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7.29] 그녀가 호텔로 간 까닭은 (3)
  2. [2018.07.19] 싱크대 앞에서 아담스미스 생각하기 (2)
  3. [2018.07.02]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그녀가 호텔로 간 까닭은

[은유칼럼]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 작품으로 유명하다. 크고 좋은 집, 돈 잘 버는 남편, 귀엽고 기운찬 아들 둘 딸 둘까지.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설계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주인공 수전은 행복하지 않다. 가족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이 사라지는 현실을 자각한다.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롯한 몰입이 가능한 ‘익명의 장소’를 찾던 수전은 호텔로 간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안 남편은? 사설 탐정을 시켜 찾아낸다. 수전은 세상에 의해 발각된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나 6시까지 19호실에서 혼자 있다가 간다고 호텔 지배인이 ‘있는 그대로’ 증언했지만 남편은 믿지 않는다. 다른 남자와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애인이 있었듯이 당신도 그랬을 거라며 교양과 관용의 제스처를 취한다.

얼마 전 인터넷 포털 화면도 ‘호텔’이란 단어로 어지러웠다. 위계, 위력에 의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에 대해 “김지은 호텔 잡았다”, “본인이 직접 호텔 예약” 등의 제목으로 여러 개의 기사가 났다. 호텔 예약. 이건 수행비서의 업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맥락에서 저 단어의 조합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을 유도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피고인 주장에 유리한 기사였다.

언론사 사무실에서 저와 같은 제목을 짓느라 말을 고르고 단어를 배치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편집기자의 손놀림과 데스크의 표정과 지시하는 입모양은 어땠을까.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가부장제의 통념과 상식에 길들여진 두뇌에서 나온 합작품일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에서 아내가 겪는 고립과 절망과 소외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남편이, 배우자의 호텔 출입을 ‘그렇고 그런’ 빤한 일로 자동 반응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호텔을 가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런데도 여성의 행위는 일 그 자체로 인식되거나 말 그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김지은은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미투에서 밝혔다. 이를 두고 처음 폭행을 당했을 때 곧장 사표 내지 않은 게 의심스럽다고들 한다. 반문하고 싶다. 상사에게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당했다고 해서 그 즉시 사표를 제출하거나 고발하는 직장인이, 저항과 권리를 배우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있을까. 사표는 생존과 직결된 결단이다.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 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한 ‘스마트한 여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 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로 시작한다.

안희정 성폭행 혐의 사건은 법리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끝나도 여성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건 성폭행이 계속된다는 말이고, 남성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편집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계속 실패하리란 뜻이다. 그러나 견고한 지배질서의 틈을 뚫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삶을 대동하고 나온 목소리는 말하기에 실패할 때마다 정교해진다는 것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5231.html?_fr=mt5#csidxb609449c1f5541497dfeac21ffe18f2 

싱크대 앞에서 아담스미스 생각하기

[은유칼럼]

아들이 제대하고 나서 나는 ‘싱크대 앞 체류 시간’이 늘었다. 하루 한 끼 정도 집에서 먹는데 제대로 먹여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마트, 유기농 식료품점, 백화점, 동네 슈퍼를 오며 가며 찬거리를 연신 사다 날라도 냉장고는 금세 텅 빈다. 끼니는 뭐든 먹어치우는 괴물인가. 성인 남자 입 하나 느는 게 수저 한 벌 더 놓는 일이 결코 아님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그러면서도 다 큰 아들의 밥을 계속 차려주는 게 옳은가 자책한다. 처음엔 군대에서 고생한 아이가 가여워서 해 먹였다. 당분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바로 복학하고 학업에 아르바이트에 친교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난 하숙집 아줌마처럼 시간 맞춰 밥을 대령하고 있다. ‘너도 성인이니까 네 밥은 알아서 챙겨라’ 생각은 하면서도, 미성년자인 딸아이만 해주고 아들은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내 몸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앞치마를 두른다.


ⓒ시사IN 윤무영

이런 행동은 너무도 반시대적이다. 이 한 몸 ‘고생’에서 끝나지 않고 가사노동이 여성, 곧 엄마의 할 일로 ‘고착’되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물론 안다. 자식한테 밥 안 해주는 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다만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매번 밥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님을 깨칠 기회를 아이에게 주고 싶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건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 등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긴밀한 공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32쪽)”임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아는 교양인으로 키우기. 실은 계획이 있었다. 아이들 식사 제공 기한을 스물세 살로 정해놓았다. 그건 내가 어머니의 일방적인 돌봄 속에서 반찬 하나 만들 줄 모르다가 결혼한 나이다. 양심상, 받은 만큼은 돌려주자는 의미로 정했다. 서서히 아들이 스물셋이 되어가니 불안한 것이다. 어제까지 해주던 밥을 과연 오늘부로 안 할 수 있을까. 내가? 갑자기? 어떻게?

