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극장옆소극장]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아멘>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적인 것이 신()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꺼버리곤 했다. 미장센은 지독히도 아름다운데 상상초월 날 것의 장면에 눈 맞추기 힘들었다. 영화가 고행이자 고문이므로, 나는 눈 돌렸다. 그런 내가 변한 건가. 제아무리 영화가 끔찍해도 삶의 냉혹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삶의 엄정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김기덕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대로, 창녀가 여대생이 되는 허구적 설정으로 스토리를 치장하지 않는 점이 훨씬 윤리적인 것 같다.

이것은 시를 읽으면서 느낀 변화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삶의 절망을 또렷이 직시한다. 관념적인 언어로 덧칠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삶에 가득한 모순과 역설을 끝까지 끙끙 앓으면서 가져가는 것. 그 노력. 그 사랑. 그 눈물겨움. 그것에 뜨겁게 위안 받는다. 언제부턴가 그런다.

다시 김기덕. <아멘>을 보고 나니 존경스럽다. 인생수업을 마치고 다른 층위로 등업한 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렇게 깊게 군더더기를 제거해버리고 삶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의 짐작이지만 칸느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을 것만 같다.) 나이 들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예술가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배신이 아닐까. '배신을 통한 성장' 아직 못 봤는데 <아리랑>에는 김기덕의 품을 떠나서 자본의 품으로 가버린 장훈감독에 대한 실명비판이 나온단다. 살기등등하다는 후문.

몇 년 전, 김기덕이 유명해졌을 때 본 인터뷰가 기억난다. 초년고생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파리로 떠났다. 거리의 화가로 돈 벌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미술계가 학력카르텔이 공고해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겠다싶어서 방향전환했단다. 시나리오를 썼다. 어떤 공모에서 입상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쓴 다음 작품이 <악어>다. 그 시나리오는 누구를 도저히 주기가 아까워 본인 스스로 감독까지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비주류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구축했고 세계 3대영화제 상을 받은 유일한 감독인데, 배신사건 이후 폐인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현재 김기덕의 모습은 봉두난발 흰머리 흩날리는 야인 혹은 도인의 아우라가 물씬했다.

어디 제자의 배신뿐이겠는가. 영화필모그라피와 함께 상처도 첩첩 쌓였을 것이다. 고통을 통한 앎의 증대가 일어났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진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가치와 다른 언어를 발명해서 나의 세계관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전전긍긍과 암중모색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인간적 성숙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황지우도 그랬다. 87년 승리 이후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에 좌절한 그는 무등산으로 숨어버린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초조한 삶을 견디며 시를 쓴다. 그렇게 나온 <게눈 속의 연꽃>을 지난 주 시세미나에서 읽었는데, 김기덕의 <아멘>에서 황지우의 선적인 것이 겹친다.

시집의 첫 시가 <>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로 끝난다. 닻이 덫이 되는 삶의 잔인함이 섬뜩하다. <눈보라>에서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이런 구절도 있다. 영화 <아멘>에서도 짐승 같은 바람소리가 줄곧 난다. 무엇보다 황지우의 시적 절정은 <산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
그러므로
,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황지우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니까 김기덕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만 같은 시구다. 삶이 배신당하는 장소에서 자기성찰이 싹트고 수작이 태어난다. 황지우가 그렇고 김기덕이 그렇다. '크나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크나큰 경멸로 사랑하라(니체) 했거늘, 예술가의 고통이 대중에게는 기쁨이 되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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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김수영

[올드걸의시집]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김수영 전집, 민음사


보살님 같았다. 온화한 표정. 잡티 하나 없는 무욕의 피부. 넉넉한 말투. 세미나 첫날부터 앉아계시는 그곳에 편안한 파장이 흘렀다. 수선문. 화두를 아이디 삼으셨다고 소개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시인, 불교적 세계관이 투영된 문태준의 언어를 어렵지 않게 풀어주셨다. 삶의 지혜가 바로 이런 것. 우리는 감탄했다. “하루하루 애들 키우고 밥 해먹고 하다가 어느 날 돌아보면 훌쩍 이 나이가 돼있어요. 그런 게 멍한 거죠.” 여자의 삶.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더 컸다. “토요일에 외출이 얼마만인지 몰라요.” 세상에 처음 나온 어린 새 같은 표정. “공부방을 이십년 운영했어요. 그러다보니 아이들하고만 지내고 어른과 대화하는 법을 까먹더라고요.”

