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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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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기념회를 축하해도 되나요? 아마도 ‘국내 최초’가 아닐까 싶은 ‘절판기념낭독회’가 지난 3월 17일 역촌동 북앤카페 쿠아레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나의 첫책 . 이 책은 여자, 엄마, 작가로 사는 이야기에 시를 곁들인 산문집이다. 2012년 11월에 출간됐는데 출판사의 사정으로 3년 만에 절판의 운명을 맞았다. 절판은 출판하였던 책을 더이상 펴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 예기치 못한 절판 사건을 통해 지난 한달, 나는 출판 만큼이나 값진 경험을 했다. 먼저 물건 파는 법을 배웠다. 출판사에서 남은 책 100권을 내게 보내주었다. 사과 상자 크기 두 상자 분량의 책이 현관에 도착했다. 실물을 보자 아찔했다. 날 풀리면 야외 벼룩시장에서 팔까? 별별 궁리를 다하다가 페이스북에 절판 소식을 알렸더니 ‘페북에서 판매하라’며 ‘사겠다’ ‘..
아들에게 효행 강요하는 엄마 "엄마 생일에 미역국 끓여줘"며칠 전부터 아들에게 졸랐습니다. 스무살 넘었으니까 왠지 네가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지요. 아들은 (미리미리 준비 해놓을 것이지) 아침 9시 반에 눈꼽 떼고 나가서 소고기 한근 사와 싱크대에 아이패드 올려놓고 요리법 봐가며 따라하더니 한 시간 만에 한냄비 끓였습니다. 미역국 완성과 함께 분첩 선물까지.고소하고 짭조름한 까만 냄새가 훅 끼쳐오는 미역국, 첫술을 뜨는데 뭔가 엄마가 아들 낳고 산후조리 할 때 끓여주던 미역국이 겹쳤습니다. 엄마가 낳은 내가 커서 아들을 낳고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 먹고 키운 아이가 자라서 손수 끓여준 미역국을 먹으면서 엄마를 떠올린 겁니다. 눈물의 미역국의 순환.효행 강요하는 엄마의 변. 아들이 자기가 평소 누리는 것들, 끼니 때면 나오는 밥,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오후에 문자가 왔다. 나와 글쓰기를 공부한 학인의 신춘문예 당선소식. 내 생각이 났다고 너무 좋아 구르고 달리고 싶다며 흥분했다. 나도 가슴이 쿵쾅쿵쾅. 헌데 '소위' 순문학 창작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의 등단에 기여도가 있을 수 없다. 물었다. 왜 나한테 고마운 건지 물어봐도 돼? 그랬더니 내가 글쓰기의 물꼬를 터주었단다. 영문도 모르고 기쁘다. 물꼬터. 직분도 예쁘고.슬픔이 많은 친구였다. 금방이라도 울듯한 눈망울이 늘 위태로웠다. 보다 못해 천변 카페에서 만나 눈물 찍어바르며 본격적으로 나눈 이야기들. 버스 기다리며 정류장에서 두서없이 나눈 말들. 새삼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 눈물로 세상을 적시고 투명한 말들을 실어나르길. 슬픔 많은 세상에서 슬픔 많은 존재로 살아가길. 나는 아까 모처럼 필..
내 자취방에 놀러오다 글쓰기 수업 첫날 자기소개를 하면 이런 사람 꼭 있다. "우연히 은유샘 블로그를 알게 되어 오래전부터 봐왔고요. 망설이다가 신청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개강한 수업에도 있었다. 사연이 더 이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복기하면 "책도 내시고...근데 언제부터 글을 잘 안 올리시더라고요. 그럼 내가 직접 보러 가야하나, 인디밴드가 유명해져서 콘서트 열면 보러 가는 것처럼... (웃음)" 뭐 그런 기분으로 왔다고 했다. 쑥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원한 없이 헤어진 옛날 애인 만난 기분이랄까. 그리고 알았다. 내가 블로그에다가 오직 블로그에만 쓰는 글을 안 쓴지가 꽤 오래됐다는 사실을. 전에는 그냥 여기가 내 단골 술집이자, 카페이자, 자취방이었다. 혼자서 오래 머물렀다. 글을 위한 글, 쓰기 위한 쓰기. 목적..
