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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3]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살기 위해 (8)
  2. [2010.04.26] 소외와 사적소유 그리고 존재의 빈곤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살기 위해

[글쓰기의 최전선]

<경제학-철학 수고>무늬만 책이지 완성본이 아니다. 참고 자료와 초고를 모은 것으로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출판했다. 이 청년 맑스 풋풋하고도 심오한 저작을 읽고 노동/화폐에 관한 글을 써오라 했더니 민원이 빗발쳤다. ‘너무 어렵다’ ‘괜히 샀다며 한숨짓는가 하면 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자괴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가장 대박은 대성씨 글.

국가정보원은 20, 칼 마르크스란 아이디로 공산주의 서적을 출판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김모 씨(25, 무직)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자신을 유럽에 사는 경제학자로 속여 자본론,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경찰 등과 합동조사단을 꾸리고 김 씨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김 씨가 "씨발 책을 존나 어렵게 써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과제 서두에 능청스럽게 가상시나리오를 적어왔다. 저것이 사실인 줄 알고 기사검색을 해본 친구까지 있었다고 해서 우린 또 깔깔댔다. 웃음도 잠시. 높은 빌딩과 넥타이 대신 건강한 삶을 택했으나 노동조건은 열악하니, 이상과 현실의 격차로 인한 청춘의 백팔번뇌를 기록한 대성씨의 글은 아팠다. ‘노동자의 욕구는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일 뿐이다는 맑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배반해야 한다. 나를 휘감은 거대한 거짓말에 초라한 참말로 부딪쳐야 한다로 끝맺었다.

원망이든 탄복이든 맑스는 사고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들 책은 완독하지 못했다지만 글은 맑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었다. <경철수고> 대신 <유러피안 드림>을 읽은 유미샘은 미국인이 일하기 위해 사는 반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한다는 인용구로 글을 열었다. 자신도 4년 전부터 살기 위해 일하기모드로 변환, 하루 평균 6시간 노동으로 줄였단다. 문제는 각종 대출금. 그걸 갚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일하는 코리언 나이트메어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 걱정일랑 날려버리고 무지비한 노력보다 심오한 놀이(완전한 몰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로서의 공부와 '살기 위한 노동'을 병행하겠노라 다짐했다.

대세는 유럽이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정화씨는 선진국에서 잠시나마 살아본 경험을 터놓았다. 한국에선 너무 익숙해서 문제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고.

독일은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쇼핑도 거의 하지 않았고, 외식할 일도 많이 없었다. 일요일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날이다. 집에 모여서 친구들과 음식을 해먹었다. 한국이었으면 돈 들고 음식점으로 갔을 것이다. 그저 일주일에 돈 못 쓰는 날이 하루 생긴 것뿐인데 노는 방법이 달라졌다. 하루라도 돈에 덜 의지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돈이 있어야만 꼭 즐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정화 씨는 이 때의 경험으로 돈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웠노라고 덧붙였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돈은 전능한 신이기도 하지만 감성의 약탈자이기도 하다. 돈에 의지하면 삶의 선택지가 협소해진다. 삶의 상상력, 삶의 해결책이 빈곤해진다. 이게 다 화폐축적 때문이다. “화폐는 불가능한 일들을 친숙한 것으로 만들며, 자신과 모순되는 것들에게 입맞추도록 강요한다" 그렇다고 맑스가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소유 내용에 태클 걸지도 않았다소유형태를 문제 삼았다. 사적소유. 맑스는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우둔하고 일면적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 대신에 모든 감각들이 단순한 소외, 소유의 감각이 등장했다사적소유는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모조리 바꿔놓는다. 대상을 낯설게 한다. 자연은 개발해야할 대상, 인간은 착취의 수단이 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대가 생겨버리는 것. 그래서 맑스에게 사유재산의 지양은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의 해방을 뜻한다.

