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수영

(6)
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아,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 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선(禪)적인 것이 신(神)적이고 시(詩)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
생활 / 김수영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김수영 전집, 민음사 보살님 같았다. 온화한 표정. 잡티 하나 없는 무욕의 피부. 넉넉한 말투. 세미나 첫날부터 앉아계시는 그곳에 편안한 파장이 흘렀다. 수선문. 화두를 아이디 삼으셨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는다 강가도 좋고 산속도 좋고. 자연의 품에서 벗들과 둘러 앉아 시를 낭송하는 풍경을 꿈꿔왔다. 지난 6월 한강둔치에서 ‘강가에서’를 낭독했다. 강에도 나에게도 할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봄이면 봄시. 산에 가면 산시. 사랑하면 사랑시. 슬프면 술시. 정직한 산출이 즐겁다. 7차시 수업에 남산에서 시수업을 계획했다. 이 수업을 끝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냥냥님이 야외용 미니 도시락 17인분을 낑낑 들고 나타났다. 일동 감탄하고 환호했다. 방산시장에서 도시락 용기를 사다가 엄마랑 준비했다는데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나 보던 도시락 비주얼을 자랑했다. 수업시간마다 간식이 하도 색다르고 풍부하여 ‘식도락 동호회’로도 손색없다했거늘, 냥냥표 도식락은 미식가의 자부심의 궁극을 선사했다. 1교시 ‘묘사하기’는 교실..
희망버스 설움버스 #1. 다시 여름이 되나봐. 희망버스 후유증으로 시들었어. 여러 가지로 우울하다. 흠 강정마을에 있다. 여기도 참 심란하네. 곳곳에서 우울한 풍경만 날아다니고 그래. 한 우울이 다른 우울에게. 뉴스를 보고 마음이 영 좋질 않다. 고객숙인 남자. 폭염주의보까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넋두리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트위터를 하는가 보다. 말이라도 하고 나면 숨통이 트이려나. 깨어있을 확률 100% 심야생활자에게 문자를 전송했더니 제주도다. 이상한 나라. 곳곳에 우울특파원. 4차 희망버스는 유람버스. 시내를 맴돌았다. 청계광장에 있다가 광화문역 화장실을 갔다 오니 대오가 흩어졌다. 난간에 기대 서서 물길 따라 이동하는 깃발 행렬을 보았다. 꼬리가 사라지고 무대 스피커가 떼어지고 현수막이 걷혔다. 서서히 ..
김수영 / 비 '움직이는 비애'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