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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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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_은유 편 설날 일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 사골국물을 데워 떡국을 끓였죠. 배우자는 당직이라서 출근했고 저만 아이들과 식탁에 앉았습니다. 김치 반찬 하나에 대충 첫끼를 때우고 나갈 준비를 했어요. 간밤에 쌓인 눈이 고와서 고궁에 갑니다. 아이들과의 외출. 나는 자동문을 지나가는 것처럼 유유히 현관문을 통과했습니다. 더이상 손댈 게 없네요. 각자의 방에서 각자 옷을 챙겨 입고 나와 각자의 교통카드를 찍죠. 어른 하나에 아이 둘이 아닌 관계. 양쪽 발에 달린 두개의 쇠사슬 같았던 아이들인데 어느새 분리됐습니다. 눈 내린 세상은 환해도 마음은 내리 어둡죠. 나는 아직도 명절이 즐겁지 않습니다. 최근 2~3년 동안 코로나, 작업 등을 이유로 시가에 가지 않았고 차례도 없어졌어요. 시가의 사슬도 저절로 풀렸습니다. 가부장제..
은유의 책편지 - 우리가 옳다! “90년대 초반 즈음 어느 노조에 강의를 갔다. 앞 시간 강사가 노무현이었다. 노조에서 활동보고 자료집을 주었다. 우연히 회계 보고를 보게 됐는데 그날 강사료까지 미리 집행한 내역이 나와 있었다. 노무현 50만원, 김진숙 10만원. 평소 노조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강사료를 묻지 않고 갔다. 그때 처음으로 강사료를 문의했다. 강의 내용이 차이가 났는가? 아니랬다. 그렇다면 변호사와 (해고)노동자라는 직업에 따른 차등 지급이 아닌가. 노조 간부에게 말했다. 노동자도 노동자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대접하겠습니까? 그날 강사료는 받지 않았다.” 김 지도님이 인터뷰 때 들려주신 일화가 생각납니다. 두 분이 부산에서 노동운동을 같이했다는 사실이 같은 사업장에서 강의한 얘기를 듣자 실감이 났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여운..
은유의 책편지 - 어쩌면 이상한 몸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란 가사가 귀에 감겼어요. 어떤 연애가 평범한 걸까요. 한 친구는 수차례 파국을 맞으며 지독한 연애를 했습니다. 애인과 사이가 좋을 때는 소식이 없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제게 연락이 왔죠. 실망, 상처, 불화의 말들이 눈송이가 아니라 흙먼지처럼 날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같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죠. “당장 헤어져.” 당신이 보낸 편지에도 이성애 연애 서사가 담겨있었습니다. 첫줄부터 놀라웠어요. “때리거나 욕한 적은 없어서” 임신중단(낙태) 수술을 몇 차례 하면서도 수년을 그와 만났다고요. 다행히 지금은 “죽음 앞에서 도망치듯”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나요. 아마..
은유의 책편지 - 아이들의 계급투쟁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면 학생들이 제게 묻곤 했습니다. ‘자기소개서 잘 쓰는 법’이나 ‘문창과를 반대하는 부모님 설득하는 법’ 같은 것을요. 그런데 그날 당신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죠. “저는 대학에 진학할 뜻이 없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속이 없어지는데 누구랑 책을 같이 읽고 토론을 해야할까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대학에 안 간다는 학생도 처음, 제도교육 바깥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제기한 당사자 학생도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통통 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떠오르는대로 말했습니다. 관심 있는 시민단체나 정당에 들어가 청년모임 활동을 하거나 가까운 동네책방을 찾아가보라고요. 어디 마음 붙일 곳을 찾았는지요? 저도 당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계속 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성별, ..
은유의 책편지 - 분노와 애정 “산후통에 우울증까지 와서 힘든 시간이었어요. (…) 저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어요. 시도때도 없이 눈물나고, 몸도 마음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고요.” 생후 50일 된 아기 사진과 함께 당신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소식 전해주어 고마워요. 아기는 예쁘고 당신은 아프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반은 웃고 반은 울고 태극 문양처럼 둘로 나뉘었어요. 붙여 쓴 네 번의 ‘너무’가 꼭 길게 늘어진 비명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안쓰러운 마음에 ‘어서 만나 수다 떨자’는 답장을 부랴부랴 보냈는데요, 얼굴 보기 전에 급한 대로 당신과 사려깊은 대화를 나누어줄 위로의 사절단을 파견하려 해요.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등 여성 작가 16명인데, 그들이 엄마됨에 관해 쓴 글을 모..
은유의 책편지 - 아침의 피아노 초여름 장마답게 그날은 종일 비가 내렸지.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린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밤, 나는 시인처럼 등불을 밝히지는 않고 어둠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어. 투명 이어폰을 낀 것처럼 뜻 없는 빗소리에 귀를 대고 가만히. 눈떠 보니 새벽 5시네. J도 깨어 있을까. 그대는 가끔 이 시간에 SNS에 짧은 글이나 밀린 사진을 올리곤 했지. ‘벌써 일어남?’ 문자를 보내면 ‘아직 안 잤다’거나 ‘22시간째 깨어 있다’ 했어. 원고 쓰느라 밤을 새우곤 하는 그대의 체력이 부러웠어. 한 줄도 쉽게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좋았지. 그대가 툭 말했어. 건강검진을 했는데 유방암 소견이 나왔다고. 나는 많이 놀랐네. 울지는 않았어. 책에 길들여진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부터 찾지. 기쁠 때는 놀고 슬플 때는 읽지. 에 ..
은유의 책편지 - 소금꽃나무 ‘저는 그동안 마치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된 것처럼 타인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 인생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습니다. 불우하고 불행했던 어린시절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애썼고, 가난을 벗어나고부터는 착한 사람, 유능한 교사를 연기하며 자신을 억눌렀습니다.’ 캐릭터 편지지에 쓴 손글씨가 반가웠습니다. 귀여운 형식에는 쓸쓸한, 그런데 단단한 씨앗 같은 직시의 말이 담겼고요. 속사정을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이 보는 나에 ‘연연하는 삶’은 ‘연기하는 글’을 낳곤 하죠. 그런 글엔 직업이나 가족관계 같은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어요. 퍼즐 한조각 빠진 것처럼요. 그건 글쓴이가 실수로 빠뜨린 게 아니라 일부러 넣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요.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언프리랜서 생존기 유채꽃 사진이 sns에 올라올 무렵 제주에 갔다. 출발 전까지 원고를 마감하려고 했으나 끝내지 못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면, 잠이 안 오면, 설마 바다를 보는 일이 지루해지면 ‘한 줄’이라도 쓸까 싶어 노트북을 챙겼다. 안 읽을 것을 알면서도 기필코 시집 한 권 끼워 넣듯, 안 쓸 것이 확실하지만 뺄 수도 없다. 노트북은 여행자 보험처럼 사용 확률과는 상관없이 ‘있음’만으로도 심신 안정에 기여한다. 일박 이일 동안 가방에서 곤히 자던 그것을 공항 검색대에서 주섬주섬 꺼낼 땐 혼자 머쓱했다. ‘에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겁긴 또 왜 그리 무거운지. 이 딜레마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랑 식사를 했다. 그가 메고 나온 검은 쇼퍼 백 안에 납작한 쇳덩이가 얼핏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