자 지오씨. 친구는 현재에 생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과거의 시공간을 함께 나눈 삶의 기록이란 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옥기샘이 동조했다. 여고시절 꽃 편지지를 정성스레 써주어 아름다움이 무언지 가르쳐주던 친구가 공무원이 되고 나니 순수함이 사라져 지금은 대화 불통 사이라고. “술 마시고 수다 떨어도 집에 갈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공허해요. 그래도 과거의 친구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을까요.”

오랜-착한-친구는 때로 불편하다. 가령 자신을 못났다고 여길 정도로 착하고 변함없이 나를 믿으며 보호자처럼 끊임없이 나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친구. 명운 씨는 거기서 오는 우울함이 있다여전히 자신을 고등학교 때 순수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친구가 편하면서도 가족처럼 짐스럽다고 터놓았다. 마치 작아진 옛날 옷처럼 친구가 몸에 맞지 않게 된 셈이다. 우정에서 필요한 건 삶의 리듬과 생각의 크기를 맞추려는 노력이다. 현재 10년 지기 남편과 부부백수 생활중인 그녀는 서로를 발전적으로 극()하고 계획하지 않았던 길을 같이 가며 생()하는 것이 즐겁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선언한다.

초등학교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난 친구까지 그들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추억으로 관계를 끌고 가는 거라면 옛 애인처럼 놔 버리려고 한다.”

엄청 좋은 친구, 현 애인과 달콤한 날들을 보내는 경수 씨는 치즈버거에 빗대어 동무론을 폈다. 치즈버거에 치즈가 없다면 무슨 맛일까, 마찬가지로 좋은 친구관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라고 정의했다. 아니 대체 이토록 담백한 비유를 어떻게 떠올렸는지 물었더니 요즘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단다. 역시 가장 좋은 비유는 삶에서 나온다. 빵집 아들 김연수가 자기 삶을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뚫린 도넛에 비유했듯이 말이다. 다시 경수 씨 글.

수유너머에 온 이후로 어제의 나가 아닌 과 비교를 하며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내 생각은 보잘 것 없다고 느끼는 순간, 나 자신은 사라졌다." 

치즈
가 흐물흐물 녹아버릴 지경에 이른 그녀에게 남친은 자존감 돋는 자작시 좋은여자를 바쳤으니, 시들어가던 경수씨는 자기긍정으로 만개했음을 고백했다. 대체 어떤 시길래. 부끄럽다며 극구 꺼려하는 경수씨를 졸라 시를 공유했다. 봄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시가 울려 퍼지고 강의실은 잠시 질투의 원성으로 들끓었다. "거기, 누가 대패 좀 줘요-.-;" 요즘도 이런 올드한 감수성의 소유자가 있느냐고 내가 신기해하자 한준 씨가 나선다. “저도 여자 친구한테 시를 써줬어요."  그렇구나. 사랑의 전사는 언어의 발명가다.

김영민은 <동무론>에서 "낡은 언어로 말하며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사랑" 심리적 동일시의 환상 감정을 비판한다. “사귐은 비밀번호를 나누어 확인하고, 이심으로 전심하며, 특정한 문법과 어휘들을 나누어 쓰고, 관념의 궤도와 코드를 다시 잇는 재미로 깨가 쏟아지는, 일종의 정신적 가족주의가 아니다.” 좋은 관계는 단지 감정이입이 아니라 평소에 시 한 줄 안 읽던 사람의 시인본능을 자극하듯, 서로에게 잠재된 타자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가 없다"고 말한 혜성 씨. 솔직 당당한 고백에, 어디선가 친구가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긴 마찬가지라는 말들이 새어나왔다. 혜성 씨는 발 묶인 새 마냥 날아가지 못하는 속세의 관계와 달리 친구는 해방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주어야 한다며,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더 약한 속박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약하게 속박하면서 날아가게 한다니.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 지오 씨는 관계의 창조적 발전은 친구에서 동무가 아닌 친구이자 동무에 있다고 했다. 이것은 축축함과 서늘함의 공존상태다. 연암 박지원은 벗 사이에 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틈이 있는 가까움. 이 모든 역설의 언설들. 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다만, 생각해보면 원래 삶은 그렇다. 모순에 직면하는 일이다. 십년 묵은 핸드폰 번호에서 새로운 삶의 스토리를 풀어내고 생산적 인연을 가꾸어야 하듯이, 우리가 글쓰기의 기술을 배우지만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야하는 것처럼. 온통 쓸쓸하고 고단한 노동이다.

예상은 했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 문득 난감하다. 사실 어떤 한계를 통과하는 데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용기, 약간의 깡만 있으면 된다. 나로선 삶의 최전선을 함께 서성일 밖에.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다. 좋은 친구, 좋은 글.  모두 원리는 같다. 김영민의 말대로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너지면서 배우고 자빠지면서 얻는 것이다."  고독한 채로 함께 하는 법. 다음시간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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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론> 서늘하고 위험한 관계

[비포선셋책방]

친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관계가 친구인가. 어느 한 시절을 인연으로 친구가 되긴 쉬워도 오랜 세월 ‘좋은 친구’로 지내기는 어려운 거 같다. 삶의 조건, 가치관 등 사람은 계속 변하니까.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같은 신체 상태와 감정의 파장으로 합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친구는 이심전심 잘 통해야하지만 너무 똑같고 마냥 편하기만 해도 재미없다. 나를 보는 거니까. 거울을 쳐다보고 독백하는 '거울놀이'는 얼마 못가서 싫증나게 마련이다. 무릇, 벗이란 다양한 스펙트럼의 세계를 열어주어 서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존경할 만한 면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존재를 열어 밝히고 삶을 고양시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벗이다.

니체는 이를 창조하는 벗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벗을 중시했다. 인류의 역사와 대결하면서 도덕과 이념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철학을 개진했던 니체가 ‘벗’에 대해 치열한 사유를 전개한 것은 의외였다. 미래의 인류 사이를 서성이며 고독을 자처하고 현세 사람들을 비난하던 천하의 니체 아니던가. 자신이 쓴 책은 300년 후에나 이해될 것이라며 책이 팔리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던 도도한 니체이기에 ‘벗’은 필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는데 아니었다. 니체에게는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누설자”이며, 벗은 또한 위버멘쉬를 낳는 최고의, 유일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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