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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02] 환상의 빛 - 넓어져가는 소란을 위해서 (4)
  2. [2016.01.04] 바닷마을 다이어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 (2)

환상의 빛 - 넓어져가는 소란을 위해서

[은유칼럼]

(*영화의 줄거리가 많이 나옵니다.)

 

영화 <환상의 빛> 초반의 한 장면, 남편이 라디오 소리를 집중해 듣고 있다. 아내가 시끄럽지 않느냐고 묻자 남편이 답한다. 노인네 귀가 잘 안 들려서 크게 틀어놓은 거겠지. 알고 보니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온 거였다. 이것은 분명 ‘벽간 소음’의 일촉즉발 상황인데 영화에서는 라디오를 공유하는 다정한 이웃 풍경으로 그려진다. 소리로 연결된 관계? 이 때부터 난 영화의 ‘빛’보다 ‘소리’가 귀에 감기기 시작했다. 


배경이 기찻길 부근 주택가 가난한 동네다. 부부 사이 아기가 태어났는데 ‘기찻길 옆 오막살이’ 동요에 나오는 아기처럼 순둥순둥 잘도 잔다. 공장에 다니는 남편은 기계 굉음으로 아내가 창밖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에 매진한다. 퇴근 후 두 사람은 단골 찻집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다. 삶이 순조로울 때 일상의 소리도 왕성하다. 그러나 남편의 돌연한 죽음 후 삶은 어둠과 적막이 깃들고 아기의 옹알이만 간신히 일상을 지탱한다. 남편의 부재로 ‘음소거’가 된 듯한 일상은 어항처럼 조용하다. 


몇 년 후 아내는 재혼해 바닷가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머리맡까지 파도소리 밀려오는 방, 두 번째 남편은 아내를 걱정하며 말한다. 처음에는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잘 수도 있다고. 아내는 적응을 위해 노력한다. 마루 계단 닦는 소리, 파 송송 써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수박 씨 뱉는 소리가 무던한 일상의 신호음처럼 들린다. 그리고, 전 남편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도 유품이 된 자전거 열쇠의 방울 소리이고,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도 아내가 스스로 터뜨린 처연한 울음소리다. 


삶은 얼마나 많은 소리로 영위되는가. 돌이켜보니 난 삶이 서툴 때 세상이 내는 온갖 소리와 적대했다. 첫아이 육아기에는 (기차소리는커녕) “고장난 에어컨 테레비 컴퓨터 삽니다.” 하는 무한반복 트럭 방송에 아기가 깰세라 쩔쩔맸다. 글이 안 써질 땐 놀이터의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물론이고 집안의 TV소리, 화장실 물소리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제거하고 싶은 난폭한 마음은 타자의 존재 부정이라는 과격한 상태로 치닫곤 했다. 


영화의 전개처럼 내 삶의 계절도 바뀌고 있다. 아이들이 크고 복닥거리던 집안이 조용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일상 소음의 한복판을 벗어나는 지금, 난 뒤늦게 삶이 내는 소리와 화해하고 있다. 트럭 방송을 켜놓고 운전석에서 잠든 아저씨의 하루 매출이 걱정스럽고,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들이 내뿜는 존재의 활기가 반갑다. 베란다를 타고 넘어오는 이웃집 부부싸움 소리가 불안했는데 요즘은 외려 조용하면 불길하다. ‘사람이 과연 살고 있을까?’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위해서”(‘꽃일2’) 라고 시인 김수영은 노래했다. 세상의 삐뚤어짐과 떠들썩함을 찬미하는 시구다. 가만히 있지 않고 부딪치고 충돌하고 어수선할 때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만드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영화 <환상의 빛>은 비탈길을 자전거로 낑낑대며 올라가는 아빠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넓어져가는 소란을 길게 응시하며 끝이 난다. 아까와는 다른 시간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이웃집 라디오 소리를 즐겁게 받아들이듯,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이 영화는 일상의 소란이 환상의 빛처럼 삶을 감싼다.


-방통대 학보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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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

[은유칼럼]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이웃 아줌마) 장례식으로 끝나는 수미쌍괄식 구성이다. 검은 상복의 여인 네 명이 주인공.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통해 만나게 된 이복 여동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과 집이 주무대인데 잔멸치 덮밥, 카레 등 식사 장면이 많이 나와 군침을 돌게 하니 이 작품을 ‘먹방 영화’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내게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가족 영화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없음으로 채워진다. 다른 가족에겐 있는 것이 이들에겐 없다. 우선 완전한 악인이 없다. 아빠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중심의 이성애 가족의 기본 프레임을 따르나, 부양의무를 진 아빠와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에 헌신하는 엄마라는 틀을 깬다. 아빠는 딴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하고 전처 자식인 딸들과 왕래가 없다. 무려 15년. 엄마 역시 애들 두고 집을 나갔다. 나중에 외할머니 제사에서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엄마를 큰 딸이 원망하자 이렇게 말한다. “엄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부모. 아빠와 엄마는 부재하는 채로 존재한다.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없다. 네 자매가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노동과 밥짓고 빨래하는 가사노동에 모두 참여한다. 각자 돈을 번다. 스스로 밥을 해먹고 매실주를 담그고 빨래를 개키고 일 하고 연애를 한다. 맏언니는 마더 테레사급 품성의 소유자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복 동생을, 가족 파탄의 원인 제공자인 딴 여자의 자식이 아닌 한 인격적 존재로 바라본다. 또래 답지 않게 의젓한 모습에서 일찍이 삶의 무게를 떠안은 자기 자신을 보고 “함께 살자” 손내민다. 

마지막으로 원망이 없다. 아버지의 외도, 죽음, 엄마의 가출, 이복동생의 출현이라는 막장 드라마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딸들이 의연하다. 부모에 대한 미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망하느라 일상을 중지시키는 게 아니라 묵묵히 살아가면서 원망한다. 그러는 사이 삶의 다른 경험이 쌓이고 그것으로 부모를 이해하는 다른 계기를 얻는다. 부모의 빈 자리가 타인의 이해라는 인간적 성숙함으로 채워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부모 없어도 잘 크는 아이들에 관한 가족 판타지가 아니다. ‘정상 가족’이 아니라 ‘일상 가족’을 꾸리는 힘은 상실의 대처, 살림의 기술, 타인의 이해 같은 구성원들 삶의 태도와 역량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강력한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다. 우리는 가족의 가치만 신화화할 뿐 일상의 기술은 소홀히 여긴다. 그래서 소위 정상 가족은 구성원의 독점적 희생과 착취, 무임승차, 원망과 배제의 구조로 돌아간다. 배신과 죽음 등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실의 사건에 무능하다. 불에 대인 것처럼 반응하고 고통을 전가한다. 

영화의 네 자매는 상실에 단련된 신체들로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상실 공동체이고, 그로 인한 원망과 투정을 들어주는 대화 공동체이며, 날마다 같이 밥을 먹는 밥상 공동체다.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더없이 조화롭고 평화롭다. 혈연이 아닌 밥심으로 맺은 관계, 성취가 아닌 상실을 나눈 사이는 이렇게 힘이 세다. 

나는 영화에서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몇몇 이들을 떠올렸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는 고백은 나를 놀래켰고 글에 담긴 삶에 대한 통찰은 나를 헷갈리게 했다. 그들은 결핍된 존재다. 그러나 그들은 넘치는 존재다. 그때마다 나는 질문했다. 결핍은 왜 결핍인가. 결핍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나의 오랜 물음을 영화로 근사하게 증명한 영화다. 글 버전도 있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이렇게 썼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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