말을 배우겠다는 어른. 말 부족은 물 부족만큼 심각한 생의 사태. 헌데 김수영 시가 어려워서 괜히 발을 들여 놓았구나, 가지말까보다 망설였고 여기서 그만두면 영영 못할 거 같아 나왔다고 터놓았다. 그녀는 유일하게 이해가능한 시 한편이라며 <생활>을 낭독한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어제, 토요일 낮에 전화가 오셨다. 시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병원을 지키는데 평일에 일을 하니 주말은 당신 차지가 되었다며 시세미나에 당분간 참석이 어렵겠다고. “어머니 퇴원하시면 다시 돌아갈 테니 저 자르지 말아주세요. 호호호...” 자꾸 허허... 웃는 그녀에게, 나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편안히 오시라고, 기다리겠다고 말하고는 끊었다. 무언가 서글펐다. 생활은 고절이고 비애이고. 그렇다고 쳐도.

그러니까 묻고 싶은 거다. 왜 여자는, 사람은 시 한편 읽고 살기가 이리도 힘이 드는가.  

올해 각종 연말모임, 토요일 약속은 다 접으려 작정했다. 별다른 선약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도 다 피하고 조용히 지내려했다. 하나의 난관은 예상했다. 대시댁 모임. 일찍 닥쳤다. 시댁 어른 팔순잔치가 토요일 저녁에 잡혔다. 남편한테 양해 및 협조를 구했다. 어차피 뷔페라서 어수선하니까 어른들께 인사만 드리고 조용히 사라지겠다. 그리고는 그리했다. 어머님께 중요한 일이 있다며 말하고 나오는 길,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많이 용감해졌구나 스스로를 대견히 여겼다. 내가 만일 돈 버는 며느리였으면 말하기가 좀 수월했을 텐데 표면적으로 백수상태이다 보니 참 입지가 애매하고 표현이 궁색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는 설명할 길이 막막하다.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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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최전선]

강가도 좋고 산속도 좋고. 자연의 품에서 벗들과 둘러 앉아 시를 낭송하는 풍경을 꿈꿔왔다. 지난 6월 한강둔치에서 강가에서를 낭독했다. 강에도 나에게도 할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봄이면 봄시. 산에 가면 산시. 사랑하면 사랑시. 슬프면 술시. 정직한 산출이 즐겁다. 7차시 수업에 남산에서 시수업을 계획했다. 이 수업을 끝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냥냥님이 야외용 미니 도시락 17인분을 낑낑 들고 나타났다. 일동 감탄하고 환호했다. 방산시장에서 도시락 용기를 사다가 엄마랑 준비했다는데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나 보던 도시락 비주얼을 자랑했다. 수업시간마다 간식이 하도 색다르고 풍부하여 식도락 동호회로도 손색없다했거늘, 냥냥표 도식락은 미식가의 자부심의 궁극을 선사했다 

1교시 묘사하기는 교실에서 마치고 2교시 과제발표는 남산이다. 연구실에서 두 정거장 남짓. 발아래 서울 풍경을 두고 직통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을 맞아가며 돼지소풍처럼 줄지어 걸었다. 나무계단 올라 벤치와 벤치 사이 돗자리를 폈다. 시와 에세이를 읽었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모기 녀석. 사정없이 웽웽 거리고 인정없이 물어댔다. “산모기는 군화도 뚫는다고 말한 한준씨가 스마트폰 모기퇴출 앱을 가동했다. 모기를 쫓는 기계음과 시를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정답게 교차했다. 수샘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고 쓴 과제를 발표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반대로 진행되는 일을 만날 때 그 길이 틀렸다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누군가 틀렸다고 크게 외칠 때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20원 받으러 세 번씩이 나온 야경꾼을 증오하는 모습이 자기 멋대로 운전하는 차를 보면서 여지없이 빵빵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나를 보는 듯합니다. 모래만큼 먼지만큼 작은 자아. 깰 수 없는 자신의 벽을 가지고 절정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는 것도, 세상의 모든 벽을 문으로 뚫고 나가는 혁명적 삶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힘겹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유명한 시에 감응한 글이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온 그다. 우리나라 제도교육에서 제 정신으로 아이를 가르치면서 살기위해서는 얼마나 큰 존재혼란을 경험해야할지 짐작이 간다. 혁명의 절정에 서 있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는 삶도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래서 가슴에 잔잔히 이는 것이 있다. 수샘은 다음 주 결석했다. ‘선행학습 사교육 유발하는 학교수학시험 실태조사 기자회견보도사진에 그가 있다. 연구년을 맞아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그 때야 알았다. 모래만큼 작은 그가 벽을 흔든다.

