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DMZ국제다큐영화제 - 여성노동자, 존재 회복의 여정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9월 24일 일욜, 영화 보고 대화 나누러 많이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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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중생들을 보라

[은유칼럼]

매 맞지 않고 성폭력 당하지 않고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십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슬픔에 잠이 깰 때마다 새벽녘 시를 썼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처럼/ 그렇게 때렸으면서// 당신은 뭐가 그렇게 급했기에/ 이토록 빨리 나를 내려두고//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버렸나요.’ 이 3연짜리 시의 제목은 ‘가족’이다. 나를 죽인 건 당신들인데 왜 난 당신들을 그리워하고 있나요, 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관한 시를 쓰고 ‘무서운 나의 집’이라는 글도 남겼다.

내 몸엔 보라, 파랑, 빨간색 멍이 얼룩덜룩 있었고 전신거울로 그걸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고, 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입었으며 친구들 입는 핫팬츠를 못 입고 멋을 내지 못해 억울하다고 그 옆의 여자아이는 썼다. 한 사람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상처, 아니 피와 멍의 양과 부피를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눈앞에서 자꾸만 물방울처럼 흩어지는 글자들을 문장으로 모아서 읽느라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떻게 얼마나 언제까지 아팠을지 알 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부산 여중생 폭력 사건의 사진을 봤을 때, 그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자아이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몸의 수난들. 그들이 쓴 증언의 단서들로 서투르게 그려보았던 참혹한 장면들. 제아무리 상상력과 공감력을 동원해도 문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완강한 현실들. 부산 여중생은 또래 집단에 의해 일어난 학교 밖 폭력이고, 내가 만난 아이들은 부모에게 당한 가정 내 폭력이지만 공권력이 작동하지 못하는 사적 공간에서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저 지경으로 맞는 여중생이 저게 다가 아니다. 부산을 기점으로 강릉, 대전 등 전국으로 산불처럼 번지는 여중생 폭력 사건의 경쟁적 보도와 네티즌의 공분 기류에 편승해 일러바치고 싶다. 당신의 옆집에서 아침이면 말짱하게 양복 입고 출근하는 아빠에게 맞는 그 또래 아이들이 있다고. 남이 아닌 혈육이라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정을 이용해 폭력을 저지르는 어른 가해자는 어떻게 색출하고 처벌하면 좋겠는지 조언을 구하고 싶다.

여중생 가해자가 저지른 ‘조폭 수준’의 잔혹함은 놀랍다. 그러나 대학, 군대, 직장, 집 등을 무대로 어른들이 펼치는 은밀하고 무자비한 조폭 수준의 폭력 사건, 그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해 여중생을 감옥에 영구 격리 시키자는 엄벌주의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청소년을 봐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봐주면 안 된다.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폭력의 총량을 인식하는 게 우선이다. 사적 공간에서 겪은 폭력을 공적 장에서 떠들고 각각의 폭력 경험을 연결해야 한다. 부산 여중생 피해자가 있기 전에, 이미지의 스펙터클로 전시되지 않았다 뿐,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 피해자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저 나이에 난 얼마나 맞고 살았는데…, 부러워요.” 몸의 피멍을 시어로 빼내는 저 아이는 피해여성 쉼터에 있는 여중생을 보며 집에서 좀 더 일찍 탈출하지 못한 제 처지를 통탄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은 자’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실천하고 있다. 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 안색과 몸을 잘 살펴달라고, 가정폭력·성폭력 당하는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을 연계해주라고 신신당부한다. 피해자의 몸-말에 집중할 때 그나마 가해자의 악을 최소화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0269.html?_fr=mt5#csidx36dc693d9b777feba3e3634fd13c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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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은유칼럼]

‘아이의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주세요.’ ‘아이가 화낸다고 같이 화내지 마세요.’ 어느 건물 승강기에 탔더니 ‘좋은 부모 10계명’이 붙어 있다.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의 말이다. 그걸 보며 쓴웃음이 나왔다. 부모가 저렇게 하려면 적어도 초과 노동이나 타인의 무례와 간섭에 시달리는 임금노동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관대함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는 말은 진리다. 좋은 부모 노릇은 10계명이 아니라 등 따습고 부른 배, 심리적 평안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그냥 부모는 없다. 건물주 부모, 그 건물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부모, 만사가 귀찮은 갱년기 부모,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해 화가 난 젊은 부모가 있을 뿐.

ⓒAP Photo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묘.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미친년’을 애 키우다가 만난다고, 엄마들이 모여 자조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나도 그랬다. 퇴근 후 집이 어질러져 있거나 아이가 보채면 부아가 치밀었다. 온종일 누적된 짜증과 피곤이 다 어디로 가겠나. 눈앞에 있는 만만한, 나보다 약자인 아이에게 쏟아졌다. 그러곤 아이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 슬픈 반복을 단절하고자 내가 택한 건 마음 다잡기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이다. 일을 줄이고 반찬가게를 활용했다. 그제야 ‘아이가 화낸다고 같이 화내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를 버릇없이 키우지 말라는 양육법 같은 것은 이미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 좋은 엄마는 고사하고 불량 엄마를 면하고 싶은 내게 도움을 준 유일한 육아서가 있다.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

