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글쓰기에 관심이 갔다. 자본주의 역사보다 20배가 더 긴 모성의 역사.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살아온 여성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했다. 세상을 바꿔야할 이유가 없는 남성의 언어로 여성의 삶은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 삶을 이해하기도 설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여성의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네 카페에 가면 머리 맑은 아침부터 엄마들이 둘러앉아 답도 없고 끝도 없는 학원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저 모임이 주부들 독서토론 모임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자식을 향한 일방통행로에서 자기에게로 삶의 물길을 돌리면 엄마와 아이가 더 행복해질 텐데 생각했다. 때마침 여성민우회생협에서 일하는 후배가 글쓰기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문제는 거리가 멀고 강의료가 적다는 건데,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나도 여성의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서이다.
5월 11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일산에 간다. 수업을 두 번 마쳤다. 첫 시간 자기소개 할 때 ‘그동안 아이 셋 키우면서 너무 내가 없이 살았다’며 눈가가 발갛게 젖어든 여성 1인, 두 번째 시간에 자기 글 읽으면서 목이 메어와 낭독을 중단한 여성 2인이 탄생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서서 대신 글을 읽어준다. 옆자리에서 같이 눈물을 닦는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아닌가. 원인도 모른 채 누가 눈물을 흘리면 덩달아 울고 누가 웃으면 따라 웃는 현상. 스피노자는 단지 어떤 신체가 우리와 유사하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그 신체와 유사한 정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서적 모방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인류’라는 집합적 신체를 떠올렸다. 그러니 정서적 모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셈이고, 우리는 정서적 모방으로 인해 인간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다. 진한 감응의 시간. 여성이라는 집합적 신체의 탄생을 목도하면서, 나는 일산이 멀다고 안 가면 어쩔 뻔 했나 안도하며 동시에 감동했다.
기억에 남는 원스텝님의 글. 두 페이지 분량인데 글쓰기 강좌 안내문을 우편으로 받아보고 강의에 오기까지의 심정과 수업을 마친 소감이다.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고 이미 늦었겠지 조바심 내고 아마 정원이 다 찼을 거야 체념하고 그래도 가보고 싶어서 안절부절 하다가 신청하는 상황을 사무실 전화번호 하나하나까지 손끝의 떨림까지 섬세하고 치밀하게 써내려갔다. 그가 낭독할 때 ‘아마 다 찼을 거야’가 무한반복 되자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제목이 아마 다 찼을 거야”냐고 말해 박장대소했다. 유쾌한 분위기는 잠시. “강의를 마치고 내 마음 속 타성과 싸워서 이겨내리라 그리하여 내 감옥에서 한발 내딛으리라 다짐하면서 수업을 끝냈다”며 집에 와서 후기를 쓰기 위해 인터넷을 켜고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묻고 동호회에 회원가입하고 로그아웃까지 하는 힘겨운 장면을, 전태일 평전을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드는 장면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읽어나갔다. 다 같이 웃다가 몇몇이 울었다.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에게 들은 얘기. 중증장애인들이 20년~30년 집에서 칩거하다가 공부하러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특히 집에서 반대가 심하단다. 중증 장애인이다. 밖에 나가려면 씻겨야지 교통편도 마땅치 않지 배우면 요구사항이 많아지지. 가족이 힘들어지는 거다. 적잖이 충격적인 얘기였는데, 여성이 집밖으로 나오기란 장애인이 집밖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싫어하고 본인은 절박하고 과정은 지난하고 그래서 애잔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사는 일이 왜 이리 쓸쓸한가. 3차시 수업을 앞두고 게시판에 썼다. 무슨 얘기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우리 벌써 두 번 만났나요. 총 8회 수업이니까, 일 년이 사계절이라고 쳤을 때 한 계절을 보낸 셈입니다. 봄.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은 쌀쌀한 날씨. 설레고 들뜨지만 뭔가 열심히 시작하는 시기죠. 우리 상황과도 딱 맞습니다. 첫 시간에 여러분이 떨렸다고 했는데 저도 오돌오돌 긴장했답니다. 언젠가 꼭 한번 여성들과 글쓰기수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언젠가 꼭 한번 양조위를 만나보고 싶듯이 말이죠. 그러니 떨렸나 봐요. 마음에 그리던 대상을 만난 거니까요.
글쓰기는 저에게 영원한 '질문'이 될 거 같아요. 어떤 글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써야하는가. 왜 쓰는가. 사실 누가 누구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연애랑 비슷해요. 사랑을 잘 하려면 연애에 관한 고급이론을 배우기보다 한 사람을 만나고 기다리고 질투하고 끙끙대고 헤어지고 이소라 노래 듣고 밤마다 궁상떨고 등등 직접 시행착오를 겪고 '고통을 자산화'해야만 사랑의 기술이 길러지는 것처럼, 글쓰기도 이론을 익히고 잘 쓰기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기'가 중요합니다.
글쓰기 수업하는 동안 우리, 가능한 많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수해보아야 해요. 옆에서 연인처럼 손잡아주고 같이 울어주는 친구들이 포진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다양한 이야기 쏟아내고 길어 올리고 회상하고 곱씹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들어주고 다듬고요. 이미 그랬죠. 지난 수업시간엔 '나가수' 못지않은 폭풍감동과 전율이 있었어요. 일주일 내내 자랑하고 다녔어요. 우리 글쓰기수업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요. 저는 앞자리에서 여러분이 서로 글 읽고 말 건네주고 같이 눈물 닦고 대신 다른 분이 읽어주고 그럴 때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준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름다운 생의 장면을 한눈에 바라보면서 감동했다죠.
한 번 더 느꼈어요. 세상에 늦은 때란 없다는 걸요. 배우고 싶을 때, 절실할 때 시작하면 그 때가 적기 같아요. 과제가 어려우시겠지만, 자신이 살아온 생에 집중하면서 그렇게 진솔하게 계속 쓰시면 됩니다. 직접 부딪혀서 나의 한계를 확인하고 그걸 극복하고 그러면서 나를 확장하는 겁니다. 글쓰기를 얕잡아보세요. 수다를 단지 '문서'로 남기는 절차가 더 있을 뿐이라고요. 여성이라면 이해할 거 에요. 수다에는 급진적인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수다가 길어지고 정리되면 삶의 물길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바뀔 지도 모릅니다. 다음시간, 여름수업에는 8월 태양처럼 치열한 이야기, 팥빙수처럼 달달한 이야기 더 많이 나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