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12.11] 김장 버티기 (2)
  2. [2017.12.05] 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다 (5)
  3. [2017.12.05]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김장 버티기

[은유칼럼]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소리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생에 김치노동까지 추가되면 끝장이라는 비장함으로 안 배우고 버텨왔다. 할 줄 알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일 게 뻔하니까, 식구들이 잘 먹으면 먹이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말리는 심정으로 김치 먹을 자유보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수호하고 있다. 

“이번엔 황석어젓을 사봤는데” “고춧가루 빛깔이 안 좋아서 속상해” “올해는 절임배추 써볼까 하는데” 요즘 시장에서, 거리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나이 든 여자들은 둘만 모였다 하면 김장 얘기다. 마음에 김치가 사는 나는 이런 목소리를 줍고 다닌다. 머리가 허옇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도 장바구니 달린 보행기를 밀고 다니면서 쪽파며 배추를 실어 나르는 동네 할머니를 본다. 

살아계셨으면 일흔일곱. 우리 엄마도 저이들처럼 억척스럽게 장 보고 김장을 하고 삭신이 쑤신다며 앓아누우셨을까. 엄마는 그즈음 부쩍 음식 간이 안 맞는다고, 뭘 해도 맛이 없고 김치도 짜기만 하다고 낙심했다. 혀가 늙는다는 것도, 김치 담그기가 중노동이라는 것도 삼십대인 나는 알지 못했다. 김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그 시절 엄마가 알지 못했듯이. 

어쨌거나 나는 매년 김장 김치를 먹는다. 파는 김치는 비위생적이며 당신 손으로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여기는 시어머니가 담가주시고,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의 김장이 답지한다. 올해는 친구의 시골 노모가 담근 김치를 분양받았다. 양이 많다며 배추김치 한 통에 덤으로 총각김치랑 묵은지까지 보내주었다. 끼니마다 콕 쏘는 김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면서도 목 안이 따끔하다. 한 여성이 소위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듯이, 내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인 김치를 먹게 된다. 얼마나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지고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렸을까.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한 동료의 엄마는 여든살을 맞아 김장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늦은 은퇴다. 엄마들의 잇단 김장 파업 선언에 김치 난민이 속출하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을 그려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2724.html?_fr=mt5#csidx59f1e4f302efc4dba1b0897023be4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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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다

[은유칼럼]

모처럼 한국을 떠났다 돌아온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여행 중이신 거 같아 알리지 못했는데 이재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뒤늦은 부고에 황망함이 몰려오자 그의 장례식에 찾아 뵙지 못한 죄스러움이 커져갔다.

 

이재순은 2016년 봄부터 한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10주간 같이 공부한 학인이고, 지난 수년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만난 이들 중 최고령자다. 수업 첫날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일흔 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담담한 자기 진술은 힘찬 빗줄기처럼 가슴을 두드렸고 그가 쓰는 글들은 사람은 왜 배워야하는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기에 난 그의 사연을 『쓰기의 말들』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췌장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옛 게시판을 뒤져 그가 쓴 글들을 추려서 찬찬히 읽어보았다.

 

이재순은 세 살 때 홍역을 앓았다. 부모님은 이미 아이 셋을 홍역으로 잃은 뒤였기에 포기하고 윗목에 밀어두었는데, “엄마” 하고 모기만한 소리로 불러서 살아났다. 그에게 유년 시절은 전쟁 직후로 몹시도 가난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건강한 시절은 오직 그 때 뿐이었으니까.”

 

