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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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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들 / 이영광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마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아름다운 적(敵) / 강정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 맨발 로 걷는 많은 꽃들을 피워야 한다 부풀어오르는 공기 를 뜯으면 뜯을수록 너는 더욱 선명한 나의 적이 된 다 유일한 대안, 유일한 결론, 유일한 삶이 된다 공 기처럼 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내가 아 름다운 적인 너에게 내 큰 입을 내민다 내 입이 닿았 기 때문에 너는 아름답다 네 입과 닿았기 때문에 추 해진 나를 너는 더욱 추하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네가 만든 추함마저 아름 답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알면 알수록 네가 추해 진다 너도 나를 몰라라 숱한 꽃들이 자기 이름마저 지울 만큼 부풀어 너를 보는 나의 추함을 지운다 너 의 아름다움에 칼을 쑤시는 내 아름다운 음악을 맨발 로 더듬는다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한끝으로 ..
감각 / 랭보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 김현 옮김, 민음사 날씨가 풀려서 아이폰이 생겨서 음악을 들으면서 출근길에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이십분 정도 걸린다. 찰흙으로 빚은 것처럼 귀에 착 들어맞는 이어폰으로 들으니 음악이 찰지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이 완전 차단되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이 쭉쭉 열렸다. 2월의 쌀쌀맞은 아침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여기가 영화 촬영장이고 카메라가 나만 비추기라도 하는..
피의 샘 / 보들레르 이따금 나는 내 피가 철철 흘러감을 느낀다. 장단 맞추어 흐느끼는 샘물처럼. 긴 속삭임으로 흐르는 소리 분명 들리는데,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상처는 찾을 수 없다. 결투장에서처럼 도시를 가로질러 내 피는 흘러간다. 포석을 작은 섬으로 바꾸며, 또 모든 것의 갈증을 풀어주고, 도처에서 자연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취하게 하는 술에게 나를 파고드는 공포를 하루라도 잠재워달라고 나는 자주 하소연했건만; 술은 내 눈을 더욱 밝게 귀를 한층 예민하게 해줄 뿐! 사랑 속에 망각의 잠을 찾기도 했으나; 사랑이 내겐 오직 저 매정한 계집들이 내 피를 마시도록 만들어진 바늘방석일 뿐! - 보들레르 지난 가을 내가 월급생활자로 취직했을 때, 주위 반응이 대개 비슷했다. 어떻게 이렇게 취직이 빨리되느냐,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를..
마포구립서강도서관 <올드걸의 시집> 독자와의 만남을 1월 31일 오후 7시 30분 마포구립서강도서관에서 만남의 자리가 마련됩니다. 일명 독자와의 만남입니다. 도서관과 청어람미디어 출판사에서 만들어준 자리이고, 저는 쑥스럽고 부끄럽고 민망하고 숨고만 싶은 심정입니다만, 그래도 설레기도 해요. 친구들과 지인들 반응은 뜨거운데 대중은 무관심한-.-; 저의 책에 대해서 '책을 사랑하는 마포구민'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시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강연과 책-시에 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1월의 마지막 날 저녁. 춥고 쓸쓸한 겨울밤, 심심하거나 저 보고싶은 분들 오세요. 따뜻하고 즐겁고 유의미한 시담 나누어 보아요.^^ (지난주 생파 때, 시세미나에서 은재가 선물해준 망고타르트로 케이크 점화식) 시는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
황지우 / 눈보라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내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사람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김우창 평론집 - 궁핍한 시대의 시인 시세미나 시즌 4의 마지막 순서로 김우창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읽었습니다. 양장본의 딱딱한 물질성만큼이나 내용도 묵직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역시나 시세미나의 마법으로 십시일반 경험과 이해를 나누며 우리는 희미하던 인식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과정을 눈덩이가 달로 뜨는 그림으로 표현해준 진스님이, 김우창 전집이 머리말부터 좋았다며 감명 깊었던 문장을 읽어주었죠. 일의 시작은 결단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시작의 의지를 하나로 굳히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역량의 부족함과 제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망설이는 것은, 상황의 불균형과 예측불가능 속으로 자신을 던졌을 때 그에 따르는 책임이 두려워서라는 내용입니다. ..
학살1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