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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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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 괴산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갔더니 연탄난로가 서있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보곤 처음이다. 동창이라도 만난 듯 다가갔다. 불꺼진 난로 옆에 연탄 여덟 개가 대기 중이다. 어릴적 엄마랑 외출했을 때 엄마는 연탄불이 꺼질까봐 늘 발을 동동거렸다. 연탄 구멍 사이로 엄마의 초조한 눈빛이 보인다. 너는 누구를 위해 한번이라도 연탄을 갈아봤느냐, 유명한 시구를 내맘대로 고쳐 써본다. 대합실 벽면엔 ‘축 발전’이 새겨진 거울이 걸려 있다. 서울에서 고작 두 시간 이동했는데 다른 시간대에 떨어진 영화 주인공처럼 나는 두리번거린다. 괴산 솔멩이마을에 글쓰기 강연을 왔다. 섭외 제안이 연애편지 같았다. 진즉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못하다가 사업비가 생겨서 부른다는 사연. 가난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괴산이라서 더 그랬을까. 괴산..
다가오는 말들 나를 과시하거나 연민하기 바쁜 시대,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 되는 시대. 《다가오는 말들》은 이런 ‘나’ 중심의 시대에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일의 가치를 역설한다. 은유는 우리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때 내가 가진 편견이 깨지고 자기 삶이 확장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나는 나와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면서 세상도 좋은 쪽으로 약간의 방향을 틀게 된다. “글쓰기를 배우려다 인생을 배웠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얻은 《글쓰기의 최전선》과 《쓰기의 말들》, 여성이자 엄마로서 살아오며 겪은 편견과 차별, 외로움과 절망, 울분을 여러 편의 시와 엮어 풀어내면서 독자들이 잊었거나 몰랐던 감각을 깨워준 《싸울 ..
로마에서 엄마를 보다 영화 의 주인공은 연애를 하다가 아기를 갖는다. 임신 사실을 극장에서 연인에게 말한다. 스크린을 등지고 여자의 몸을 탐닉하던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영화도 안 끝났는데 어딜 가냐고 여자가 묻자, 금방 올 거라며 뭐 사다 줄까? 묻기까지 하더니만 결국 오지 않는다. 남자는 종적을 감춘다. 이후 남자의 행동은 예상대로라서 슬프고, 예상치 못한 대목에선 참담하다. 주인공의 성정은 외유내강하다. 유명한 회화 속 ‘우유 따르는 여인’처럼 매일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만삭이 되도록 수행한다. 영화 끝무렵 딱 한번 감정의 수문을 연다.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며 목 놓아 운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남자를 비난했고 여자를 연민했다. 여자의 엄살 없는 살아냄을 존경했다...
조지오웰의 믿음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첫인상은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나는 무시무시한 소음에서 비롯된다. 갱도 안에서는 멀리까지 볼 수가 없다. 램프 불빛은 뿌연 탄진에 막혀 얼마 뻗지 못한다.” 조지 오웰이 쓴 의 한 장면이다. 1936년 영국 북부지역 탄광노동자의 실상을 기록한 오웰은 그곳은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던 지옥 같았다”고 말한다.오웰이 묘사한 지옥을 얼마 전 나도 보았다. 석탄 먼지 어둑한 공간을 밝히는 희미한 손전등. 굉음을 내며 굴러가는 컨베이어벨트. 그 아래 수십개 구멍에 몸을 반으로 접어 머리를 넣어 살피고 바닥에 떨어진 석탄을 삽으로 치우는 사람. 2㎞ 넘는 동선을 오가며 일명 ‘낙탄 작업’을 나 홀로 처리하던 스물넷 청년은 기계에 빨려들어가 몸이 분리된 채 숨을 거둔다. 태..
그렇게 당사자가 된다 찬 바람 불자 동네마트 앞에 미니트럭이 등장했다. 붕어빵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호떡집이다. 호떡을 사며 혹시 붕어빵은 안 팔 계획인지 물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젓더니 “에유, 반죽하면 어깨 나가요. 그거 못해서 이제 호떡이랑 핫도그만 팔아” 한다. 게다가 붕어빵이 다 프랜차이즈라서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단다. 핫도그랑 호떡에 승부를 걸고 있으니 꼭 맛을 평가해달라고 아저씨는 신신당부했다. 세가지 사실에 놀랐다. 붕어빵에까지 자본 시스템이 침투했으며, 누런 주전자에서 수도꼭지의 물줄기처럼 흘러나오는 흰 반죽은 극한 어깨 노동의 산물이었고, 호떡 레시피도 계속 업데이트된다는 것. 세상에 쉬운 일 없다고 말하면서도 난 붕어빵 장사를 만만하게 여긴 듯하다. “퇴직하고 농사나 짓겠다”는 말이 농사에 문외한이어서..
자식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 글을 낭독할 차례가 됐는데 침묵이 흐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온 얼굴로 눈물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 잠시 후 그가 청했다. 누가 대신 읽어달라고. 그가 쓴 글에는 “한번 내기 시작한 화는 산불처럼 번져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온다고, 그 무렵 네시간마다 깨어 수유하던 나로서는 아이를 공감하기보다 억누르고 명령하는 편이 수월했다”와 같은 문장이 담겼다. 제목은 ‘좋은 엄마’. 글쓰기 합평 시간에 애 키우는 여성 필자의 낭독 중단 사태는 종종 벌어진다. 피로감과 죄책감의 잔가시가 목에 걸려 그렇다. 애한테 짜증 내서, 충분히 못 놀아줘서, 모유를 못 먹여서, 아픈 애 떼어놓고 출근해서 등등.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가책과 한탄의 목록은 언뜻 사소해 보이나 그 사소한 일은 놀랍게도 ..
작가의 연봉은 얼마일까 한번은 강연장 포스트잇에 이런 질문이 쓰여 있었다. ‘연봉이 얼마예요’. 그걸 읽고 다 같이 웃었다. 연봉 있는 작가라니! 참신한 오해다. 하긴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며, 희망 연봉을 제시했다. 여러모로 앞서갔다. 지금 시대엔 직업을 이해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이 돈이다. 연봉이 높으면 좋은 직업, 낮으면 안 좋은 직업. 그 기준으로 작가는 연봉 책정이 불가능한 이상한 직업이다.일부 소설가나 시인은 대학교수, 편집자 같은 직업을 겸한다. 최승자 시인은 그 훌륭한 작품을 쓰고도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냈다. 전업 작가는 고정 수입이 없다. 주된 활동이 책 펴내는 일이고 저자 인세는 대개 정가의 10%다. 만삼천원짜리 한권 팔리면 저자한테 천삼..
누군가와 항상 함께한다는 느낌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엠티에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는 문자가 ‘콩(공유정옥 활동가)’에게 왔다.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1023일 농성을 마친 기념으로 농성장을 지켰던 이들이랑 강릉 바닷가에서 2박3일 편안하게 쉬다 올 예정이란다. ‘시간이 되나’ 머리를 굴려본다. 시간과 돈을 거래하는 시대. 시간이 화폐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돈으로 보상되는 일 위주로 시간을 살뜰히 썼구나 싶다. 그건 잘 살았다기보다 초조하게 살았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건 다르다. 사적 여행도 아니고 공적 활동도 아니다. 작가 초청 강연 말고 그냥 같이 놀자니까 좋아서 짐을 쌌다.“아유, 바쁠 텐데 어떻게 시간이 됐어?”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가 활짝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