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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임 말고 책모임 추석 무렵 글쓰기 수업에서 한 삼십대 여성은 명절과 제사 때 시가에 가지 않는다고 썼다. 이유는 이랬다. “가족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오히려 가족 단위로 다시 뭉쳐 또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다.” 이 이상한 전통이 자기 선에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내린 결정이며, 편가르기와 뒷담화의 자리를 대신해 부모님을 따로 찾아뵙거나 같이 여행을 가는 식으로 효행을 실천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쁜 며느리’라는 친척들의 냉담한 시선을 감수하는 이행기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나는 그가 질긴 관습을 끊어낼 수 있었던 용기와 언어의 원천이 궁금했는데 글에는 나오지 않아서 물었다. 엄마의 당부란다. 대가족 집안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딸에게 완벽하려 애쓰지 말라고, 길게 볼 사람들이니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율하..
<글쓰기의 최전선> 예스24 리커버 한정판 나의 좋음은 남의 좋음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작은 실험이었다. 삶의 복잡한 문제에 치여 있던 때, 나는 자주 화가 나 있는 사람처럼 굴었는데 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또 하루를 살아내곤 했다. 있던 일을 복기하고 감정을 들여다보고 뒤엉킨 생각과 의견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화를 덜 내는 사람이 되었다. 훌륭하게 사는 일은 어렵고 친절하게 살고 싶었던 나로선 꿈을 이뤄가는 기분이었다. 나만 좋으면 아까우니까 글쓰기 수업을 열었고 그 여정을 기록해 『글쓰기의 최전선』을 펴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고백했다. 용기 내어 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글쓰기를 배우려다 인생을 배웠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했다고. 글쓰기로 자신과 화해를 이룬 이들의 경험을 엮어 나..
'그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김순자는 1979년에 삼척고정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원가족 12명과 함께 잡혀갔다. 남편은 딴살림을 차렸고 열 살, 일곱 살, 네 살 삼남매만 남겨졌다. 외가 쪽 친척은 다 구속됐고 친가에선 외면했다. 엄마의 복역기간 5년간 아이들은 이집 저집 떠돌며 컸다. 학교에선 ‘여간첩의 아이들’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큰딸은 학교 갈 차비도 없는데 설상가상 생리를 시작했다. 한번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져서 아무 부잣집에 들어가 청소해드릴 테니 돈 좀 달라고 해 생리대를 샀다고 한다. 3년 전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다. 고문보다 오래가는 상처로 김순자는 큰딸의 생리대 일화를 언급했다. 나 역시 인상깊었다. 큰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간첩사건은 같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딴 세상 일로 알았는데 내 또래가 이..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
백현진, 작업하는 사람 인터넷 검색창에 ‘백현진’ 세 글자를 넣으면 가수, 화가라는 인물 정보가 뜬다. ‘위키백과’엔 그가 참여한 영화와 음반 목록이 주르르 펼쳐지고, ‘동영상’엔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개장수로 분한 모습이 나온다. ‘이미지’엔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이 시선을 끈다. 바다 물결처럼 매 순간 다른 존재를 펼쳐내는 멀티플레이어 아티스트 백현진. 한때 ‘연남동 사는 백현진’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가 힙스터의 성지로 주목을 받자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백현진’으로 바꾸더니, 지금은 그저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현진은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붓을 잡는 사람이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독보적 화가다. 그가 2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삼청동 PKM갤러리는 ..
시인 문정희 - 본질적으로 시인은 여자다 인생에 한 번쯤 ‘사랑의 눈사태’를 꿈꾸는 자의 유명한 주술,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한계령을 위한 연가」)의 시인 문정희. 그가 눈앞에 있다. 검은색 롱 카디건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시인의 자태와 형형한 눈빛은 존재 그 자체로 주변 온도를 덥혀놓는다. 1969년 스물둘에 등단한 그는 최근 열네 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을 펴냈다. 여러모로 드물고 귀한 시집이 우리에게 당도했다. 시인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인으로 살기는 척박한 현실에서 등단 50년간 독보적인 위상을 지킨 사람. 그는 남성 중심의 언어로 짜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삭제당한 여성의 존엄과 목소리를 살려내는 시-업에 일생을 투신했고, 이번 시집은 그 절정을 꽃피웠다. 유일한 무기는 모국어, 창작의 동력은 자유와 사랑이다. 그래서일까. 시..
졸음과 눈물 한 중학교에 오전 강연을 갔다가 급식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12시 반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싶었다. 돌아서면 허기가 올라와 2, 3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고도 점심시간엔 매점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배고픔을 참고 강연을 듣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정말 잘 듣고 싶었는데 잠깐 졸았다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는다. “근데 원래 1, 2교시엔 아침잠이 덜 깨서 졸려요. 3, 4교시엔 배고파서 힘들고요. 5, 6교시엔 점심 먹고 난 뒤라 비몽사몽이고 7교시엔 좀만 있으면 학교 끝난다는 생각에 들떠서 또 집중이 안 돼요.”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가 이내 짠해졌다.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겠지만 결국 학교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인가..
북콘서트 -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북토크 2019년 7월 25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팟빵홀에서 바갈라딘, 박태근님의 진행으로 열립니다. 고 김동준 군 어머니 강석경 선생님,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이은아 위원장님과 이야기 나눕니다. 관심 가져주세요. 신청은 요기 https://blog.aladin.co.kr/m/culture/10947367?Partner=