비 오는 날, 혼밥 풍경 혼자 먹는 밥이 '혼밥'이란다. 얼마전에 알았다. 나도 가끔 혼밥을 먹는다. 강의 끝나고 말이 빠져나간 몸에 급히 허기가 몰려올 때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배가 고팠다. 신촌역 부근이라 ‘신촌수제비’를 찾아갔다. 값이 4천원, 맛도 순하다. 건물 모퉁이에 붙어 있던 허름한 음식점은 바로 옆 건물 안 가게로 이전한 상태였다. 여전히 만석. 잠시 후 2인용 자리가 비어 앉았다. 바로 옆 70대로 보이는 할머니도 혼자 앉아 계셨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요. 그럼 거기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잖아.” 할머니는 자기 앞에 앉으라고 했다. 일행처럼 마주 보고 식사를 하자는 거였다. 느닷없는 요구에 당황한 나는 얼른 고개 숙여 시선을 피했다. 자리를 옮겨야하나 말아야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
떡볶이와 케이크 아침 10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한달에 두번 쉬는 식당일을 십년 넘게 하는 엄마. 그러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 차리고 과일 깎고 간식, 저녁반찬까지 만들어놓은 엄마의 이야기를 학인이 글로 써왔다. 엄마의 손이 얼마나 바빴을까. 나도 그런다.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마니 혼자 들어올 딸아이가 마음 쓰여 일을 나가기 전에 싱크대에 매달려있는 시간이 길다. 집에 오면 아이가 먹을 복숭아, 단감, 사과 같은 제철과일을 깎아놓고 떡볶이나 샌드위치를 해놓고 늦는 날에 저녁밥도 해놓고 간다. 우리 꽃수레도 나중에 엄마를 기억하며 '이젠 좀 쉬어도 되요'라는 글을 쓰게 될까. 학인의 글 중 엄마가 해준 간식목록에 '사과넣은 떡볶이'가 있어서 나도 외출 전에 해보았다. 나 홀로 있는 아이들을 생각..
사람은 어떻게 자기자신이 되는가 - 니체 ‘그는 성인이라기보다는 방치된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경우가 아주 흔한 것은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재미에 빠져 조지오웰을 읽는다. 빼어난 미문이라기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 정확한 분석에 놀라곤 한다.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왜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게 보이는 기술자가 되었느냐고.조지오웰의 5년을 생각한다. 그는 젊어서 인도제국경찰에서 일했다. 제국주의의 압잡이 노릇을 했다는 가책에 괴로워하며 스스로 벌을 내린다. 파리와 런던에서 5년 동안 접시닦이, 노숙인을 자처한다. 이 시기의 체험을 이란 책으로 펴내며 ‘작가’로 주목받는다. 조지오웰이라는 필명도 이때부터 사용했다는데, 본문에서 불지옥이 따로 없다고..
폭력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체육계의 폭력문화’라는 제목으로, 글쓰기 수업에서 A가 글을 써왔다. 핸드볼에 입문한 초등학교 5학년 추운 겨울날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경찰진압봉으로 맞은 일부터 대학 체육학과에서도 “대가리를 하도 박아서 두피에서 비듬처럼 피딱지가 떨어져 나온 일” 등 체육학도의 잔혹한 생애사를 생생히 그려냈다. 가해자들 폭행의 근거는 확고했다. 더 많이 때릴수록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 A의 발표가 끝나자 B가 말했다. 이 글이 자기경험과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한다며 ‘반색’했다. 핸드볼부였던 그 역시 매일 흠씬 구타를 당했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코치에게 심하게 맞아 온몸이 부었고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기절하여 병원에 입원했던 일화를 마치 증거물처럼 기억의 서랍에서 떡하니 꺼내놓았다. 좌중은 경악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