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글쓰기 11기

[글쓰기의 최전선]


슬픈 인간- 나는 아직도 '돈 몇푼' 갖고 싸운다

[은유칼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샘이 젤 유명해요.” 4년 만에 만난 지인의 첫인사다. “작가님이 유명해지고 가족들 반응은 어떠냐”라는 질문이 북 토크에서 나온다. 유명하다는 게 뭘까. 유명한 사람은 유명해서 유명해진다는 순환 논리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남편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성정의 소유자로 일희일비를 모른다. 군인 아들은 민가의 사정에 어둡고, 딸아이가 가장 실감할까. 한번은 지나가듯 말했다. “엄마, 엘리베이터에서 택배 아저씨를 만났는데 18층 누르니까 너네 엄마 작가냐고 물어보셨어.” 

그렇다. 일상의 가장 큰 변화는 택배 물량이다. 내가 물욕으로 사들이는 책 외에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증정 도서가 늘었다. 글쓰기 수업을 한 지 어언 10년, 학인들이 낸 책도 속속 답지한다. 우리 집 고양이는 날마다 크기와 질감이 다른 상자에서 안락을 누린다. 쓰레기 배출을 한 주일만 걸러도 택배 상자와 인쇄물로 방 안이 폐지 집하장이 된다. 밟거나 읽거나, 종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삶이다. 

ⓒ시사IN 윤무영

하루 일과는 매양 같다. 눈 뜨면 글 쓴다고 카페 가고 오는 길에 장 봐서 밥 짓고 강의 가고 여기저기 메일 보내고 책을 베개 삼아 잠들고. 이 마감에서 저 마감으로 시곗바늘처럼 단조롭게 운행된다. “인생이라는 근면한 공장에 한번 말려든 사람은 설령 도중에 싫증이 났다고 해도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에 떠밀리고 떠밀려 출구까지 빙빙 돌지 않으면 안 된다(301쪽)”는 걸 실감한다. 

집필 노동자로서 고민도 여전하다. 어떻게 잘 쓸 것인가. 노동력의 정당한 대가를 받을 것인가. 원고 청탁이나 강연 의뢰가 이전보다 많이 오는데, 더 맞춤한 일을 고를 수 있는 건 장점이고 일일이 확인과 거절의 메일을 보내야 하는 건 단점이다. 돈은 늘 복병이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단기 알바라도 급여나 월급날을 모르고 일자리를 구하는 경우는 없다. 프리랜서 작가는 아니다. 상대방이 고료와 지급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일을 의뢰하기도 한다. 난 요즘도 이런 메일을 쓴다. “원고료(강연료)가 얼마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전엔 한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왔다. 고료와 지급 날짜가 단정히 적혀 있었다. 기본 사항인데도 고마워서 뭉클했다. 같은 날 한 팟캐스트에서 출연 섭외가 왔다. 출연료가 안 쓰여 있었다. 메일로 물었더니 답이 왔다. 교통비밖에 안 되는 적은 금액이라 죄송해서 말 못했고 가는 길에 스윽 드리려 했다고. 맥이 풀렸다. 자금 사정이 안 좋아도 스튜디오 대신 길거리 녹음을 하지는 않을 텐데 인건비는 줄인다. 인정으로 갈음한다. 악덕 자본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시민단체도 영세 업체도 일인 기업도 자연스레 그리 한다. 

<슬픈 인간>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정수윤 옮김, 봄날의책 펴냄

‘두부 장수가 두부를 만들듯’ 

자유기고가로 일할 때부터 최저 원고료를 보장하지 않는 곳과는 가급적 일하지 않았다. “대중 소설가가 그 출판사와 절교를 한다는 건 식량 수송로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234쪽)”는데, 비슷한 강도의 결단으로 버텼다. 남들 보기에 유명의 날개를 단 나는 아직도 ‘돈 몇 푼’ 갖고 싸운다. 수십 번 망설이다 그래도 말한다. 안정된 직업, 고정된 급여 없이 오직 글에서 밥을 구하는 노동자를 위해.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 길을 터나가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수 없는 직업이지만 그 미련스러움 때문에 내 일이 좋다. 새해를 맞아 순정하게 다짐해본다. “두부 장수가 두부를 만들듯이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써 나가고 싶습니다 (201쪽).”


* 시사인 은유 읽다

이상한 정상 가족 - '불쌍한 아이'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

[은유칼럼]

인터넷 광고 페이지에서 아기 사진을 보았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한 줌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가 누워서 천장을 보는 옆모습이었다. 작은 생명의 연약함, 무구함, 천진함이 몽글몽글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어느 사회복지 단체의 광고 홍보성 페이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은 이웃의 관심을 당부했고, 게시물 아래에는 ‘후원했다’, ‘우리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돕겠다’, ‘천사 같은 아기야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때는 연말, 날은 춥다. 원래 아기 사진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데다 순탄치 못한 서사까지 더해지니 나 역시 그 페이지를 휙 나가지 못하고 어정거렸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부모 없이 자라는 게 가여워서가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고 살아가야 할 아기가 애처로워서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게 부모인가 돌봄인가. 한국사회에서는 오직 부모에게 전가된 돌봄이고, 그것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비극을 초래하는 것 같다.

