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6.29]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2)
  2. [2018.06.17]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3. [2018.06.04]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3)
  4. [2018.06.03] 두 개의 편견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은유칼럼]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

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강사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바 있다. 그 짓을 또 하라니. 평생 가계부 한 줄 안 쓰고 촌지 한번 안 주었으며 돈 계산에 서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수영장에서 난 다른 세계, 다른 몸을 산다. 육지의 상식과 언어가 수중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왜 꼭 나이 적은 사람이 해야 하냐며 연령주의를 비판할 수도, 남자 회원이 걷으라며 성평등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추석이랑 설에만 선물을 드리면 안 되냐고 말했다가 “노래교실에서도 스승의 날엔 안 하는 경우가 없다”라는 반박에 입을 닫아야 했다. 수영 강습 50분, 샤워 20분인데 맨몸으로 논쟁하기도 멋쩍거니와 그들만의 관습을 부정할 용기도 없다.

특히 난 ‘수영 약자’다. 시력이 나빠 건너편 강사도 못 알아본다. 샤워장에서 먼저 인사하는 다른 회원을 지나쳐 오해를 사기도 했다. 운동신경 둔하고 폐활량 낮고 겁은 많다. 초급반에서 가장 늦게 자력으로 물에 떴다. 배영, 평영, 접영 등 새로운 영법 자세를 똑같이 배워도 유독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다. 그럭저럭 써온 몸뚱이가 무력해지는 상황, 남겨지는 사람이자 뒤처지는 몸으로 존재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어영부영 10개월이 지났고 수영장 생활에 적응 중이다. 떡값을 일인당 2만원 걷는데 자신은 1만원만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샤워기 하나로 신경전을 벌이고, 레벨과 속도로 자존감을 겨루는 ‘언니’들은, 내게 “팔꿈치 펴라”며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하는 전문가이자 ‘락스 물’을 잔뜩 먹고 꺽꺽거리는 걸 보고 “오늘도 보약 먹었네~”라며 용기와 웃음을 주는 동료들이기도 하다.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60쪽)”을 목도한다. 

수영을 배우며 “이질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갈 기회(166쪽)”를 가진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동질 집단에서 안전하게, 혹은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으니까.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또한 ‘몸에 힘을 빼라’ 같은 수영 이론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의 괴리를 체감하고 나니,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말하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같은 원칙들이 학인들에겐 얼마나 막막하게 느껴질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230쪽)”는 말을 곱씹어본다.

며칠 전에는 수영장에서 오가며 눈인사만 나눈 한 회원이 말을 걸었다. “언닌 이름이 뭐예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지영이요. 지영….”

내 본명인데 한동안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이름이라 발음조차 낯설었다. 비대해진 ‘은유’ 자아를 비활성화하고, ‘지영’ 자아로 사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시사인 은유 읽다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은유칼럼]

읽을 만한 책 좀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시를 읽고 싶다, 니체를 읽겠다, 독서모임 하겠다며 강연장에서 혹은 이메일로 생면부지의 사람이 물어올 땐 난처하다. 나는 책 소개가 어렵고 두렵다. 어떤 책이 좋았다면 당시 나의 욕망과 필요에 적중했기 때문인데 그 책이 남에게도 만족스러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그냥 지금 읽는 책을 말하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한테 끌리는 책을 몸소 찾아보는 시도가 독서 행위의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출판 관계자들은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게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것도 크겠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재밋거리를 누릴 기회가 많은 데 비해 책의 재미에 빠질 기회는 적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추천도서를 선정하는 일방적인 방식도 사람들이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 같다.

