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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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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 - 사람, 걷기, 공부의 조합에 마음 설레다 학교 운동장 수돗가 크기의 족탕에 두 발을 담그고 앉았다. 뜨끈한 김이 오르는 온천수 아래로 짚신처럼 쭈글쭈글하고 단풍처럼 붉어진 두 짝의 발이 나란하다. 총 길이 12㎞, 다섯 시간 코스 종착점에서 수고한 발을 달래주는 시간. 오늘 얼마나 걸었나 보자며 한 사람이 스마트폰을 열었다. 1만9000걸음이란다. 나도 열어보았다. 2만2000걸음이다. 아침부터 같은 동선으로 같이 다녔는데 왜 숫자에 차이가 나죠, 묻자 누군가 말했다. 다리 길이가 다르니까요. 맨발의 어른들은 ‘롱다리 숏다리’ 얘기에 깔깔깔 즐겁다. 창간 10주년 기념 규슈올레 걷기 행사에 3박4일간 동행했다. 독자 61명과 길을 걷고 강연을 듣고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나는 여행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닌데 ‘사람, 걷기, 공부’의 조..
김장 버티기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소리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생에 김치노동까지 추가되..
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다 모처럼 한국을 떠났다 돌아온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여행 중이신 거 같아 알리지 못했는데 이재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뒤늦은 부고에 황망함이 몰려오자 그의 장례식에 찾아 뵙지 못한 죄스러움이 커져갔다. 이재순은 2016년 봄부터 한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10주간 같이 공부한 학인이고, 지난 수년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만난 이들 중 최고령자다. 수업 첫날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일흔 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담담한 자기 진술은 힘찬 빗줄기처럼 가슴을 두드렸고 그가 쓰는 글들은 사람은 왜 배워야하는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기에 난 그의 사연을 『쓰기의 말들』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췌장암으로 갑작스레..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3년 전 초여름, 동료들과 전주로 1박2일 엠티를 갔다 왔다고 하니 선배가 말했다. “너는 고3 엄마가 6월 모의고사 보는 날 놀러 갔니?” 이 질책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는데, 6월과 9월 모의고사가 대입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한 시험이란다. 특히 6월 모의고사 성적은 거의 수능 점수로 보면 된다고. 알고 나서도 어리둥절했다. 그렇다면 그날 엄마 된 자로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몰라서이고, 내 정체성이 고3 엄마로 명명된 상황이 뜬금없어서다. 고3 엄마의 본분에 대한 무지와 나태는 11월까지 이어졌다. 수능 날도 도시락 싸서 보내놓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예배당을 갈 수도 없는 노릇. 그냥 광화문 카페로 달려가 책을 폈으나 책장은 그대로다. 아이가 답안지를 밀려 쓰는 건 아닌지 따위의 별별 ..
자꾸 학원에 빠지는 아이에게 십대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읽기, 더 싫어하는 건 쓰기, 더더 싫어하는 건 읽고 쓰기라는 담당교사의 얘기를 듣고, 왜 아니겠나 싶었다. 아이란 어른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존재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어른이 드문 환경에서 아이가 자기 생각을 만들긴 어렵겠지. 한글만 떼면 매일매일 부과되는 학습량을 잠자코 해내다가 스스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활동이 주어지면 얼마나 어색할까 짐작해본다. 우물에서 숭늉 만들기는 누구나 힘든 법이니까.그래서 사실 좀 미안했어. 종이 한장 주고 30분 동안 글 쓰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나는 자신 없거든. 그런데 너희는 써냈어! 어떤 녀석은 문자메시지 치듯 일분 만에 서너줄을 쓰고, 다른 아이들도 대여섯줄 쓰고 노닥거리는데, 그 어수선한 와중에도 너는 미동도 않고 지면을 ..
지금, 여기에서 사라진 십대라는 존재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마주할 사회의 모습이 달라질 테니 투표권 없는 우리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저 어른들이 멀쩡한 사람을 뽑아주기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어리숙한 권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네 또 어른들 흉내 내니? 너희들이 뉴스 볼 시간은 있니? 맨날 페이스북이나 하면서 확실한 정보도 아닌데 함부로 말하고. 쓸데없는 얘기 할 시간에 영어 단어 한 개라도 외워라.’ 과학 선생님이었다.” 지금은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이 쓴 글이다. 읽는 내내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 교사처럼 노골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아이들을 한 자락 낮게 보는 시선이 없다고 말할 수 없어서다. 한데 저 글이 말해주듯, 사실 뭘 모르는 건 어른들이다. 적어도 청소년에 대해..
은유 읽다 -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비닐 천막을 걷어내자 두어 평 남짓 평상이 휑하니 드러난다. 이중 삼중으로 깔려 있던 돗자리 바닥 아래 플라스틱 지지대 사이엔 여름휴가철 해변처럼 쓰레기가 나뒹군다. 스티로폼 조각, 캔 음료, 빵 비닐들, 그리고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고양이 똥이 발견됐다. “이게 주범이었어!”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농성장. 709일 만에 대청소를 유발한 주된 요인은 고양이(배설물)다. 농성장을 드나들던 고양이 서너 마리가 좁은 틈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는 바람에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고. 찬바람도 불어오니 월동 준비 겸 대대적인 리모델링 계획을 세웠다.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대청소 공지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출동했다. ⓒ시사IN 이명익“의사란 이름을 떠난 지 5년쯤 됐어요. 그런데 인..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남자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 남자들도 알고 보면 돈 버느라 불쌍하거든요.” 강연을 마치고 질문 시간에 손을 든 중년 남성이 말했다. 난 강연 내용을 재빨리 복기해보았다. 남자를 밉다고 했나? 그렇지 않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곤란과 불편, 내가 만난 여성들이 당한 폭력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남자보다 여자의 불쌍함을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것을 두고 남자에 대한 미움, 투정, 원망으로 받아들이고 그는 동정과 배려를 당부했다. 당황한 나머지 난 말을 얼버무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답변 시나리오를 짜보았다. “제가 남자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어떤 대목에서 받으셨어요? 전 여성의 삶을 이야기했거든요. 선생님이 여성이 겪는 아픔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