 

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아이가 ‘비밀’이라는 글을 썼다. 너무 비밀이라 선생님만 봐야 한다며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내게 가져왔다. 자기는 아빠, 엄마가 없는데 그걸 친구들한테 말하지 못했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만 아빠가 없다는 걸 말했다고. 자기는 친구 집에 놀러가지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가 없는데, 여기도 집이지만 친구를 데려오면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진실한 글들이 그러하듯 읽으면서 아이의 불안과 감정에 전염되어버렸다. 아이의 비밀스러운 고민은 그때부터 나의 고민이 되었다.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은 왜 비밀이어야 할까. 만약 우리사회가 ‘정상’가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지 않은 사회라면,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이상한 믿음 체계만 없다면, 저 정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지 낱낱이 드러난다면,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타인의 개별적 상황을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분위기라면, 아이는 비밀을 굳이 비밀로 채택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런 두서없는 물음과 한탄으로 꽉 막힌 속을 뚫어주는, 같이 한숨 쉬면서도 정확한 분노와 고민의 지점을 알려주는 미더운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김희경이 쓴 『이상한 정상가족』이다.

 

우리 사회가 유독 정상가족에 집착하는 이유가 나온다. “가족은 부계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166쪽) 그러니까 사회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가족 내부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삭막하다. 각각 밥하고 돈 벌고 공부하는 도구적 존재로서 서로를 구실 삼아 정상가족의 그럴싸한 외양을 유지한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드는 부모라는 권력”(10쪽)은 체벌이나 학대 같은 친밀한 폭력을 은밀히 혹은 대놓고 행사한다. 아동인권단체에서 6년간 활동하며 ‘아이들의 수난사’를 지켜본 저자는 묻는다.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저 물음에 대해 난 고개를 반쯤 젓게 된다. 수년간 글쓰기 수업에서 ‘어른들의 성장기’를 접하면서 한 사람의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은 어김없이 가족의 뿌리에 닿아 있음을 보았다. 유년시절부터 노동에 지친 아버지는 술 마시고 엄마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었기에 이제 아버지가 죽어도 눈물이 날 것 같지 않다고 자식은 말한다. 일 나간 엄마 아빠를 대신해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의 노동력으로 동원되고 두 동생을 돌봐야 했던 어린 장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싸움에 휘말렸으나, 자식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매질을 한 엄마에 대한 30년 묵은 원망을 털어놓는다.

 

가족의 울타리는 핵가족 사회에선 억압과 공포의 밀실이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 최고 성적을 놓치지 않았던 아이는 너에게 들어간 학원비가 얼마인줄 아느냐, 1등을 못하면 강아지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며 과중한 학습 노동을 수행했고 끝내 정신의 질병을 얻었다. 물론 가족의 헌신과 지지로 좌절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말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이 더 깊고 크다. 저자 말대로 “문제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예컨대 친부모라고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63쪽).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 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 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 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그랬다고 해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128쪽)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란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 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채널예스에 실림

서울, 패터슨의 가능성

[은유칼럼]

평일 오후에 이런 적은 처음인데 싶어 연신 창밖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류장이 코앞. 신호가 몇번 바뀌도록 버스가 꼼짝 못 하자 기사는 뒷문을 열어주었고 승객 서넛이 내렸다. 큰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정류장도 아닌 데 차를 세웠다며 뒷문 쪽에 웬 남자가 서서 목청을 높였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 줄 아느냐, 운전기사가 아무것도 모른다, 형편없는 사람이다, 라며 그는 술 취한 아버지처럼 한 말 또 하기 신공을 발휘하더니만 느닷없이 화제를 자신에게 돌렸다.

“내가 말이야 모자 쓰고 잠바때기나 입고 있는 늙은이라고 날 무시해!” 짙은 밤색 모자와 남색 외투를 입은 행색은 단정하고 허리는 꼿꼿했다. 행동도 민첩했다. 핸드폰을 꺼내 차 문 위에 붙은 교통불편 신고 전화번호를 누르고 차량 번호, 위치, 신고 내용을 읊고는 꼭 처리해달라며 끊었다. 그사이 버스는 정류장에 닿았고 중얼중얼 단죄를 멈추지 않으며 그는 퇴장했다.