주말에 고향친구들이 올라와 택시를 탔다가 바가지요금을 당한 명순씨. 4000원 초과요금에 분개한다. 매일 뉴스에서 접하는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무관심하지만 내가 겪은 작은 일에라도 분노하고 고쳐나가는 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최소의 몫이라고 썼다. 누군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작은 일에 분개하면 거기에 힘을 다 쏟아서 정작 큰일에도 분개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 논의가 오갔다. 작은 일에 분개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작은 일에 분노해보아야 큰 일에도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작은 일과 큰일의 경계는 무엇인가. 정답 없다. 오직 살아가면서 매번 정답을 발명해야하는 삶의 과제다. 그 난해함과 헷갈림을 시로 풀어냈던 김수영은 그렇게 정립된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 괴로워서 또 몸부림쳤다.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구름의 파수병>

오후 5. 냥냥님 송별회를 위해 장소를 옮겼다. 치킨에 생맥 한잔. 스페셜 도시락에 걸 맞는 스페셜 치킨을 위해 부암동으로 공간이동. 치킨과 감자, 골뱅이와 소면을 맛나게 먹었다. 선하게 피어나는 얼굴들. 한준씨에게 치킨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 없다는 디씨 치킨갤의 명언을 배웠다. 일부는 집으로 나머지는 카페로 갔다. 문을 열자 뜨거운 커피바람이 분다. 어둑한 조명 아래 에디오피아시다모를 음미했다. 위장이 고요해진다. 시가 들어갈 마음자리가 보인다. 남산에서 못 다한 수업을 하자니까 다들 진짜 할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돌아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 낭독하기. 소수정예반 수업이 시작됐다 

문학평론가를 꿈꾸는 취중진담님은 김수영 평전, 시집, 수필을 섭렵하여 글을 쓴 적이 있는 전문가. 그가 교사가 됐다. <신귀거래3-등나무>는 완전 어려운 시인데 나름의 독해법을 들려주었다. 연을 나누고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에 밑줄 그으면서, 우리는 감탄했다. 어쨌거나 정답은 심리적 안도감을 제공한다. <절망>의 재발견.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로 끝나는 짧은 시. 비교적 이해가 쉽다. 반성하지 않는 것들의 목록. 풍경-곰팡-여름-속도-절망. 공통점이 무얼까. 반성은 돌아봄. 멈칫거림. 주춤거림이다. 그런데 풍경은 스스로 무한정 넓어진다. 곰팡의 번식력도 막을 수 없다. 속도의 가속성과 절망의 나락행 등은 주춤거림을 모른다. 절망과 대결하여 심연에 이르렀을 때 희망을 찾아내야하는 운명을 김수영은 이렇게 노래한 거다. <꽃잎2>도 같은 시다. 금이 간 꽃을 주라고 하고. 떨리는 글자를 믿으라하고,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라며, 보기 싫은 노란 꽃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수영은 6.25 때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이념에 따라 목숨이 살처분 되는 과정을 생생히 목도했다. 이념을 따르면 죽고 살기 위해선 신념을 배반해야하는 상황은 레비나스 말대로 존재가 오그라드는 체험아닌가. 살아가기 위한 자기 설득, 생에 대한 구토, 비루한 타협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김수영의 파토스, 김수영의 존재윤리가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김현은 말했나보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시집을 덮으며 깨달았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았구나. 20대 친구들은 수능국어에서 접한 김수영과 다르다고 신기해했다. 국문학도 출신 냥냥님은 김수영을 전형적인 지식인이자 계몽적인 시인으로 생각되어 불편했는데 그의 시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다시 읽고 싶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서 한 시인이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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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설움버스

[사람사는세상]

#1.

다시 여름이 되나봐. 희망버스 후유증으로 시들었어. 여러 가지로 우울하다.
흠 강정마을에 있다. 여기도 참 심란하네. 곳곳에서 우울한 풍경만 날아다니고 그래. 

