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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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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올라잇 - 여성가족에게 희망을 남자는 다 그래 지난겨울 스위스 갈 때 일이다. 인천공항에 근무하는 남편친구가 나와서 수속을 도와주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가급적 가방을 줄이라'는 충고에 따라 짐을 통폐합하다가 비행기에서 읽을 책들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중 한 권이 다. 남편친구가 대뜸 묻는다. “아직도 이런 책 읽어요?” 남편친구는 연애할 때부터 나랑 정치적 문화적 취향이 같아서 대화가 통하던 소설가 지망생이다. 난 독일 맑시스트 그룹에서 쓴 건데 재밌고 명료하다며 일독을 권했다. 책을 뒤적이던 그가 웃으며 한다는 말. “어휴, 마누라가 이런 책 읽으면 힘들겠다~” 순간 당황했다.“이게 왜요, 가사노동을 거부할까 봐요?ㅋ” 동시에 남편의 얼굴이 말풍선으로 떠올랐다. 남편은 또래집단에 비해 기적적으로 가부장지수가 낮다. 그래서 가..
아저씨 - 원빈의 소통판타지 나는 멜로에 목이 마르다 어쩐지 요즘 따라 멜로작품이 보고팠다. 삼복더위엔 공포보다 멜로다. 도대체 일분에 한 장 씩 티슈 뽑아가며 영화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원빈의 아저씨는 큰 기대를 안 했다. 액션물이고 여주인공은 꼬마아이다. 레옹 스타일? 멜로라인이 약할 거라 여겼다. 거기다가 죽고 죽이는 액션물이라니 끔찍하다. 그래서 이번 영화의 관람목적은 오로지 ‘안구호강’으로 삼았다. 일단 원빈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에 빠져보겠다는 심정. 목적 200% 달성! 는 멜로판타지다. 원빈이 제대로 멋지다. 얼굴을 반쯤 가린 헤어스타일은 애처롭고 신비롭다. 검정 수트발은 날렵하고 기품있다. 멜로배우의 요건은 미소보다 눈빛, 대사보다 침묵이다. 무심한 듯 섬세한 표정은 압권이다. 액션이 과해도 수컷스럽지 않은 ..
하하하 - 그리 대단한 사랑은 없다 나를 키운 8할은 오빠들이다. 지나고 보니 열아홉 이후에는 늑대소굴에서 살았다. 그들을 남자로 보았을 리 만무하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 성적인 것에 무지했다. 순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줄도 모른 채였다. 당시 내게 남자란 이성理性. 다른 성별이 아니라 합리적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말도 통하고 배우는 것도 많고 즐거웠다. 좋은 사람의 좋은 기운에 끌렸고 그들도 나를 국민여동생처럼 예뻐했다. 가장 따랐던 선배A. 나의 사수였다. ‘대학에 가도 이런 공부만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몇 개월 토요일에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녹두에서 나온 감색 책 ‘세철’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책을 읽고 묻고 답하고 정리했다. 영화 보면 과외선생님이랑 정분이 나기도 하던데 ..
이창동 시 - 막힌 것들을 뚫는 詩 나는 시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이 막막할 때 삶에 지칠 때 처방전을 찾기 위해 시집을 편다.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오만가지 상처의 사례가 시에 들어있다. 발생 가능한 사건과 충돌 가능한 감정이 정결한 언어로 상차림 돼있다. 시를 읽다 보면 생각이 가지런해지고 울렁증이 가라앉는다. 시라는 언어의 상찬 덕에 삶은 종종 견딜만해진다. 식탁위에 말라붙은 김칫국물도 생이 흘리고간 빨간 구두발자국이 된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계를 감각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충분히 아름답다. 시 안..
경계도시2 - 내겐 너무 잔혹한 공포영화 상상초월 공포영화였다. 내겐 그랬다. 를 보는 내내 가슴이 옥죄어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주먹질 한 번 없지만 몹시 야만적이고, 장황한 말들이 오가지만 그럴수록 답답하다. 육신이 난도질 되어 유혈 낭자한 것 이상으로 영혼이 짓밟히어 비쩍 말라가는 것도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는 송두율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세계인이 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그. 만리타국에서 1970년대 한국의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유럽 지역 반체제 운동을 주도한다. 학자로서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하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한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김일성 장례위원으로도 참석했다. 그에 대해 국가정보원은 북한 권력서열 23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인물이라고..
작은연못 - 노근리라고 쓰고 대추리라고 읽는다 시사회 날. 친구 따라 극장 갔다. 일전에 얼핏 들었다. 노근리 사건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대추리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알고 갔다. 친구가 그랬을 리 없다. 내 머릿속 편집기 소행이다. ‘노근리’를 ‘대추리’로 접수한 것이다. 극장 안. 무대인사 차 올라온 제작자가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에 맞춰 영화를 개봉하게 됐습니다.” 그 순간 왜곡됐던 기억이 재빠르게 돌아왔다. “아! 맞다. 노근리였지!” -_-; 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충북 노근리에서 피난민 500여명이 미군에 사살당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동화적인 느낌의 다큐멘터리다. 어르신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장기 두고,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토끼처럼 뛰어 다니고 소학교 운동장에는 긴 생머리 선생님이 치는 풍금소리가 울려 퍼진다..
안치환 새봄콘서트와 가난한 밥상 삶에는 쉼표만 필요한 게 아니다. 때로 높은음자리표도 필요하다. 날이면 날마다 고시생처럼 빼곡한 문자의 행렬 따라 뚜벅뚜벅 걷고 있는 그들에게 초대권 두 장을 내밀었다. “우리 잠시 방향을 틀어 오선지의 물결 위로 떠나지 않을래요” 춘삼월 첫째 일요일, 날짜도 단아한 3월 7일. 안치환 새봄 콘서트 마지막 날. 우리는 편집회의를 부랴부랴 마치고 출발했다. 백목련보다 먼저 봄소식을 물고 온 안치환을 만나기 위해. “아, 공연 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G가 들떠 말했다. “집회도 아니고 안치환 노래를 콘서트에서 듣다니 왠지 어색한 걸~ 기대된다” P가 맞장구친다. 오색 조명이 햇살만큼 포근하고 공연장이 카페만큼 편안한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넣고 콘솔박스에서 음향팀이 틀어주는 ‘앞저트’ 음악에 빠져들었다..
여배우들 - 내숭보다 내공 '여자의 일생' 은 요즘 대세인 ‘리얼’을 반영한다. 내숭 9단 성형수술 등 가식의 결정체로 회자되는 여배우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커다란 스크린에 담는다. 이재용 감독이 선수답게 재밌고 매끄럽게 페이크 다큐로 만들었다. 배경은 성탄절 이브에 20대부터 60대까지 여배우들이 모여 화보를 촬영한다는 설정이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6인의 어여쁜 그녀들을 모셔놓고 한판 수다의 장을 마련했다. 미녀들의 화끈하고 뭉클한 수다, 진정 보배로운 장면과 대사들이 쏟아진다. 처음에 이미숙이 백발성성한 채로 화보촬영장에 들어선다. 그 장면에서, 배우의 모습이 꾸밈없이 나온다더니 염색도 안 했는 줄 알았다. ‘실제로는 이미숙도 많이 늙었구나’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곧이어 "너무 바빠서 촬영장에서 분장도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