10대부터 수난이었다. “딸인 나를 중학교에 보내면 아들인 동생을 중학교에 못 보낼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발광을 떨며”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어머니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중학교 입학금을 겨우 마련했다. 그러나 류머티즘 관절염이란 병이 공부의 앞길을 막았고  관계의 끈도 헝클어버렸다. 중3 때, 아픈 다리를 간신히 이끌고 학교에 가던 길이었는데 또래의 동네 남자아이가 절룩거리는 모습을 흉내 내며 계속 따라왔다. “너무나 화가 나서 그놈을 잡아 죽이고 싶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긴 투병이 시작됐다. 변변한 치료법을 찾지 못하던 그 시대에 병을 고쳐보겠다고 “무당들과 한 달 동안 함께 기거하며 굿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적을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먹기도 했고, 때로는 동네 두더지란 두더지는 다 잡아서 약탕에 고아 먹기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올바른 진단과 치료를 받고 겨우 걸음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도 공부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60대로 접어든 어느 해 “아픈 몸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학력란에 당당하게 ‘고교 졸’이라고 쓸 수 있다는 기쁨”에 만족하지 않고 사이버대학에 진학했으며 한의학 공부를 2년 마치고 사회복지학과로 전과하여 2급 복지사 자격증까지 받았다. 배움의 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어 평생학습관에까지 다다른 그는 공부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의 60대의 공부는 출세보다는 못다 꾼 꿈을 이루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그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공부란 끝이 없이 사람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답게 사는 방법의 탐구로서의 배움. 그것은 그가 생소한 책도 거부 없이 척척 읽어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 그는 영국의 탄광노동자들에게서 “연탄가루 묻혀가며 일하시던 아버지의 삶”을 본다. 아버지의 노동이 얼마나 고달픈 줄 몰랐고 그냥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자책, 아버지가 12세에 부모님 잃고 고아로 살아왔으니 ‘그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나이 들어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탄식, 얼굴에 시커먼 가루를 묻힌 모습으로 “재순아, 이거 먹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하시며 쇠고기 한 근 사오시던 그날의 모습을 선연히 그려낸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고는 수치심의 정의를 확장한다. 다리 수술을 하기 전엔 항상 절룩거렸고 힘든 걸음걸이보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늘 수치심으로 다가왔는데, 이 책을 읽고 “자잘한 감정의 수치심”이 아닌 “더 큰 수치심”을 깨닫게 되었다며 쓴다.

 

“(세월호 사건 때) 마음으로만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도 그들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몸의 건강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들이 울부짖고 있을 때 그들의 곁에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없었다.”

 

평생 아픈 몸을 살았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왔기에 타인의 고통을 좀처럼 보지 못했음을 그는 뒤늦게 자각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토록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그이기에 배제와 차별,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남다른 예민함으로 읽고 쓰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단어 하나 잣대 삼아 자기 생각의 크기를 재어보고, 책 한권 거울 삼아 자기 일상의 태도를 점검했던 그의 영전에 나는 책 한 권 놓아드리고 싶다.

 

강남순의 『배움에 관하여』. 이 책에서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하여 삶의 주변을 들여다본 배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행간마다 수시로 출몰하는 이재순의 얼굴과 대화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충족되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정황들에서라도’ 한 사람의 내면 한 귀퉁이에서 저렇게 잎사귀가 나올 수 있게 하는 힘”(35쪽) 그 끈질긴 희망의 줄기, 그것은 차가운 윗목에서 간신히 살아나 끈질긴 희망의 줄기를 틔워낸 그의 삶에 관한 메타포가 아닌가. 이재순은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의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137쪽)웠다. 

 

옛 게시판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수업 후기다. 평생학습관에 등록하던 날의 에피소드가 적혔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겠다고 하자, 학습관 담당자가 ‘이 프로그램은 감응의 글쓰기인데요?’ ‘저도 알아요. 신청해 주세요.’ 담당자가 나이도 많고 헙수룩한 내 모습을 보고 그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따라갈 수 있을까 미리 염려를 했던 모양이다.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 나의 삶은 병에 갇혀서 넓은 세상을 보면서 살지 못했는데, 여러 학인님들의 폭넓은 삶을 내 마음에 담아가니 나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뿌듯함에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첫 시간에 정한 이재순의 닉네임은 ‘함께하는 즐거움’이었다. “‘살아감이란 함께 살아감’이라는 심오한 존재의 철학”(182쪽)을 이미 삶으로 체화한 그였기에 자신을 낯선 자리에 개방했으리라. 내가 만일 일흔 살에 살아 있다면 어느 자리에 누구와 함께 있을까. 나보다 삼사십년 아래인 젊은이들이 모여 있고, 읽어본 적 없는 책을 읽고 써본 적 없는 글을 쓰는 그런 “변혁적 배움”(9쪽)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나는 가슴 펴고 문 두드릴 수 있을까.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자꾸만 굳어가는 생각과 관계, 익숙한 자리에 안주하려는 나를 그의 온 삶이 일깨운다. 『배움에 관하여』에 나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가 죽기 3일 전 스스로 작성했다는 장례식 조사를 나는 고인이 세상에 보내는 유언으로 마음에 새긴다.