누가 추천하는가. 책 단체나 관계자, 학자나 지식인, 행정 관료, 심지어 자본의 증식을 연구하는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나선다. 대 학생이 읽어야 할 권장도서, 학년별 도서 목록, CEO 여름휴가 도서 목록, 올해의 책을 발표한다. 추천자의 삶의 조건과 목적은 특수하다. 평생 활자와 친했고, 책 보는 게 직업이거나 일과 중 독서 시간 확보가 가능한, 읽는 훈련이 된 일부 계층의 관점이 반영된 목록이다. 그런 책들이, 책을 거의 안 봤거나 볼 시간이 없고 고된 노동과 학습에 지친 이들의 일상에 지적·정서적 쾌락을 주는 ‘좋은 책’으로 스밀 수 있을까. 추천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지인이 교양 필독서에 단골로 오르는 장 그르니에의 <섬> 독서 실패기를 말한 적 있다. 책이 몸에 밴 애서가였다. 여기저기서 좋다는데 자기만 이해 못하는가 싶어서 위축됐단다. 나도 사놓고 안 읽혀서 못 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대학생 추천도서에 꼽히는 책이다. 상징과 비유로 된 문학서이자 철학서로 난도가 높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역자 해설에도 나온다. 지금은 나의 인생 책이지만 만약 스무 살에 봤다면 조용히 덮었을지도 모른다. 책은 따분하다는 편견을 심화하고 독서 활동을 중단시키면 ‘고전’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 어려운 이유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이란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이며, 악은 우리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시키는 것이다(253쪽).”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절대명령처럼 주어지는 도덕(moral)을 비판하며 자기 삶의 조건에서 선악을 재정의하고 좋은 마주침을 조직하라고 권한다. 스피노자의 말대로라면, 좋은 책은 읽는 기쁨을 가져오는 책이고, 나쁜 책은 책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책이다. 

어린이책은 어른들이 고르기 때문에 추천도서 선정 시 전문가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지난 4월 청소년 참정권 집회에서 만난 한 어린이책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성의 권위로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한, 아이들에게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좋은 책’이라는 모호한 말 대신 내가 혹은 네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책’으로 표현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거다. 십분 동의한다. 경영자가 추천한 책을 노동자가 읽고, 교사가 선택한 책을 학생이 보고, 평론가가 권하는 책을 책 입문자가 산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누가 내게 ‘좋은 책’을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좋아하는 책’을 물어오면 기꺼이 말을 나누고 싶다.

'은유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위기 깨는 자의 선언  (0) 2018.07.02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2) 2018.06.29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0) 2018.06.17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3) 2018.06.04
두 개의 편견  (0) 2018.06.03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0) 2018.05.28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은유칼럼]

각종 언론인 신뢰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그와 우연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좋아요’가 1000개에 육박하고 부럽다는 유의 댓글이 100개에 달했다. 그를 향한 대중의 신망이 두텁다는 걸 체감했다. 나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접하자 입이 딱 벌어졌다. 흐트러짐 없는 체형, 우윳빛 안색에 짜증 한번 안 낼 것 같은 고고한 입매의 그는 속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자석에 철가루 끌리듯 몸이 따라가는 바람에 사진까지 찍었지만 ‘우상’에 자동 반응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사람이 언론인의 상징적 지위를 수십 년 누린다는 것. 당사자의 탁월함은 기본이고 제도적 뒷받침, 꾸준한 기회, 그리고 동료의 헌신이 따라야 가능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앵커 역할 수행에는 서너 명의 작가가 투여된다. 방송작가가 정규직이 아니며 부품처럼 교체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는 또한 이성애자·중산층·비장애인· 남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이나 배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악다구니 부릴 일이 덜한 안전지대에서 살았음을 그의 완벽한 신체-이미지가 증명한다. 남성이라는 스펙, 방송이라는 협업의 결과물이 한 사람으로 수렴되는 부조리한 구조에서 스타 언론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 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82쪽).”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 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 

나는 사진 속의 그를 이렇게 추억하기로 했다. 마이크 앞에서 용감했던 사람, 아니 자신이 가장 용감할 수 있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건 고난도 삶의 기예다. 우리는 뉴스 진행자가 명성을 얻으면 정치판으로 진출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언론인이 정치인의 예비자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다. 자기 업에 대해 실력·자부심·절제를 갖춘 언론계 종사자가 귀하다 보니 그의 신실한 행로가 더 귀감이 되는 것 같다. 