25세 청년의 사유가 이리도 빛날 수 있는가.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경철수고> 뒷부분 화폐편에는 괴테의 <파우스트> 일부와 세익스피어의 시구도 인용해 놓았다. 맑스의 필체가 힘이 넘치고 시적 아우라가 흐르는 건 그가 문학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매일 아침 딸에게 셰익스피어를 읽어주고 매년 셰익스피어를 반복적으로 읽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무튼 청년 맑스는 인간의 유적본질의 회복을 중시했다. 이는 부르주아 인간학에 열렬히 인용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맑스는 본질-현상의 이원론을 뒤집는다. 인간의 본질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라고 쓴다. 본질이냐 관계이냐,뭐라고 말해도 좋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맑스와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응시하며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사는 법을 고민하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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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사적소유 그리고 존재의 빈곤

[스피노자맑스]

* 소외와 사적 소유  

<경제학-철학 수고>는 경제적 개념(사적 소유/노동/자본/토지)과 철학적 개념(소외)을 절묘하게 엮은 대단한 역작이다. 맑스는 과학은 발생을 설명해야 한다고 봤다. 즉 무엇이 어떻게 산출됐는가를 따지고 든다.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에 대한 개념적 해명은 없다. 왜 어디서 ‘사적 소유’가 발생했는가 묻지 않는다는 것. 맑스는 사적소유를 전제가 아닌 산출물로 다뤄야한다고 보았다. 심연을 파헤쳐 근거의 근거없음을 폭로하는 이 같은 작업은 니체의 계보학 작업과 유사하다.  

“노동자는 부를 보다 많이 생산할수록 더 가난해 진다.” 이 역설적인 사실에서 맑스는 출발한다. 사물 세계에서 가치증식이 이루어질수록 인간세계의 가치절하가 비례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헤겔의 철학적 개념 ‘소외’로서 포착한다. 소외란 무엇인가. 본래의 소유자와 소유물이 분리되어 소유자에 대해 외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맑스는 노동하는 인간이 경험하는 소외를 크게 네 가지 차원에서 지적한다.

1.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생산물이 생산자에 대립해서 낯선 존재로 나타나는 것.
2. 생산행위 자체의 소외. 생산물의 외화는 사실상 생산 자체의 외화가 요약된 것에 불과하다. 활동 자체가 그 주체로부터 분리된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서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낀다.”  

3. 유적 본질의 소외.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서 유적 성격을 소외시킨다. 유적성격은 자기로부터 분리가 가능해 세계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소외된 노동에서는 인간의 유적 성격, 즉 자유로운 활동을 오로지 육체적 실존(동물적 삶)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4. 인간의 소외, 인간만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낯선 힘이다. 인간이 빼앗기는 것은 고스란히 다른 인간에게로 간다. 소외의 문제란 신학이나 종교, 철학의 문제이기 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사회의 문제다.  

소외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 능력의 쇠퇴와 인간 욕망의 협소화(천박화)와 다름 아니다. 이처럼 소외된 노동, 외화된 노동의 필연적 귀결은 사적소유다. 사적소유 때문에 소외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적소유 생겨난다. 

* 소외된 노동 극복  

인간의 사회적 현존재로서의 회귀이다. 인간은 개인일 때조차 총제적으로 존재한다. 사적 소유의 세계에서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다는 감각이 근본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적 소유를 지양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을 해방하는 일이고 다른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욕망하기 전에 그것을 욕망하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공산주의란 감성의 혁명적 전환을 뜻한다.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노동이다.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붙박인 감각은 역시 제한적 감각만을 가진다. 근심에 가득찬 궁핍한 인간은 어떤 훌륭한 연극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각을 갖지 않고, 광물상인은 단지 광물의 상업적 가치만을 볼 뿐이며, 광물의 아름다움이나 그 특유한 본성은 보지 않는다. 소외된 노동이 지배하는 곳에서 경제적 빈곤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의 빈곤이다. 소외의 지양은 결국 인간적 감각의 창조이다. 가난한 자는 세계가 빈곤한 자다.  

"인간은 인간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매개(돈)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네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네 생활 표현을 통해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네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 조야한 공산주의  

맑스는 ‘경철수고’에서 공산주의를 보편적 사적소유라고 말한다. 사적 소유를 단지 외양으로만 판단해서 폐지하려 들 경우 우리는 조야한 공산주의가 부딪힌 문제에 빠져든다는 것. “조야한 공산주의는 지양된 사적 소유의 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보편적 사적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이다.”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사적소유를 보편화하는 것은 노동자를 지양하지 않고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 확장하는 것과 같다고 봤다.

(고병권샘과 공부한 내용 일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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