 

“언제나 삶을 사랑하고 생존하여 살아냄을 긍정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157쪽)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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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은유칼럼]

3년 전 초여름, 동료들과 전주로 1박2일 엠티를 갔다 왔다고 하니 선배가 말했다. “너는 고3 엄마가 6월 모의고사 보는 날 놀러 갔니?” 이 질책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는데, 6월과 9월 모의고사가 대입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한 시험이란다. 특히 6월 모의고사 성적은 거의 수능 점수로 보면 된다고. 알고 나서도 어리둥절했다. 그렇다면 그날 엄마 된 자로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몰라서이고, 내 정체성이 고3 엄마로 명명된 상황이 뜬금없어서다. 

고3 엄마의 본분에 대한 무지와 나태는 11월까지 이어졌다. 수능 날도 도시락 싸서 보내놓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예배당을 갈 수도 없는 노릇. 그냥 광화문 카페로 달려가 책을 폈으나 책장은 그대로다. 아이가 답안지를 밀려 쓰는 건 아닌지 따위의 별별 걱정에 마음이 콕콕 조여왔다. 긴 하루를 보내고 이듬해 모 대학 ‘추가 합격자’ 명단에 아이 이름이 오르면서 고3 엄마를 간신히 면했다.

그 심란한 겨울을 보내고 나니 입시를 왜 ‘입시 전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동생의 희생까지 네 박자가 맞아야 아이가 명문대에 간다는 말에는 거짓이나 보탬이 없다. 그런데 생업은 제쳐둔 채 입시설명회에 다니고, 수백 가지가 넘는 수시 전형을 파악하고, 고가의 입시 컨설팅을 받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시사IN 신선영

올해도 친한 친구들이 수험생 부모가 되었다. 아이가 수시 원서 넣을 대학을 정하느라 두통약을 먹고, 시험장에 따라다니느라 업무 시간을 뺐다. 원서비만 100만원에 육박했고,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심야 할증요금 붙듯 마구 오르는 학원비에 기겁했다. ‘비(非)강남권’ 지역의 학원도 사정이 이랬다. 입시 전쟁에서 살아남기는커녕 끼어들기만 하려 해도 적지 않은 판돈이 든다. 전쟁으로 군수산업이 돈을 벌고 힘없는 병사들이 죽어가듯 입시 전쟁에는 학원산업이 득을 보고 평범한 아이들은 조용히 스러져간다. 

11월 들어 고등학교 두 곳에 강연을 갔다. 과학 고등학교에서 글쓰기에 관심 있는 아이들과 일반 고등학교에서 흡연 예방 교육을 받는 아이들을 각각 만났다. 과학고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해봤느냐 물었더니 “저희가 시간이 어딨어요” 한다. 사교육의 최전선을 일찍이 통과한 그 아이들은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살고 주말에는 귀가해 사교육을 또 받는다. 

흡연 예방 교육에 온 한 학생은 주유소 알바를 하다가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그만둔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대학진학률이 최하위권이라고 담당 교사가 전했다.

수능 한파를 몰고 오는 그들의 비명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펴냄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를 쓴 벨 훅스는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들은 선택받았고, 특별하며, 이렇게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운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백인들(13쪽)”을 만나면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한다. 그녀는 마르크스도 구체적인 해법을 알려주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복잡한 계급 문제(62쪽)”에 맞닥뜨린다.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인간은 경험적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했고, 가난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아닌 학습 능력만 평가하는 제도를 통과해 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이루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우리 사회의 경제 체제가 공정하게 변화하기 위해선 계급 분리를 조장하는 입시 제도부터 달라져야 할 텐데, 현실은 요원하고 수능은 요란하다. 

올해도 수능 추위가 예고됐다. 딱히 대학을 거부할 소신이나 대안이 없고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재력과 실력도 간당간당한, 대다수 학부모와 아이들의 비명이 매년 수능 한파를 몰고 오는 게 아닐까. 


* 시사인 은유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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