한 수강생이 “고맙다”라고 한 이유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쌤, 고마워요.” 나와 같이 1년 동안 글쓰기 공부를 한 여성이 다짜고짜 고백한다. 고마운 이유는 이랬다. 처음에는 오후 5시에 수업 마치면 남편 저녁 차리러 가야 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단다. 점점 읽고 쓰면서 여자의 본분이란 사회적 갑옷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가족 중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62쪽)” 회의했고,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며 말한다. “이젠 남편 저녁밥을 안 차려줘도 안 미안해요.”

20년간 밥을 하던 사람이 안 하게 된 것은 혁명이다. 그녀의 용기가 내게도 용기를 준다. 나야 일 때문에 집에 없을 때도 많고 가사노동을 남편과 분담하고 있지만, ‘자식 밥걱정’의 족쇄를 풀지 못했다. 강한 모성이라기보다 질긴 습관이다. 이행기를 두고 아들에게 제안해볼까 싶다. 먼저 일주일에 한 끼는 직접 메뉴를 정해서 밥을 차려보라고.

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을 “여성들이 기존의 파이에서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파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102쪽). 내게 페미니즘은 ‘밥은 엄마’라는 등식, 아니 무의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무한정한 천연자원을 캐듯, 돌보는 손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항상 얻을 수 있다는 신화(186쪽)”는, 전 세계에서 날마다 자동으로 차려지는 밥상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시사인 은유 읽다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은유칼럼]

스마트폰에 카메라 앱을 깔았다. 셀카를 찍어보니 소문대로 신통했다. 주름 제거, 미백은 기본에 눈동자가 크고 또렷해졌다. 메이크업 기능이 내장된 듯 칙칙한 얼굴이 지중해 햇살 받은 해사한 분위기로 변모했다. 흡족함도 잠시, 곧 도덕 감정이 올라왔다. 이건 속임수이며 나 아닌 거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말했다. 오렌지 과즙 3%만 들어가도 오렌지주스라고 하는데 본래 얼굴 3%만 있으면 자기 얼굴 맞는다고.


나의 죄책감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일회용컵 사용을 줄이듯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자중하고 싶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일주일 살아보기’가 오랜 목표다. 이 슬로건은 2016년도에 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캠페인으로 꾸밈 노동을 강요하고 외모중심주의를 부추기는 세태에 맞서는 실천으로 제시됐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단 하루도 성공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말부터 시작이다. “어쩜 그대로냐~” “살 빠졌다!” 외출을 안 하는 날엔 거울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배가 나왔네, 잡티가 생겼네, 라며 제 몸의 감시자를 자처했다. 내 몸은 세월과 경험이 만든 고유한 신체 표현인데도 일단 못마땅하게 본다. 무의식 중에 마른 몸, 희고 갸름한 얼굴이라는 미의 획일적 기준을 잣대 삼아 남을 보고, 남을 보는 눈으로 나도 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의 관습적 경로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다.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을 의식주라고 하는데, 집도 밥도 아닌 옷이 왜 일순위인지 늘 궁금했다. 입성을 중시하는 체면 문화의 반영 같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피해는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쏠린다. 딸들은 연중 다이어트다. 살만 빼면 예쁠 거란 말을 엄마에게서부터 듣고 자란다. 항공사에는 여자 승무원이 못생겼다는 민원도 들어온다고 한다.


일전에는 버스에서 결혼식장 근처 정류장 안내 방송에 이비인후과 광고가 나왔다. “결혼식에서 콧물 흘리는 신부 본 적 있나요? 어서 비염을 치료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콧물까지 성별로 간섭하는 게 몹시 거슬렸다. 여성의 질병은 개별적 고통에 사회적 비난까지 이중 처벌이 내려진다. 그뿐인가. 뚱뚱한 몸, 뒤틀린 몸, 노쇠한 몸은 곧 추한 몸으로 간주돼 모욕, 배제, 차별에 쉬이 노출된다.


외모 평가는 걱정도 덕담도 아니다. 무비판적 습관이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능력이 인간 종 전체적으로 감퇴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카메라 앱’도 바람직하지 않은 장난감이다. 셀카 놀이가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미의 표준화된 각본에 유희하는 사소한 행동이 외모 위계의 ‘의식 고착’에 기여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이 반가운 이유다. 하이힐, 브래지어, 풀 메이크업, 긴 머리가 꾸밈의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외모 품평이 아닌 품평 행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게 훨씬 성숙한 풍경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저자 사라 아메드는 “모욕을 유발하는 농담에 웃지 않을 작정”이라며 “하지 않고 되지 않으려는 자의 선언문”을 썼다. 일명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이다. 제목이 딱이다. 개성 있는 몸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려면, 지금의 획일적 분위기가 깨져야 한다. 극소수가 외모-매력 자본을 독점하고, 대다수는 자기 자신을 미달된 몸으로 보는 현상, 순도 97% 얼굴을 왠지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문화는 이상하고 불행하니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279.html?_fr=mt5#csidxa69af279d19f69a86b42a5791ff2f9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