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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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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이라는 착각, 정상이라는 환영 초여름 볕이 좋아 이불을 빨아 널다가, 베란다에 빨래가 널려 있으면 저 집은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는구나 알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빨래는 평화의 깃발인가. 두 아이를 면 기저귀 채워서 길렀다. 전업주부라 시간이 많았다. 하루치 똥오줌을 받아내고 세탁기를 돌리고 하얗고 네모난 기저귀를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켰다. 일상 의례처럼 날마다 빨래를 하던 그 시기가, 그러고 보니 내 생애 가장 평범한 날들이었다. 평범의 뜻이 무변고·무고통·무탈함이라면.얼마 전 여성 쉼터에 사는 한 친구가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는데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저 거실 안에는 지금쯤 식구들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겠지 싶고 자기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거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민지(가명)는 수업 시간에 자주 엎드렸다. 의견을 물어도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물 잔처럼 놓여있던 민지는 할 말이 생각나면 남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주장도 의견도 아닌 그 파편적인 말들을 나는 팔뚝에 튄 물방울 닦듯 무심히 대꾸하거나 못 들은 척 넘겼다. 한 번은 민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쌤은 할 말 없을 땐 말 시키고 말하고 싶을 땐 안 시켜요.” 고루 발언 기회가 돌아가는 ‘말의 평등’을 우선시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민지는 ‘어른들’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아는 얘기가 나와도 끼어들 순간을 못 찾겠다고, 다른 사람 말이 끝나고 말하려면 안 끝나고, 끝나면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는 거..
세바시 은유 - 무관심은 어떻게 혐오와 푹력이 되는가 저는 글 쓰는 일을 하면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은유라고 합니다.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강사라고 하기엔 역할에 한계가 있습니다. 글쓰기 노하우를 알려줘도 상대방이 안 쓰면 그만이니까요. 방법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글을 쓰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마감, 둘째 독자, 셋째 원고료. 이 중 하나만 있어도 글을 씁니다. 저는 독자 역할을 합니다. 써온 글을 열심히 읽고 의견을 말해줍니다. 1. 나의 편견과 무관심 – 게으르니까 뚱뚱하다 한 친구가 아르바이트 경험을 글로 써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더니 살이 쪘다”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물어봤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힘들어서 살이 빠지지 않아요?”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요. 식사 시간이 넉넉지 않아 음식을 빨리 먹고, 빨..
그런 사람 처음 봐요 난생처음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울트라 코리아 2017’이 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이르러 친구와 수군거렸다. 우리가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온 거 같지? 과감한 신체표현 의상에 타투는 기본, 코스튬은 선택, 국기를 든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옷 한 벌로 한 계절 날 거 같은 중년의 덕후들도 오는 록 페스티벌과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은 달랐다. 나이와 계급의 차이랄까. 관객이 젊고 부티 났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어보니 이십대가 가장 많고 사오십대 예매율은 2%라고. 내 생에 그렇게 처음 2%가 되어보았다. 나도 록 페스티벌을 처음 간 건 이십대였다. 송도에서 열리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 남편이랑 두 돌 지..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말 한마디 2014년 4월17일,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날 영화 가 개봉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우 천우희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한 여중생이 남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 일상을 보여주는 사물은 트렁크다. 딱 그만큼이 피해자에게 허락된 삶의 지분 같았다. 가해자는 지붕 있는 집에서 발 뻗고 잠들고 피해자는 짐 가방 끌고 떠다니는 현실.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한공주는 입을 연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조용한 되물음. 여성주의 논리나 주장이 아닌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한 저 발언. 항변이라 하기엔 담담한 발화가 화살처럼 박혔다. 잘못 없는 사람이 되레 질긴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