한 우울이 다른 우울에게. 뉴스를 보고 마음이 영 좋질 않다. 고객숙인 남자. 폭염주의보까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넋두리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트위터를 하는가 보다. 말이라도 하고 나면 숨통이 트이려나. 깨어있을 확률 100% 심야생활자에게 문자를 전송했더니 제주도다. 이상한 나라. 곳곳에 우울특파원 

4차 희망버스는 유람버스. 시내를 맴돌았다. 청계광장에 있다가 광화문역 화장실을 갔다 오니 대오가 흩어졌다. 난간에 기대 서서 물길 따라 이동하는 깃발 행렬을 보았다. 꼬리가 사라지고 무대 스피커가 떼어지고 현수막이 걷혔다. 서서히 뒤따랐다. 어디로 가야하나 수소문. 본대오는 한은본점. 명동 밀레오레 11. 각각 다른 답변이 왔다. 을지로 입구에서 깃발무리를 봤다. 명동에서 모이겠구나. 안심하고 편의점에 들렀다가 지름길로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비정규직철폐 분홍손수건을 맨 2명의 남녀가 왔다. 그 뿐. 가짜 택이었다. 목적지는 독립문. 버스로 따라가서 합류했다 

12시 독립문 공원 계단. 발이 쑤시고 눈이 아팠다. 새로 산 렌즈가 불량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물감이 컸다. 만화주인공처럼 양쪽 검은자위가 활활 불타올랐다. 물 사러 간 친구에게 식염수를 사다달라고 연락했다. 신을 벗고 눈을 감고 기다렸다. 눈을 감으니 귀가 열렸다. 주위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확성기를 댄 것처럼 크게 들렸다. 욕반 말반. 조폭영화에서 나오는 걸죽한 남도사투리. 전국에서 노동자가 모였음을 실감했다. 핏발 서린 눈 위로 렌즈를 뺐다가 다시 꼈다. 이건 뭐 비에 젖은 나무토막 위로 비가 내린다보다 더 처량했다. 토끼 눈을 달고는 깡총깡총 뛰어서 희망의 토크쇼가 열리는 맨 앞자리로 갔다.

#2.

첫 번째 발언자. 김형우 금속노조 부위원장. 육담이 끝내준다. 막 시동이 걸리려는데 키가 짤막한 50대 아저씨가 무대로 다가간다. “다 자다가 깼어요. 건너편까지 들려요. 내일 일하러 가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떠들면 어쩌구 저쩌구....” 목청을 높인다. 거친 항의와 삿대질이 길어진다. 참다못한 반격. “, 비켜라.” “하룻밤 불편한 것도 못 참냐” “저 새끼 뭐야! 끌어내파란색 셔츠 입은 스머프 아저씨들 사이에 욕설이 빗발쳤다. 선량한 시민이 열 받았다. “내가 왜 욕을 먹어야 돼! 나도 실업자야! *” 누군가 맞받아친다. “야이 *새끼야, 난 해고자다. 일하러 갈 데도 없어! 잃을 것도 없다. *” 결국 거구의 해결사 2인이 나서서 선량한 시민을 번쩍 들다시피 달래서 내보냈다. 상황종료

뒷걸음질 치며 사라지는 그 아저씨가 아른거렸다. 그건 발버둥이었다. 다음 날 일하러 간다며 핏대를 세우더니 1분도 못 되어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나는 실업자다이에 맞서 나는 해고자다옥신각신 싸우는 사람들. 웃겼다가 슬펐다가. 애잔하다. 같은 하늘. 같은 나이. 같은 처지. 같은 남자. 같은 욕설. 같은 설움. 어쩌면 그도 희망버스에서 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들이닥쳤다. 노래공연도 아니고 말소리인 데다가 시끄럽기도 전이다. 잠을 못 자서 온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 온 게 아닐까. 공원 바닥에 앉아 밤새 술잔 기울이며 신세 한탄이라도 하고 나면 그 출구를 찾지 못한 울분이 조금은 사그라질 텐데. 어깨 맞댈 동료가 있는 곳, 자기의 비빌 언덕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찾아가기 마련인가 보다. 아저씨. 나중에 어버이연합 가지 마시고 희망버스 타세요.

#3.