가래 끓는 말들의 악취가 버스에 낭자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기사님은 묵묵히 차를 몰았다. 빈 의자 없이 좌석을 채운 승객들은 정물처럼 조용했다. 만약 기사가 멱살을 잡혔다면 누군가 말렸을까. 이 공공연한 멸시와 억측의 현장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이 정도는 부정 정차가 아니다, 기사님한테 왜 막말하느냐, 당신이야말로 업무방해죄로 신고하겠다는 말은 입 밖으로 터져나오지 못했다.

일전엔 밤 10시 무렵 버스 뒷자리에서 젊은 여성 둘이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어 칸 앞에 앉은 중년남성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취기 섞인 음성과 불그레한 얼굴은 위압적이었고 여성들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근데도 압박의 제스처가 계속된 모양이다. “왜 자꾸 기분 나쁘게 쳐다보세요? 아저씨가 뭐라고 한 뒤로 우린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여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고 남자의 대응은 없었다.

때로 버스는 폭력을 잉태한 가부장의 공간이 된다. 사회적 약자들, 특히 자리를 뜰 수 없고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는 운전기사는 쉽게 사물화된다. 한평도 안 되는 일터에서 겪는 기막힌 일들, 무례의 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저 울화를 누구에게 얘기하고 이해받고 몸 밖으로 흘려보낼까. 행여나 그 얼토당토않은 신고 때문에 징계를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은 하면서도 난 버스회사에 전화 한 통 넣지 못했다.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 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 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 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 같다.

영화 <패터슨>의 남자 주인공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그는 운전석이라는 공적 공간에 비눗방울 같은 막을 만들어 고요를 누린다. 사람과 주변을 관찰하고 시상을 떠올리며 짬짬이 시를 쓴다. 그의 내적 세계를 함부로 터뜨리거나 침해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가진 노동하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장면은 천국 같았다. 우리 일상이 시를 낳는 공간이 되려면 똥물 같은 언사를 휘두르는 현실에 눈 돌리지 않고 같이 뒹굴고 치워야 할 것이다. 새해엔 나도 ‘반격하는 몸’이 되고 싶다. 시 쓰는 운전기사를 위해.


*한겨레 삶의 창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은유칼럼]

“딸이 있어 참 다행이야(57쪽).” 

엄마의 장례식장에 온 이모는 나를 구석에 있는 벤치로 데려가서 앉혀놓고 손을 부여잡고 연신 말했다. 딸이 있어서,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너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아버지랑 오빠 남겨두고 가면서 엄마가 어떻게 눈을 감았겠니, 네가 엄마 대신 잘해라. 너만 믿는다. 그날 문상객들은 급작스러운 망자의 죽음에 경황이 없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부고를 들었을 뿐인 나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내가 딸이란 사실을 떠안아야 했다. 

한 해 두 해 지나자 의구심이 일었다. 왜 나지? 누가 시켰지? “혀뿌리까지 치밀었던 말들(278쪽)”이 어느 날 넘쳤다. 힘들어서 못하겠으니 반찬가게에서 사먹거나 가사도우미를 구하라고 남자들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바로 가사도우미가 왔고 난 반찬 셔틀을 중단했다. 그건 수갑이 풀리듯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무얼 하지 않아도 세상엔 별일이 안 일어난다는 것이다. 

폭탄 돌리기처럼 허둥지둥 여자 역할을 내게 떠넘긴 사촌이모는 “자신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 규범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보통 엄마였다. “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우리 엄마도 자주 말했다. 속 하나 안 썩이고 없는 것처럼 자란 속 깊은 딸, 엄마의 자랑, 엄마의 보험, 엄마의 친구. 이 모든 명예 훈장은 실은 집안의 일손이자 엄마의 보조 노동력이자 감정 해우소로 딸을 승인하는 몹쓸 언어다. 그 딸들은 며느리가 되어서도 “집안의 사노비(55쪽)”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노비라니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경상도 남자와 결혼한 선배의 얘길 듣기 전이라면 서울 여자인 나는 그리 생각했을 거다. 새 며느리의 첫 명절, 생면부지의 친척들이 줄줄이 들이닥쳤고 부엌에 갇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유건 쓰고 도포 입은 남자는 없었으나 남녀 상차림을 따로 했다고. 거기까진 각오를 했는데 현실은 늘 예상을 초과하는 법. 시어머니가 말하길,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이 남긴 밥을 먹자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왜 누군지도 모르는 늙은 남자들이 남긴 더러운 밥을 먹어야 해?”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 

그날 우린 깔깔대다가 같이 울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구토가 치미는 강도의 기억.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은 왜 언제나 새롭고도 새삼스러운가. 한 사람이 물꼬만 터주면 “삭히거나 잊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자신의 이야기 (278쪽)”를 너도나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51쪽)”으로 길러졌으나 이제 그런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변신한 한 존재가 있다. 그저 말하고 있음. 단지 말하고 싶음. 나는 말해야겠으므로 쓰인 소설 한 권, 여성들의 삶을 정 가운데로 놓은 이야기가 있어 참 다행이다.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