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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 화장하는 아이들

[은유칼럼]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파우치를 꺼내놓고 입술연지를 바르거나 파우더를 두드린다. 헤어롤을 말고 있거나 셀카에 열중하는 아이도 보인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30명이 모인 자리니까 시집이나 만년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책상을 점령한 의외의 사물에 놀란 건 사실. 이 신세계 구경에 어리둥절한 내게 담당 교사는 귀띔했다. 대다수 아이들을 ‘교칙 위반자’로 만들 수 없다는 교장의 용단에 따라 화장 금지 조항을 없앴다고. “아침에 화장 못 하고 출근하면 애들한테 빌려 써요” 하며 웃는다.

비슷한 시기에 대안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교사와 학생의 토론 끝에 교내 화장 금지로 결정이 났단다. 화장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대립 관계가 아니다, 화장을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좋다는 내용의 과제물을 한 학생이 제출했다. 그 글에 다른 학생이 동조했다. “십대는 화장 안 해도 예쁘다는 어른들 말은 이상해요. 사실 화장하면 더 예쁘잖아요?”

귀가 반짝 열렸다. 정말 그런가 싶어 떠올려 보았다. 화장한 얼굴은 해님같이 쨍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햇살처럼 퍼진다. 또렷함과 은은함의 차이, 같은 신체 다른 표현이다. 근데 나는 왜 교복 입은 아이들은 맨얼굴이 낫다고 믿었을까. 자연에 대한 낭만적 이상화 같은 건가. 생각해 보니 생각 자체가 없었다. 크는 동안 어른들에게 들어온 익숙한 말들을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들에게 적용한 것뿐. 대개의 선악 판단이 그러하듯 낯섦에 대한 저항, 익숙함에 대한 옹호일 따름이다.

딸내미는 열여섯살이다. 얼마 전 생일엔 립글로스와 마스크팩을 선물로 받았다. 앞머리를 목숨처럼 여겨 헤어롤을 가방에 부적처럼 넣고 다니는데 아직 화장은 하지 않는다.(밖에서는 하는지도 모름) 고등학생이 되면 입술색도 짙어지려나. 10년 후쯤엔 직장을 나가면 아마 지하철에서 허둥지둥 손거울 들고 눈썹을 그리는 민폐녀가 될 수도 있겠다. 중년엔 지체 높은 신분이 되어 실수로 헤어롤을 매단 채 회의에 나가면 일하는 여성의 애환을 보여준 미담의 주인공이 될지도.

아이들 말대로 어른들은 이상하다. 화장과 관련한 일련의 삽화들을 떠올려보니 일관성이 1도 없다. 십대의 강을 건너는 순간 여자의 민낯에 대한 평가는 순수의 상징에서 무례의 표시로 뒤바뀐다. 화장이 부덕에서 미덕이 되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지 알 수 없으나 당사자인 여성의 욕망과 목소리는 애초부터 배제된다. 묻지 않고 듣지 않고. 화학 물질이 아이들 피부에 해롭기에 화장을 금한다는 말도 궁색하다. 이 미세먼지 나쁨의 나라를 건설한 어른들이 말이다.

이상한 어른 일인으로서 반성한다. 갑갑한 교육 현실, 세상은 못 바꾸고 화장으로 자신을 바꾸겠다는 주체적인 아이들을 잠시나마 힐끔거렸다.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분류하는 자체가 기성세대의 문법이다. 그것도 낡은. 너희들은 육체의 좋음에 무능하여 영혼의 좋음을 최상으로 추구하는 게 아니냐고 니체라면 일갈했을 것이다. 좋은 화장품 사주든가, 해로운 화장품은 만들지 말고 팔지를 말아야 한다. 그게 어른의 일이다.

꾸준한 행동으로 분가루 냄새 약동하는 교실 풍경을 일궈낸 아이들, 화장을 하는 이유를 또박또박 주장하고 어른들의 두서없는 논리와 간섭을 반박하는 아이들, 나탈리 크나프가 정의한 대로 “인생의 지혜에서 아직 멀어지지 않은” 이 존재들에게 화장권이 널리 허용되길. 화장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는 멀지 않아 보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1757.html?_fr=mt5#csidx5ef57463832a4e797c7f8ebf50f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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