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유칼럼

(136)
계모임 말고 책모임 추석 무렵 글쓰기 수업에서 한 삼십대 여성은 명절과 제사 때 시가에 가지 않는다고 썼다. 이유는 이랬다. “가족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오히려 가족 단위로 다시 뭉쳐 또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다.” 이 이상한 전통이 자기 선에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내린 결정이며, 편가르기와 뒷담화의 자리를 대신해 부모님을 따로 찾아뵙거나 같이 여행을 가는 식으로 효행을 실천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쁜 며느리’라는 친척들의 냉담한 시선을 감수하는 이행기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나는 그가 질긴 관습을 끊어낼 수 있었던 용기와 언어의 원천이 궁금했는데 글에는 나오지 않아서 물었다. 엄마의 당부란다. 대가족 집안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딸에게 완벽하려 애쓰지 말라고, 길게 볼 사람들이니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율하..
'그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김순자는 1979년에 삼척고정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원가족 12명과 함께 잡혀갔다. 남편은 딴살림을 차렸고 열 살, 일곱 살, 네 살 삼남매만 남겨졌다. 외가 쪽 친척은 다 구속됐고 친가에선 외면했다. 엄마의 복역기간 5년간 아이들은 이집 저집 떠돌며 컸다. 학교에선 ‘여간첩의 아이들’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큰딸은 학교 갈 차비도 없는데 설상가상 생리를 시작했다. 한번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져서 아무 부잣집에 들어가 청소해드릴 테니 돈 좀 달라고 해 생리대를 샀다고 한다. 3년 전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다. 고문보다 오래가는 상처로 김순자는 큰딸의 생리대 일화를 언급했다. 나 역시 인상깊었다. 큰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간첩사건은 같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딴 세상 일로 알았는데 내 또래가 이..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
졸음과 눈물 한 중학교에 오전 강연을 갔다가 급식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12시 반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싶었다. 돌아서면 허기가 올라와 2, 3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고도 점심시간엔 매점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배고픔을 참고 강연을 듣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정말 잘 듣고 싶었는데 잠깐 졸았다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는다. “근데 원래 1, 2교시엔 아침잠이 덜 깨서 졸려요. 3, 4교시엔 배고파서 힘들고요. 5, 6교시엔 점심 먹고 난 뒤라 비몽사몽이고 7교시엔 좀만 있으면 학교 끝난다는 생각에 들떠서 또 집중이 안 돼요.”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가 이내 짠해졌다.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겠지만 결국 학교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인가..
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이거 대화 아닌데요? “엄마 아빠가 대화하자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편하게 말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앉아 있는 게 힘들어요.” 글쓰기 수업에서 스무살 학인이 말했다. 대화는 관계의 윤활유라고 아는 난 혼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부모가 운동권 출신이란다. 어릴 때부터 지속된 소통형 참교육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자식이 보기에 부모는 돈, 힘, 지식을 다 가진 강자다. 자식의 생살여탈권, 적어도 용돈권을 쥐고 있다. 그런 비대칭적 관계에서 약자는 발언의 수위를 검열하거나 잠자코 들어야 하는 정서 노동을 피하기 어렵다. 대화가 배운 부모의 좋은 부모 코스프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은 나도 ‘이만하면 좋은 부모’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자 서로 바빠서 대화는커녕 대면 기회가 줄..
페인트 눈물 고양이 무지는 아침마다 베란다 창틀로 뛰어오른다. 18층 꼭대기는 세상을 관찰하기 좋은 전망대다. 그런 고양이의 의젓한 뒤통수를 나는 책상에서 감상하곤 한다. 하루는 무지가 생소한 울음소리를 냈다. 옆동 옥상에서 먹잇감인 새를 봤을 때 내는 우렁찬 야생의 소리랑은 달랐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아파트 난간에 사람이 있다. 24년 된 단지의 페인트칠이 시작된 거였다. 작업자는 밧줄에 매달려 페인트 스프레이를 빠른 손놀림으로 뿌려댔다. 방석만한 깔개에 엉덩이를 댄 그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떠 있었다. 간당간당 흔들리는 사람을 보자 현기증이 났다. 건물 벽에 붙은 사람이 지상에서는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데 같은 층 높이에선 인체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커튼을 닫았다. 무지는 꼼짝 않고는 간간히 요상한 소..
죽은 자는 정말 사라지는가 “애들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이제 마음에 묻어라.” “교통사고다 생각해라.” “시간도 흘렀는데, 옛날처럼 같이 산에도 다니고 만나서 술 한잔도 하자.” “아이를 잃은 건 슬프지만 너는 그만큼 보상을 받지 않았냐?” 세월호 유가족이 들었던 위로의 말들이다. 상대방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유가족을 배려하는 행동도 배려가 되진 않았다. “유가족입니다” 하는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시킨다. 커피 한 잔, 물 한잔 마시려고 해도 “앉아계세요, 제가 타드릴게요.” 하고 어딜가도 유가족 자리는 따로 마련한다.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된다. 유가족이 술을 시켜도 되나, 화장은 해도 되나, 여행 간다고 손가락질 하면 어쩌나 지레 주눅이 든다. 세월호 5주기에 맞춰 발간된 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