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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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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고양이와 서울고양이 충남 홍성군 지인의 집에 몇몇 친구들과 놀러 갔다. 서울 토박이고 시골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로서는 무척 설렜다. 펜션이나 콘도가 아닌 벽면에 세간살이 다닥다닥 걸린 민가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다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무심히 지나가는 구름을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 시골집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고양이 두 마리. 눈사람처럼 전신이 하얀색 털로 덮인 흰 고양이와 갈색, 흰색, 검정색 얼룩덜룩한 무늬를 지닌 삼색이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두 마리 모두 사람을 따랐다. 흙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꽃구경하는데 다리 아래로 들어와 가르릉거리며 몸을 비볐다. 녀석들이 귀여워 쓰다듬어주는데 몸통 한쪽이 거슬거슬했다. 내가 ‘고양이가 있는 시골집’에 놀러간다고 했더니 고양이 박사인 딸내미가 대뜸 일러준 말이..
저자는 특별하지 않다 얼마 전 나의 책이 한 권 나왔다. 책을 썼다, 책을 냈다 같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난 그걸 책을 ‘낳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에 엄살을 부리고 싶어서다. 정말이지 출간은 출산처럼 지난하고 지루했다.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부족한 데가 보여서 다듬어야 하고, 이제 되었는가 싶으면 빈틈이 드러나 메워야 하는 식이다. 원고를 보고 또 보는 것 외에도 프롤로그, 에필로그, 저자 소개까지 쓰고 또 써야 하는데, 그 과정이 꼭 산통 같다. 괴로움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뭔가 완성될 듯 되지 않고 힘은 점점 빠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 더 용을 써야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온다. “제가 쓴 책이 나왔어요.” 나는 부르튼 입술로 가까운 이들에게 출간 소식을 알렸다. 아이를 ..
말실수가 아니라 말의 퇴행이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열린 장애인 권리 증진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종로경찰서 모 경비과장의 발언이 물의를 빚었다. 모 경비과장은 집회 참가자들을 막고 있던 의무경찰들에게 “여러분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장애인들은 안전한 위치로 이동시켜 달라”고 말했다. 모 경비과장은 또한 “오늘은 장애인들의 생일 같은 장애인의 날”이라고 발언해 참가자들의 공분을 샀다. 나는 기사를 보자마자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 간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밤늦도록 이어지자 경찰 측이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밤이 늦었으니 어서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슴 철렁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가족의 품은 폐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지난해 봄 글쓰기 공부를 하는 벗들과 남산에 올랐다. 열댓 명이 줄지어 20여 분 걸었을까. 벚꽃으로 점점이 수놓인 작은 연못 옆 너른 평상을 발견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든 것은 우리들이 일제히 두 손에 시집을 펼치고 나서다. 제목은 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 시인의 첫 시집이자 가장 뛰어난 시집으로 꼽힌다. 돌아가면서 마음에 드는 시를 한편씩 낭송했다. 이 순간과 맞춤하다며 누군가 「봄」을 골랐다.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병病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 「봄」전문) 짧은 시다. 한자 한자 더듬듯 읽어 가는데 왜 그리 살갗이 간지러운가. 어쩌자..
여자인간의 결혼식 - 신해욱 여자인간 동거 7년, 결별 2년, 재회 6개월 만에 식을 올리는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버스 두 번, 택시 한번, 도보 10분으로 그 먼 나라의 땅을 밟았다. 토요일 오후 차들이 즐비한 복잡한 도로를 이런저런 교통수단으로 통과하자니 그녀가 지나온 길을 되짚는 듯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막판에는 뚫렸다. 야트막한 언덕 안쪽에 그림 같은 성당이 숨어있다. 신부대기실 문을 열었다. 머리에 분홍색 화관을 쓴 후배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사진 촬영에 여념 없다. “안경 안 썼네?” 그녀는 비혼주의자였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식의 절차를 밟는다. 제발 식만 올려다오. 부모의 애원이 통할 만큼 그녀는 외로웠다. ‘이러다가 파리에서 송장되겠다’며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결혼식 준비 과정이 요란했다...
어느 면접관의 고백 마흔 넘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근 20년 만이라 얼떨떨했다. 열 명 남짓 일하는 작은 비영리조직이라도 회사는 회사다. 출퇴근, 야근, 회식, 주간업무회의 등 온갖 직장의 관습을 익히느라 진땀 흘리며 ‘늙은 신입사원’ 노릇을 수행했다. 그런 내가 입사 4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면접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비록 팀원을 한 명 두었지만 직함이 팀장이라서, 조직에서 나이가 많은 죄로 그리되었다. 자기를 신입으로 아는 나한테 면접관을 하라니 자아분열 돋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무실 테이블에는 서류심사를 앞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이백인분이 쌓여있었다. 저 존재의 아우성들, 사각형에 갇힌 면면들. 꼭 무슨 전단지 묶음 같았다. 귀해 보이지 않았다. 옆 자리 ‘젊은 팀장’은 일차 서류를 ..
서점에서 길 잃은 양 되기 좋은 책을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가끔 받는다. 평소 대화가 많고 취향을 아는 사이라면 선뜻 권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난처하다. 책은 기호품이거나 의약품이다. 배경 지식, 관심 분야, 자기 욕망, 독서 습관 등에 따라 또 현재 당면 과제와 자기 아픔에 따라 읽히는 책도 필요한 책도 다르다. 나의 좋음이 남의 좋음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 그래서 나는 서점에 산책을 나가보라고 넌지시 권한다. 서가와 서가를 어슬렁거리면서 내 몸이 어떤 책에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는 거다. 책들에게 책을 소개받는 셈이다. 이는 경험에 따른 조언이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데 80-90년대는 주변에 시가 흔해 즐기기 쉬웠다. 당시 국민 시였던 서정윤의 ‘홀로서기’를 문학소녀들은 거뜬히 달달 외웠다. 인터넷 문화가 ..
첫사랑 고구마 같은 직업 월동 준비로 고구마를 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하려고 검색창에 고구마를 써넣으니 브랜드가 말 그대로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내가 고른 것은 첫사랑 꿀고구마. 달달하고 익살스런 이름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집으로 배송온 상자에도 ‘첫사랑 꿀고구마’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구마를 꺼낼 때마다 킥킥 웃음이 난다. 저 농부에게는 못 잊을 첫사랑이 있는 걸까. 단지 판매 전략으로 고안해낸 말일까. 전원일기 풍의 농촌 멜로가 아니고서야 티라미슈 케이크도 아니고 고구마를 먹으면서 첫사랑이 떠오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쨌든 저 농부는 고구마처럼 촉촉하고 달콤한 기억에 근거해 이름 지었을 테고 그것이 인간 보편 감성의 한 켜를 이룬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다. 나는 그 농부가 참 행복한 직업인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