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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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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과 전혜린 ‘본분’이라는 말, 이 쿰쿰한 냄새 피우는 단어의 옷을 공교롭게도 ‘여자 아이돌’이 입고 나타났다. 설 연휴에 KBS 2TV에서 ‘본분 금메달’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고 제목 그대로 누가 더 여자 아이돌의 본분에 맞는가를 겨루었다. 가령 모형 바퀴벌레를 던져놓고 얼마나 예쁘게 놀라는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도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는지, 프로필상 몸무게와 실제 몸무게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등의 테스트를 거친 후 총점을 매겨 무슨 올림픽처럼 금메달을 수여했다. 방영 후 ‘아이돌 괴롭히기’라는 논란이 일고 ‘눈살 찌푸리게 한다’는 시청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럴 만했다. 본분本分.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이 행실 바른 말의 숨은 폭력성을 저 프로그램은 여실히 드러냈다. 학생의 본분..
딸이니까 , 지난 설에 친정에 들러서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싱크대에 붙어서 쌀을 씻고 전을 부쳤고 아버지는 거실에 놓인 상을 정리했다. 평소 네모난 교자상에 신문이며 우편물, 성경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아버지는 우리 식구가 오면 거기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상을 치운다. 그날도 주섬주섬 물건을 내려놓더니 당신 손녀를 불렀다. "행주 갖다가 닦아라." 그리고 그 상에 둘러앉아 다같이 밥을 먹었다. 식사 후 그릇들과 물컵, 남은 반찬을 남편이 나르고 상을 치우는데 아버지는 또 손녀에게 물 가져와라, 컵 가져오라며 이것저것 시켰다. 부엌에서 일하는 나는 그 말이 점점 귀에 걸렸다. '왜 딸아이를 시키지..'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참고 있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야, 행주로 상 닦아라." "아니, 왜 ..
올드걸의 시집 - '책방 비엥'으로 첫 책 이 절판되었다. 여러가지 사정 상 그렇게 되었고 개정판을 다른 출판사에서 내기 위해 이야기 중이다. 청어람미디어에서 나온 초판본. 그러니까 남은 책 100권이 집으로 왔다. 출판사가 내게 묻지도 않고 절판과 남은 책의 '처분'을 결정했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챙겨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하는 이런 상황. 사과상자 두 상자에 담긴 책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무슨 유품을 받은 거 같기도 하고. 내 한 시절 떠돌다가 돌아온 아이 같기도 하다. 아무튼 시중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판매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더 아름답고 유의미한 방법을, 나눌 방법을 찾고 싶다. (하루 뒤, 그 방법을 찾았습니다. 서점의 제안으로^^)-----------------------..
여가부에서 온 우편물 여성가족부에서 우편물이 왔다. 24세 남자의 무표정한 정면 측면 얼굴과 전신 사진, 주소, 범죄 사실이 담긴 ‘고지정보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른 것으로 성범죄자가 사는 인근 지역에 보내진다고 했다. 성범죄자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데 그 우편물은 안도감보다 불쾌감만 키웠다. ‘이웃을 조(의)심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런 행정 조처는 변죽만 울리는 꼴이다. 골목길에 나타난 범죄자라는 편견을 강화해 집안이나 사무실에 ‘상주’하는 가해자를 못보게 한다. 성범죄자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간 공적 사적으로 만난 성폭력피해여성들의 가해자는 거의 친족, 직장 동료, 고용주, 교사, 친구 같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를 예비하지 않았으니 피해를 입고도 그것이 성폭..
감응의 글쓰기 4기 수업 사진 이상 토요반 수업사진, 뒷풀이 사진, 엠티 사진 대방출 수요반 엠티사진 - 이태원 개수작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