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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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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 안개처럼 스미는 사랑의 위대함 ‘작별하는 그대들 뒷모습이여 / 내 어찌 꿈에선들 눈물없이 바라보리’ 조조영화로 를 보았다. 극장 밖을 나오며 휘청했다. 눈부신 햇살이 부담스러웠다. 헤어진 다음 날처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말 그대로 심란하여 고정희 시집을 폈는데 라는 시가 있었다. 거짓말 같은 우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1991년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이번 는 네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고정희 시인이 영화 를 보고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시집을 나는 지난 20년 수십 번 보았을 터인데 라는 시가 이제야 보이다니. 이 극적인 상봉을 위해 침묵했던 것일까. 7년 째 수감 중인 애나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 휴가를 받는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 행 버스에서 훈이를 만난다. 돈 받고 애인노릇 하..
혜화,동 - 스물셋, 멀리해야 할 남자 위험한 혜화, 動 엔딩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여자(혜화)가 문을 나선다. 가는 데마다 얼쩡거리는 옛 남자(한수)가 와 있다. 무시한다. 차를 몰고 남자를 지나쳐간다. 백미러로 남자의 전신이 잡힌다. 힐끔 쳐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카메라가 손을 클로즈업한다. 후진기어를 넣는다.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여자. 여신의 미소를 짓는다. 영화가 끝난다. 아마 용서와 화해의 결말 같다. 나는 그 장면에서 후진 기어 넣고 내리 달려서 여자가 남자를 확 쳐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 땅의 ‘지질한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싶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18살 고등학생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혜화가 임신을 하자 한수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 앞에 한수가 나타난..
글러브 - 울기엔 좀 미안한 청각장애인 신파극 이것은 청각장애인야구단 영화다, 라고 할 때 자동으로 연상되는 감동코드가 있다. 는 그것을 배반하지 않고 정확히 그려낸다. 재밌고 뭉클하다. 두 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고 눈물 한 사발 뽑아낸다. 대사발 유려하고 배우들 연기 탄탄하다. 남자주인공 정재영은 진짜 야구 선수 같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야구선수다.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허전하다. 교과서적인 메시지로 꽉 차있어 울림을 주는 여백이 부족하다. 장르적인 전형성을 비켜가지 못해 안타깝다. 어쨌거나 똑 떨어지는 영화란 점에서 이야기꾼 강우석 감독의 우월한 능력은 맞는데, 삶의 이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가 ‘장인’은 아닌 거다. 예전에 장애인 단체 간행물을 2년 간 맡았었다. 장애인스포츠 동호회 취재를 거의 매달 다녔고, 서..
클라라 - 초극의지 돋보이는 브람스의 사랑 슈만과 클라라. 이런 이름의 커피가 있단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말해줬다.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커피가 아닐까 싶다. 음악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슈만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음악가다. 클라라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그런데 클라라 아버지가 음악가로서 장래가 불투명한 슈만을 탐탁치 않게 여겨 6년간 법정 공방까지 거치며 결혼에 성공했다. 여기에 젊은 음악가 브람스가 등장한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이들 세 사람은 음악이라는 물안에서 마치 커피설탕프림처럼 서로의 삶에 녹아든다. 슈만은 일찍이 브람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해 키워낸다. 브람스는 당대의 뮤즈 클라라를 동경하고 사랑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클라라의 곁을 지킨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
레인보우 - 무려 영화감독 꿈꾸는 엄마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생선 굽고 찌개 데우고 아들을 깨운다. 딸내미는 나랑 같이 자니까 내가 부시럭대면 같이 일어난다. 아들아, 학교 가야지. 그럼 아들은 이불속에서 꿈틀거리며 묻는다. 엄마, 아침 뭐에요. 기가 딱 막힌다. 전표에 주문이라도 받아야하나 싶다. 밥이지 뭐야(이놈아). 기분 좋은 날은 그냥 넘어가고 피곤한 날은 쏘아붙인다. 아들은 억울한 목소리로 그냥 물어보는 거에요. 아무거나 줘도 괜찮아요. 그런다. 주는대로 먹겠다는 얘긴데 그러면 왜 아침마다 물어보느냐고 또 따진다. 아침엔 티격태격 오후엔 살랑살랑. 저번엔 야채랑 고기 넣어서 샌드위치를 정성스레 만들어주었다. 맛있게 먹는 아들이 귀여워서 그걸 못참고 한마디 했다. 아들아, 엄마가 온갖 정성 다해서 세끼 밥 먹이고 고급간식까지 챙겨서 ..
박정훈 사진전 - 시가 흐르는 얼굴들 간밤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사진전을 아직도 안 간 것은 의리없는 행동이다. 아무리 입이 헐고 피곤에 쩔어도 이럴 순 없다. 다음주 평일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당기기로 맘먹었다. 아침에 눈 떠 친구한테 전화했다. "박작가오빠께서 첫 개인전을 하는데 같이 가자." "그래? 니가 좋아하는 그 박작가 오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수십명이 넘는 사진가들과 취재를 다녔는데 친한 동료는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그 중에 사진가로서 존경을 보내는 이들은 둘 정도다. 그중 일인. 내가 장난삼아 박작가오빠라고 부르는 박정훈 선배다. 인물사진이 탁월하다. 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둘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 맞물려 사진이 깊고 아름답다. 김기택 시인이 '삶의 진액'이라고 표현해서 끄덕끄덕 공감했다. 그 사람의 정..
폴스미스 전 -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는 사람 내가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랑 비슷하다. 백화점을 좋아한다. 그곳에 가면 문화적 자극을 많이 받는다. 아름다운 것들 틈에서 몸이 깨어나는 느낌. 눈이 즐겁다. 잡화, 가구, 그릇, 명품브랜드, 식품매장까지. 국내외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놓은 제품을 맛보는 재미가 크다. 남자 옷 코너가 은근히 쏠쏠하다. 여자 옷은 다양하고 화려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측면이 있다. 치마, 스커트, 원피스, 바지 등등에다가 비즈를 박거나 망사로 처리하거나 꽃수를 놓거나 원색을 쓰거나에 따라 얼마든지 파격적인 실험이 가능하다. 남자 옷은 다르다. 기본 아이템에 디테일한 변형을 추구해야한다. 같은 듯 다름을 빚으려면 고난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요한다. 단추 모양 하나, 셔츠의 주름 하나, 스티치 색상 하나, 주머니 위치..
옥희의 영화 - "홍상수 영화에 약 탔나봐" 사랑은 교통사고인가에 관한 물음 '난 사랑은 교통사고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피할 수 있다는 거?’ ‘응’ ‘음... 그래.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설명해줘’ ‘주체는 자기 의지와 윤리적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거잖아. 먼저 결정돼 있는 게 아니고.’ ‘그래도 싫은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좋은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어떤 남자에 굉장히 빠졌었거든. 그 때 외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야.’ ‘왜? 섹스하고 싶어서?’ ‘응. 근데 뻔히 보였어.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어.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겠구나’ ‘복잡한 사람 사랑하면 지옥이지’ ‘엄청 참았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거 같아. 사랑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