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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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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의 우정전선 며칠 속이 시끄러웠다. 동료들 사이 의견차이다. 한 동료가 쥐 사건의 의미의 재정립을 제안했다. 입장이 갈렸다. 쥐 사건이 나한테는 동료를 잃은 벌집 쑤시는 것 같은 아픈 기억인데, 누구한테는 유쾌하고 유의미한 정치적 싸움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관점이 다르니 기억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니 판단도 다르다. 공허한 말들이 허공을 오갔다. 밥 먹고 책 읽고 글 쓰는 이들인지라, 논쟁이 붙으면 현란하다. 예상대로 그와 그는 정결한 언어와 논리로 매끈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 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한 언어들을 보자니 착찹하고 속상했다. 현실은 남루하여도 글발은 아름다워라. 그것은 불편한 진실을 봉합하는 아니 피해가는 기술의 탁월함으로 읽혔다. 순간, 동료들을 남처럼 불신했다. 거의 동시에 반성했다. 나도 저렇..
상 받다 "엄마는 참 좋은부모구나~" "나도 엄마처럼 좋은부모가 될게~" 일일 삼회정도. 딸아이는 연극적인 대사와 함께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표정의 자애로움이 거의 유치원 원장님 포스다. 한동안 "아빠 착해~"하면서 남편을 격려하더니 이제 나를 더 많이 칭찬한다. 내가 뭘 그리 잘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던대로 했을 뿐이다. 단감을 깎아주면서 먹으라고 하면 "자식을 위해 준비했구나~ 엄마는 참 좋은 부모구나~" 한다. 그저께는 장보러 갔다가 새우가 싱싱하길래 구입해서 아주 오랜만에 깐소새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또 폭풍 감격. 조리과정 내내 지켜보면서 "엄마는 참 자식을 사랑하는구나~" 등을 두드려준다. -.-; 급기야 상장까지 받게된 건 어제 저녁일이다. 낮에 후배를 만났다.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
시담(詩談) 손가락 사이로 물 빠지듯 흘렁흘렁 지나가는 시간. 책 몇장 뒤적거리고 설거지 삼세탕하고 나면 훌쩍 지나가버리는 하루. 그렇게 이틀, 사흘, 나흘...사는 일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포기가 안 되는 시간과의 싸움. 왠지모를 억울함과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 세미나를 하니까 하루는 온전히 내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습다. 논문발표도 아니고 그저 시 한 편씩 돌아가면서 낭독하고 느낌을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말 한두마디 더 얹는 일이 전부다. 이 시 왜 이렇게 어려워요. 글쎄 말이에요. 이게 맞나요? 저게 아닐까요? 정답 뜯긴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처럼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시세미나 제목에 걸맞는 '말들의 풍경'이다. 꽤나 수런거리는. 시 세미나의 여운이 한 이틀은 간다. 감흥이 가시지 않은 상..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 팔던 날 하루는 딸이 그런다. “엄마, 작가 언제 그만 둬?”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그러니까 물음 자체가 비약이다. 당황스럽고 뭔가 자존심도 상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뾰로통해서 물었더니 한다는 말. “엄마가 작가를 그만두어야 저 책들이 다 없어지고 책장이 없어야 거실에 소파를 둘 수 있잖아.” 이것은 깔대기 이론. 딸의 모든 사고와 의견은 공간문제로 귀결된다. 조금이라도 넓은 집에서 멋스러운 가구 갖춰놓고 귀족처럼 사는 게 꿈인 아이다. 질문은 신선했으되 결론은 식상했다. 그래서 까먹었다. 무의식 층위에는 저장된 모양이다. ‘책을 없애고 소파를 구하라’는 명령이. 책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세 가지 사건이 계가가 됐다. 딸의 지령. 알라딘 중고서점 개장. 연구실 이사. 지난달 종로2가에 문을 ..
셀프구원 사실 어떤 일을 겪기 전까지는 자기도 자신을 잘 모른다. 가령, 사이좋은 부부가 있다. 십년 동안 부부싸움 일회도 없이 그림처럼 살았다. 남자의 엄마가 치매로 쓰러졌다. 여자는 그다지 헌신하지 않는다. 남자는 실망한다. 당신 착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어? 다툼이 발생한다. 뭐, 아침마당 같은 소재거리지만 삶의 진실을 내포한 이야기이다. 주위를 보아도 결혼을 통해서 ‘인간의 바닥’을 확인했다는 경우는 흔하다. 바닥을 본 다음, 그것을 깊이로 만드느냐 추락하느냐는 개인의 ‘능력’이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정해진 본성은 없는 거다. 세상과 부딪히고 사람과 부대끼고 하나의 사건을 통과할 때마다 인격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연구실이 이사했다. 연구실 이사 그 자체는 대수롭지 않다. 이사 과정을 통..
시험감독, 그 심란함에 대하여 개학 후 아들이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말한다. 엄마 나 회장(반장)됐어요. 뭐? 가슴이 덜컹했다. 나는 거의 화를 낼 뻔했다.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엄마는 학교일에 신경 쓸 수 없는데 하는 걱정. 니 학업성적으로 해도 되는가 하는 우려. 참고로 1학기 회장과 부회장은 스카이반에서 특별관리 받는 중학교 때부터 유명한 목동영재들이다. 암튼 아들이 나대는 바람에 주사위는 떨어졌고, 나에겐 회장엄마로서 기본적인 책임이 주어졌다. 아주 최소한의 역할만 하기로 다짐했다. 학급 모임에 나갔다. 1학기에는 안 나오더니 임원이 되니까 나오느냐며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쯤은 많은 분들이 인사를 건네는데 뜨끔했다. 며칠 후 1학년 16개 학급 회장단 엄마모임이라고 연락이 왔으나 일이 있어 못 나갔다. 학년대표 엄마에게 전화..
명절 다음 날 명절 전날, 그러니까 여친과 헤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받아들여. 이유를 따지지 마. 이 세상에 논리적 인과성을 비켜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너처럼 헤어진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렸던 인생선배들이 얼마나 처참히 버려졌는가를 예로 들며, 나는 연애사건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연신 설파했다. 내겐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현실로 닥쳤다. 여자에겐 ‘결혼’이 삶의 불합리를 체험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제도장치다.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유형인 나조차도 ‘대 시댁’관련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한다.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제사나 명절은 일박이일 극기훈련 가는 기분으로 임하며 실제로도 혹..
'The Piano' ost by Michael Nyman '오블로모프에게는 그가 숨쉬는 공기중에 언제나 존재가 넘친다. 그의 무위 속에는 소동과 야단법석이 넘치고 있다.아무리 그가 방문의 빗장을 열지 않더라도, 최후의 성가심까지 몰아내고 그의 인생을 누워서 보낸다고 하더라도, 한마디로 완전한 게으름, 아무런 족쇄도 채워지지 않는 혼수상태에 이르기 위해 외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단번에 영원히 끊어버리기로 결심핟라도, 오블로모프에게는 바로 존재라고 하는 이 작품, 무게, 무담, 버릴 수 없는 사업이 남는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파업을 할 수 있다. 단 존재에 대해서만은 예외다.' 아침의 독서. (동문선) 제목이 교회주보 칼럼코너 같다만, 레비나스의 존재 철학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물론 내용은 은혜롭다. 레비나스가 철학학교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