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025)
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이거 대화 아닌데요? “엄마 아빠가 대화하자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편하게 말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앉아 있는 게 힘들어요.” 글쓰기 수업에서 스무살 학인이 말했다. 대화는 관계의 윤활유라고 아는 난 혼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부모가 운동권 출신이란다. 어릴 때부터 지속된 소통형 참교육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자식이 보기에 부모는 돈, 힘, 지식을 다 가진 강자다. 자식의 생살여탈권, 적어도 용돈권을 쥐고 있다. 그런 비대칭적 관계에서 약자는 발언의 수위를 검열하거나 잠자코 들어야 하는 정서 노동을 피하기 어렵다. 대화가 배운 부모의 좋은 부모 코스프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은 나도 ‘이만하면 좋은 부모’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자 서로 바빠서 대화는커녕 대면 기회가 줄..
은유 글쓰기 - 메타포라 5기 강좌 안내 *** 5월 27일 (목) 4시부터 신청 가능합니다.
페인트 눈물 고양이 무지는 아침마다 베란다 창틀로 뛰어오른다. 18층 꼭대기는 세상을 관찰하기 좋은 전망대다. 그런 고양이의 의젓한 뒤통수를 나는 책상에서 감상하곤 한다. 하루는 무지가 생소한 울음소리를 냈다. 옆동 옥상에서 먹잇감인 새를 봤을 때 내는 우렁찬 야생의 소리랑은 달랐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아파트 난간에 사람이 있다. 24년 된 단지의 페인트칠이 시작된 거였다. 작업자는 밧줄에 매달려 페인트 스프레이를 빠른 손놀림으로 뿌려댔다. 방석만한 깔개에 엉덩이를 댄 그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떠 있었다. 간당간당 흔들리는 사람을 보자 현기증이 났다. 건물 벽에 붙은 사람이 지상에서는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데 같은 층 높이에선 인체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커튼을 닫았다. 무지는 꼼짝 않고는 간간히 요상한 소..
죽은 자는 정말 사라지는가 “애들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이제 마음에 묻어라.” “교통사고다 생각해라.” “시간도 흘렀는데, 옛날처럼 같이 산에도 다니고 만나서 술 한잔도 하자.” “아이를 잃은 건 슬프지만 너는 그만큼 보상을 받지 않았냐?” 세월호 유가족이 들었던 위로의 말들이다. 상대방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유가족을 배려하는 행동도 배려가 되진 않았다. “유가족입니다” 하는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시킨다. 커피 한 잔, 물 한잔 마시려고 해도 “앉아계세요, 제가 타드릴게요.” 하고 어딜가도 유가족 자리는 따로 마련한다.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된다. 유가족이 술을 시켜도 되나, 화장은 해도 되나, 여행 간다고 손가락질 하면 어쩌나 지레 주눅이 든다. 세월호 5주기에 맞춰 발간된 유가..
교보문고 365 인생학교 - 이해와 공감의 글쓰기 ✅강연 신청: https://bit.ly/2WMuhUD
교보문고 북뉴스 - '다가오는 말들' 신간 인터뷰 일상에서 읽고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냥 지나치던 삶의 작은 결을 좀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고, 그러면서 전에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래서 전보다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이라도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이다. 은유 작가의 에세이 『다가오는 말들』은 그렇게 읽고 쓰고,아니 그 전에 낯선 세계와 만나고 듣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음을 열고 낯선 세계에 한 발자국 다가갈 때 나에게 '다가오는 말들'의 경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가오는 말들』의 은유 작가와 만났다. 질문을 받으면 먼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떠오르고, 천천히 말을 ..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 괴산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갔더니 연탄난로가 서있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보곤 처음이다. 동창이라도 만난 듯 다가갔다. 불꺼진 난로 옆에 연탄 여덟 개가 대기 중이다. 어릴적 엄마랑 외출했을 때 엄마는 연탄불이 꺼질까봐 늘 발을 동동거렸다. 연탄 구멍 사이로 엄마의 초조한 눈빛이 보인다. 너는 누구를 위해 한번이라도 연탄을 갈아봤느냐, 유명한 시구를 내맘대로 고쳐 써본다. 대합실 벽면엔 ‘축 발전’이 새겨진 거울이 걸려 있다. 서울에서 고작 두 시간 이동했는데 다른 시간대에 떨어진 영화 주인공처럼 나는 두리번거린다. 괴산 솔멩이마을에 글쓰기 강연을 왔다. 섭외 제안이 연애편지 같았다. 진즉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못하다가 사업비가 생겨서 부른다는 사연. 가난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괴산이라서 더 그랬을까. 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