설움이 번져 나오는 기원으로서의 삶. 희망버스에서 생생히 목도한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욕을 들으니 그 때 그 욕이 생각난다. 정독도서관 근처 유명한 청국장집. 창창한 하늘이 훤히 드러나는 마당에서 음식점에서 주방아주머니와 서빙아주머니 두 분이 싸움이 났다. 짧은 순간 심한 욕설이 오갔다. 머리끄댕이를 잡고 늘어졌다. 오랜만에 화끈한 싸움을 목도했다. ‘맛집이라며 거기로 데려간 사람이 무안해했다. 미안하단다. 사과를 반사했다. 삶의 짜증과 피로와 울분이 뒤엉킨 자리에서 발생한 접촉사고다. 그 자리에선 누구라도 당한다. 화폐라는 충신이 있다면 저 분들도 고상과 품격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되도 않는 고갱님 타령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건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저께는 마트 야외매장 신발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직원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도나도 발에 끼어보고 간 구두더미를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하소연이다. 구두가 짝이 없고 사람이 몰리니 힘들다고. 내 또래의 여성이다. 혼잣말로 작게 그런데 강하게 내뱉었다. ‘, 씨발’  

가난한 사람들은 왜 욕을 할까. 예전부터 궁금했다. 인격 문제는 아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 필요가 보장 돼야 품위도 지키고 무소유도 하고 정신적 향유를 누릴 수 있다. 동네 놀이터를 지나다 보면 초딩 애들도 욕을 추임새처럼 넣는다. 목동은 부자동네. 그런데도 왜 아이들이 욕을 할까. 놀기 본능이 억압당해서 같다. 배울수록 잠식당하는 영혼. 암기할수록 가난해지는 머리. 욕은 사회적 약자의 자기표현이다. 욕 잘하는 팀장이 있다면 본부장한테 닦달당해서다. 아도르노는 욕은 사회의 부조리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부당한 가난'을 재생산하는 사회로부터 당하는 모욕을 단어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말된다. 부당한 가난. 억울한 가난. 신경질나는 가난. 모욕이 욕을 낳는다. 인간다운 자기유지가 보장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찰음이 나는 거다. 김수영 시구대로 어린 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운 세상. 희망버스는 설움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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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비 '움직이는 비애'

[올드걸의시집]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김수영전집1 , 민음사 


 



시골구석에서 사는 아이가 희귀난치병이다. 몇 번 들었어도 이름을 외기 힘든 척수성근위축증. 태어나자마자 사지에 힘이 빠진다. 심폐기능이 약해 호흡이 어렵다. 지역 내 큰 병원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억척스레 아이를 들쳐 업고 상경했다. “그래도 큰 병원 가봤다는 소리는 들어야지 원이 없잖아요.” 이런 얘길 들을 때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투박하고 새까만 문신한 눈썹과 실밥 뜯어진 비즈가 처량하게 매달린 네크라인을 멀뚱멀뚱 훑는다. 수년간 그 먼데서 ‘큰 병원’을 다니며 아이의 숨을 이었다. 없는 사람에게 병원체제로 돌아가는 24시간은 혹독하다. 째깍째깍 초침 따라 병원비가 올라간다. 빈 밭처럼 버려진 집구석에 비가 들이친다. 세끼 먹고 사는 일상성의 유지가 힘들다. 번뇌는 물적이다. 궁핍하면 험해진다. 아픈 애가 있는 가난한 부부는 거칠기 짝이 없다. 아파서 가난하고 가난해서 싸우고 싸워서 다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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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올드걸의시집]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혁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기울길 바랐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볕드는 그런 세상을 꿈꾼 건 맞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 시어머니가 아들사랑을 이유로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는 세상. 힘 없는 사람을 보고 같이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런 세상.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 그런 세상. 광장에 나가서 혁명할 주제는 못되고 방구석에서부터 내 주변부터 정리하면서 잘 살아보려했다. 내가 몸 담은 곳, 내 생활반경에서 말이다. 살면서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 같은 날감정을 글로 써보고 나누고 싶었다. 뭔가라도 영양가 있는 생각을 짜내서 그 한방울씩이라도 나누다보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희망.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고 있다. 이방 저방 떠돌면서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피와 살로 삼아 쓴다. 덕이 되진 못해도 남에게 상처주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느데 그럴 순 없을 거 같다. 다 좋을 순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방을 바꾸면서 내 친구 니체를 앉혀놓고 약속한다. 누구에게나 이해받는 글을 쓸 수는 없지만 나를 속이는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글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원한다. 어느 누군가가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고귀한 정신과 취향은 자신을 전달하려 할 때 청중도 선택한다. 그는 청중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단기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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