<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F. L. 루카스 지음, 이은경 옮김, 메멘토 펴냄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 될 때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러운데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 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 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 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 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 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83쪽).”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시사인 은유 읽다



'은유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2) 2018.06.29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0) 2018.06.17
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3) 2018.06.04
두 개의 편견  (0) 2018.06.03
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0) 2018.05.28
일하지 않을 권리  (0) 2018.05.08

두 개의 편견

[은유칼럼]


성판매 여성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홍보용 소책자를 건넸다. 성판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글이 문답식으로 적혀있다. 무심코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 멈췄다.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에게 쉽게 충고한다. 그 일을 그만두고 ‘떳떳한 직업’으로 새 출발 하라고. 하지만 하던 일 관두고 새 직업을 찾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 움찔했다. 한번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려서, 한번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어서였다. 


당시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내 배우자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좌절하던 때였다. 업종을 바꾸려는 순간 이전의 경력과 스펙, 몸뚱이가 쓸모없어지는 ‘생산성 제로’ 인간이 되어버린다.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업무 감각을 몸에 익히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직 기회가 적고 적응이 어렵다. 결국 나의 배우자도 본래 업종으로 복귀했다. 직업을 바꾸는 일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님에도 유독 성판매 여성들에게는 너도나도 훈계했던 거다.


안다는 건 자기 무지를 아는 것이란 말대로, 소책자의 몇 줄 문장은 내 가치 체계를 흔들어놓았다. 떳떳한 일이란 무엇인지, 좋은 직업은 누가 승인하는지, 왜 그들의 행복은 탈-성매매일 것이라고 당연히 규정했는지 혼란스러웠다. 우연히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접속했고, 거기서 또 하나의 화두를 만났다. 


성판매 여성은 쉽게 돈 번다는 비난이다. 당사자는 증언한다. 성노동이 “밀폐되고 통제력을 갖기 힘든 상황에서 안전장치 없이 상대방의 요구에 맞춰줘야 하는 중노동”이라고(실제로 2002년 군산 성매매업소의 화재로 열네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반문한다. “쉽게 돈 벌면 왜 안 돼? 우리는 다들 쉽게 돈 벌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로또를 사고 건물주가 되길 바라고요.”


집필노동자인 내게 사람들은 덕담을 건넨다. ‘이번 책 대박 나세요.’ 가급적 수월하게 돈 벌라는 뜻이다. 쉽게는커녕 정직하게 돈 벌기도 어려운 세상이니 말이라도 넉넉하게 주고받는 것일진대, 같은 말이 특정한 대상에겐 비난의 말로 쓰인다. 이토록 성판매 여성들이 온갖 설교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숨겨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목소리 없는 이들은 납작한 존재로 일반화, 단순화, 타자화된다. 


내가 (두 번 볼 만큼) 좋아하는 영화에서도 성판매 여성은 상징적 폭력을 겪는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다니엘이 케이티의 성매매업소에 찾아가서 제발 이런 일만은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창동의 <버닝>에서 종수는 해미에게 창녀나 아무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거라고 말한다. 젠더 편견과 선악의 잣대가 주저 없이 개입해 영화적 흐름이 깨지는 아쉬운 대목이다.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는 성판매 여성의 글을 묶어낸 책 제목이다. 이 사회에서 말의 지분을 갖지 못했던 당사자의 생생한 외침과 증언은 아프고 날카롭다. “몸 팔아서 쉽게 버는 게 옳으냐”가 아니라 왜 취약한 계층이 성판매로 유입되는지, 왜 누구는 성구매에 척척 지갑을 열고 누구는 성을 판매해야 겨우 ‘생계비’를 마련하는지, 정말 돈 쉽게 버는 사람이 누군지 저자 이소희는 묻는다. 

나도 질문을 바꿔본다. 왜 꼭 어렵게 고생해서 돈을 벌어야 가치 있다고 난 여겼을까. 나 같은 순치된 인간을 길러낸 세력은 누구이며, 그걸로 덕을 본 자들은 누구일까.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자기 삶의 문제인지도 몰랐던 문제가 드러나는 경험은 언제나 신비롭다.


*한겨레 삶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