이 책은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해자 딜런의 엄마가 쓴 자기 진술서다. 저자의 직업은 장애인 학교의 교사. 자기 아이들에게 늘 약자에 대한 관심, 관용과 포용을 강조했다고 한다. 딜런은 학대와 방치를 당한 게 아니라 소위 ‘정상 가정’의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친 16년의 기록을 공개한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라는 식의 답은 없다. “내가 알고 신경 쓰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쏟아부었다. (…) 설교하는 대신 귀를 더 많이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419쪽)”와 같은 회한만 간간이 새어나온다. 그런데 저자에게는 또 다른 아들(딜런의 형)이 있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다르게 큰다. 나쁜 영향이든 좋은 영향이든 부모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이 아니라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거나 방심하지 않는 법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도 다르게 크는 아이


한국에서도 인천 초등생 살해 사건이라는 끔찍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했다. 콜럼바인 총격 사건을 두고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은 쉽게 판단했다. “사악함을 타고난 나쁜 씨앗이었다거나, 아니면 도덕적 지침 없이 막 자랐다고(243쪽).” 가해자와 부모를 욕하고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까 봐 염려한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멀쩡해 보이는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사람은 가정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며 “아이가 아무리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그걸 드러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부모, 교사, 친구들조차 모를 수 있(183쪽)”기 때문이다. 

‘이웃집 괴물’은 부모의 지덕체 결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좋은 부모’라는 낭만화된 이상은 양육의 본질을 가리고 매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사이 현실은 빠르게 나빠진다. 아이를 잘 키우기보다 명대로 본성껏 살게 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게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좋은 부모 10계명 대신 붙여놓고 싶은 문장이 있다. “도덕성, 공감, 윤리, 이런 건 한 번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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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은유칼럼]

마흔 이후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 특별히 약을 챙겨먹어야 할 질환이 없어서였는데, 그랬더니 몸에 무심해졌고, 무심하다가 와르르 망가지겠다는 신호가 왔다. 종종 숨이 가쁘고 골이 띵하고 몸이 꺼졌다. 7년 만에 검진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리 마치고 1~2주 후에 오라기에 날짜에 맞춰 예약을 했는데, 검진을 앞두고 또 생리를 하는 게 아닌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혐의는 하나였다. 갱년기, 생리불순. 두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는 손가락은 더디었다. 갱년기라는 말이 내 삶에 최초로 기입되는 순간, 속옷에 묻은 생리혈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나는 저 홀로 수치스러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13쪽).”

ⓒ시사IN 신선영


<아픈 몸을 살다>는 심장마비와 암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을 사유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대인이 자기 몸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빈곤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 생리불순 같은 일시적 증상부터 심각한 질병까지 아픈 얘기는 궁상이나 엄살, 약점이나 결핍으로 치부됐기에 너나없이 쉬쉬한다. 그럴수록 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 몸은 ‘의학의 식민지’가 된다.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 나는 앞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의심을 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기에 생리불순 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목소리는 목소리를 불렀다. 또래나 선배 여성들이 원래 그런다, 더한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수년 내 폐경이 온다는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배울 기회를 챙겼다. 인체의 신비는 여전히 모르겠어도 늙어가는 자궁의 변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번 검진에서 수면 내시경도 처음 받았다. 손등에 주사 바늘을 꽂고 위 운동 억제제, 목 마취제라는 야릇한 맛의 시럽을 삼키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커튼으로 칸칸이 구획된 곳으로 내시경 받을 사람, 받은 사람, 마취 깬 사람의 침대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 질서정연한 사람의 흐름에 나 또한 이름이 불려 끼어들어갔고, 눈을 떴을 때는 검사가 끝난 뒤였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봄날의책 펴냄

수면유도제 기운 탓인지 기분 탓인지 몽롱한 가운데 말소리가 들렸다. 옆 칸 침대의 남자 어르신은 혼자 갈 수 있다며 몸을 일으키고, 간호사는 연세가 있어서 위험하며 보호자가 와야 나갈 수 있고 혼자 가려면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비용이 1만원 든다고 했다. 실랑이가 길어졌다. 저 어르신은 보호자가 없는 걸까, 1만원이 없는 걸까. 둘 다 없는 걸까, 둘 다 있지만 의료 체계에 저항하시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로 보호자를 대동할 수 없는 환자가 분명 있을 텐데 어쩌란 말인가. 

질병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다

아프거나 아팠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두 노인네 밥 먹고 병원 다니는 게 일이라고 한탄하는 시부모님,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받은 아버지, 전신 마취하고 디스크 수술을 한 남편. 큰 수술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병원 침대에서 느꼈을 고립감과 “더는 젊지 않은 자신과 헤어지는 일(148쪽)”의 처연함을 너무 몰랐다. 나의 반성과는 별개로, 아픈 사람을 “가족의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존재(197쪽)”로 만들고 질병을 개인의 성격이나 건강관리 부주의로 돌리는 사회 현실에는 분개한다. 

“질병이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202쪽)”고 하니 감내할 건 감내하고 싸울 건 싸우면서 몸의 일기를 기록해야겠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생리가 규칙적일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김훈이 쓴 산문집 <풍경과 상처>의 첫 문장,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의 패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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