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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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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읽을 만한 책 좀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시를 읽고 싶다, 니체를 읽겠다, 독서모임 하겠다며 강연장에서 혹은 이메일로 생면부지의 사람이 물어올 땐 난처하다. 나는 책 소개가 어렵고 두렵다. 어떤 책이 좋았다면 당시 나의 욕망과 필요에 적중했기 때문인데 그 책이 남에게도 만족스러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그냥 지금 읽는 책을 말하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한테 끌리는 책을 몸소 찾아보는 시도가 독서 행위의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출판 관계자들은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게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것도 크겠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재밋거리를 누릴 기회가 많은 데 비해 책의 재미에 빠질 기회는 적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추천도서를 선정하는 일방적인 방식도 사람들이 책에서 멀어지게..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각종 언론인 신뢰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그와 우연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좋아요’가 1000개에 육박하고 부럽다는 유의 댓글이 100개에 달했다. 그를 향한 대중의 신망이 두텁다는 걸 체감했다. 나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접하자 입이 딱 벌어졌다. 흐트러짐 없는 체형, 우윳빛 안색에 짜증 한번 안 낼 것 같은 고고한 입매의 그는 속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자석에 철가루 끌리듯 몸이 따라가는 바람에 사진까지 찍었지만 ‘우상’에 자동 반응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사람이 언론인의 상징적 지위를 수십 년 누린다는 것. 당사자의 탁월함은 기본이고 제도적 뒷받침, 꾸준한 기회, 그리고 동료의 헌신이 따라야 가능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앵커 역할 수행에는 서너 ..
두 개의 편견 성판매 여성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홍보용 소책자를 건넸다. 성판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글이 문답식으로 적혀있다. 무심코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 멈췄다.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에게 쉽게 충고한다. 그 일을 그만두고 ‘떳떳한 직업’으로 새 출발 하라고. 하지만 하던 일 관두고 새 직업을 찾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 움찔했다. 한번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려서, 한번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어서였다. 당시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내 배우자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좌절하던 때였다. 업종을 바꾸려는 순간 이전의 경력과 스펙, 몸뚱이가 쓸모없어지는 ‘생산성 제로’ 인간이 되어버린다.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업무 감각을 몸에 익히도록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